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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로 읽는 언어 이야기 14: 불교의 핵심 개념 空의 字意 바르게 알기

雲靜, 仰天 2025. 6. 17. 17:49

심심풀이로 읽는 언어 이야기 14: 불교의 핵심 개념 空의 字意 바르게 알기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이나 일어와 한글 경전에 나오는 空이라는 글자는 비어있다거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인도 산스크리트 불교 경전의 Śūnyatā라는 단어를 비어있다는 뜻의 空으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에 그 뒤로 계속 한국인들이 잘못 이해하게 됐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오류를 반복해선 안 될 것이다. 일단 불교에서 말하는 Śūnyatā는 “없다”, “비어 있다”라는 뜻이 아니고, 실체 없이 인연가합으로 있거나 존재한다거나, 없어도 없는 게 아니고 있어도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모순 상황인 이것이 가능한 말인가? 아래 설명을 들어보면 이 말이 수긍이 될 것이다.

Śūnyatā를 고대 중국인들이 空으로 번역한 것이 중대한 착오라는 사실은 空의 한자 어원을 따져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원래 空은 穴(구멍 혈)+工(장인 공)자가 결합된 글자다. 穴은 고대 중국의 황토 지역에서 언덕에 동굴을 파고 무너지지 않도록 양쪽에 받침목을 댄 모습을 본딴 상형이었다. 그 모양에서 구멍이라는 뜻이 나왔고, 工은 고대 중국에 담을 쌓거나 집을 지을 때 진흙을 다지는 도구였다. 그것이 황토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구였기에 대표적인 공구가 되었다.

위 내용을 종합하면, 空은 도구로 판 동굴이라는 뜻이고, 동굴은 사람이 살거나 물건을 저장하기 위한 장소였다. 가까운 예로 지난 세기 마오쩌뚱(毛澤東) 등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1940년대의 延安시절엔 거의 모두 그곳의 토굴 속에 거처했었다. 지금도 중국의 섬서 지역에서는 동굴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집이든 창고든 사람이 살고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빈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空은 공간이라는 뜻과 함께 비다란 뜻이 생겼다. 그 뒤 비어있다란 뜻으로부터 하늘의 뜻이 생겨났고, 또 安世高(생몰연대 미상)와 지루가참(支婁迦讖, 생몰연대 미상), 쿠마라지바(Kumārajīva, 鸠摩罗什, 鳩摩羅什, 344~413)나 현장(玄奘, 602~664) 법사 등 고대 중국의 불교 경전 번역자들(즉 역경가들)이 산스크리트어의 Śūnyatā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모두에서 말했다시피 산스크리트어의 Śūnyatā는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게 없고(無常), 영원히 존재하는 고정된 자체나 본체가 없기(無我) 때문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으며,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즉 인연에 따라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다(緣起)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곧 생성, 지속과 소멸의 반복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이런 현상은 자연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충분히 있다! 물을 보라. 보이는 물은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수증기가 되어서 보이지 않다가도 다시 기온이 떨어지면 물이 된다. 그러다가 거기서 또 기온이 더 떨어지면 얼음이 된다. 얼음은 기온이 올라가면 물이 되고 그 물은 또 수증기가 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눈에 보이는 물을 없는 것 상태인 것으로 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상태의 물체로도 본 것이다. 그는 자연계 뿐만 아니라 인간사에도 이런 현상이나 일이 있다는 걸 설했다.

그런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현상을 동시에 나타내는 단어가 있을까? 중국어에는 없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유럽 언어들, 한국어, 일본어에도 없다. 이러한 모순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산스크리트의 Śūnyatā 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언어에도 없을 것이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있는데 없다거나, 없는데 있는 상태는 성립되지도 않거니와 그런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상태를 동시에 나타내는 말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중국인들이 생각해낸 말로 '眞空妙有'라는 말이 이에 가깝다고 하지만 이 단어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진짜 공은 묘하게 있다”는 이 말로는 Śūnyatā의 한쪽 상태인 없는 상황은 감지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 역경가들이 추상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말이 부족한 중국 한자로 이러한 Śūnyatā의 추상성을 구상화시켜서 표현하려다 보니까 이것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단어가 “비어 있다”는 뜻의 空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의 언어 생활에서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의미까지도 구상화시켜서 말하는 점인데 이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중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아주 적다”라는 추상의 의미를 “아홉 마리 소들 중의 한 터럭”이라는 뜻의 가시적인 형태의 九牛一毛라고 부르는 식이다. 또 다른 예로 “단도직입적”이라거나, “즉각 본질에 들어가다”라는 추상적인 상황도 중국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開門見山이라고 구상적으로 표현한다. 開門見山이란 “문을 열고 산을 본다”는 뜻이다. 중국어에는 이런 식의 사자성어는 물론이고 많은 단어들이 전부 구상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런 형식으로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格義해서 인도 초기 불교의 Śūnyatā를 비어있다라는 空자로 그 추상적 개념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사유 체계로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중국화된 불교를 불교학에서는 “格義佛敎”라고 부른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화엄경, 천수경 등등 한국인들이 2000년 가까이 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삼았던 경전들은 모두 중국인들이 번역한 한문경전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잘못 전해지고 오해가 생긴 것도 적지 않다. 바로 이 空자 역시 그 전형적인 한 예다. 우리가 석가모니가 설한 불교 교리의 원의에 비교적 가깝다는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로 쓰여 있는 원시경전을 직접 공부해야 하는 소이연인 것이다.

하루 빨리 한문경전에서 벗어나야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석가모니의 眞說에 직접 다가갈 수 있다. 불교학자나 불교학계의 분발을 바란다.

2025. 6. 17. 17:44.
북한산 淸勝齋에서
불교 공사상에 관해 질의한 아내에게 답을 해주기 위해 쓰다.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