왜 사는가?/자작시

끝이 보인다는 건

雲靜, 仰天 2025. 8. 9. 19:23

끝이 보인다는 건



시작과 끝이 손을 맞잡는 일  
자궁을 밀고 나와  
꽃상여에 실려 돌아가듯  
하나의 생은 둥근 길을 걷는다.  

앞만 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주름을 펴듯 뒤를 돌아보니  
그제야 앞이 드러났다.  

끝이 보인다는 건  
남은 시간이 향처럼 조용히 탄다는 뜻,  
예전엔 없던 새로운 시작이  
다른 방향으로 열린다는 말이다.  

시작도 끝도 영원하지 않다.  
끝은 알 수 없지만,  
삶의 태도에 따라  
동과 서가 맞닿듯  
하나이자 둘인 진리가 있다.  

끝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곧 시작이다.  

끝이 없는 삶이라면  
삶은 멈춤이다.  
끝을 향해 나아가는 일,  
그것이 삶을 다시 여는 시작이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다.

2025. 8. 9. 19:23.
은평 메디텍고등학교 옆 소파에 앉아서 초고
2025. 12. 19. 17:03.
3호선 전철 안에서 퇴고
雲靜

2025년 2월 21일(금) 아내와 함께한 프랑스 여행 중 파리 몽빠흐나쓰 묘원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뜨르 묘소에서
젊은 시절 20대 중반 때, 사르뜨르가 사는 방식이 멋있어 보였다. 그 뒤부터 나도 모르게 그 어떤 관념적 가치 보다 인간의 실존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파리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당한 핸드폰을 찾아 나선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친절하게 도움을 준 프랑스 연출가 알랑(Alan) 선생에게 분실 상황과 지하철 직원들의 불친절을 설명해주고 있다.
대화를 나눠보니 알랑은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의 추종자로서 그가 남긴 여러 가지 장르의 예술작품들을 현대적으로 연출하는 직업 연출가였다. 양성애자로서 보헤미안적인 예술가의 삶을 산 장 콕토는 프랑스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시인, 소설가, 극작가, 영화감독이었는데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하게 두각을 나타난 작가였다. 내가 장 콕토의 작품을 얘기하니 동지를 만났다면서 반가워했다. 내가 그를 두고 장 콕토의 예술가 정신이 내면화 돼 있으니 우리처럼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한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자발적으로 도와주게 되는 것이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맞다고 해서 같이 한 바탕 크게 웃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많지만(나이 차를 많이 따지는 건 한국과 일본이 유달리 강하고 중국인들과 서양인들에겐 그다지 중요한 기준은 아님) 앞으로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한 두 사람. 그 뒤로도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왜 사는가? >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모두, 바람꽃인 걸  (0) 2025.09.04
친구, 기울지 않으려는 마음  (0) 2025.08.27
수박  (0) 2025.08.07
8월 들녘에 서서  (0) 2025.08.05
포항에 가보라!  (5) 2025.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