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공지 및 정보 마당

在日本 韓國 曹渓宗 管長 暘峯堂 釋泰然 大宗師님 靈前에

雲靜, 仰天 2024. 5. 19. 06:26

在日本 韓國 曹渓宗 管長 暘峯堂 釋泰然 大宗師님 靈前에


아, 큰 스님 기어이 먼 길을 가셨군요! 늘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던 자애로운 그 容顔은 이제 영원히 뵐 수가 없네요.

38년 전, 처음 뵙고 인연이 돼 그때 큰스님께서 저희 한국에서 온 세 사람의 대학생들에게 손수 高麗寺 뒷산의 정자로 가는 산길을 내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제가 대만 유학 시절 오사까 普賢寺에서 뵜을 때도 스님께선 변함 없이 건안하셨죠. 그 뒤 스님께서 서울에 오실 때마다 자주 뵙다가 마지막으로 뵌 게 6년 전 오사까에서였습니다.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뵌 그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이렇게 유명을 달리 하시게 되다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서울에서 세속의 번삽한 일에 끄달리며 浮薄하게 살다보니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訃告를 접하게 되니 참으로 황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泰然 大宗師께서는 참으로 이 세상을 위해, 특히 일제시대 때 이국 일본땅에서 한을 품고 비명에 가셨거나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신 수많은 우리동포들의 혼백을 달래주시기 위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아무도 할 수 없는 뜻 깊은 불사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의지할 데 없는 재일 교포들이 마음을 붙이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부처님 같은 자애로움으로 헌신하신 삶을 사셨습니다. 그 큰 뜻은 만세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노심초사, 불철주야로 지으신 그 공로와 헌신은 한국과 일본이 없어지지 않는 한 길이 길이 빛날 것입니다.

가시는 걸음, 직접 조문을 해서 왕생극락하시도록 빌어 드려야 마땅함에도 불초한 몸 그렇게 해드리지 못해 또 한 번 죄스럽게 생각됩니다.

멀리서나마 이곳 한국에서 38년 전 스님께 삼배하고 산 길을 같이 낸 우리 세 사람은 모두 泰然 대종사님의 큰 덕을 다시 한 번 추념하면서 깊은 애도의 념과 함께 명복을 빌겠습니다. 태연 큰 스님, 모든 수고로움을 내려 놓으시고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南無阿弥陀佛 觀世音菩薩!

2024년 5월 19일
한상린, 변영환, 서상문 올림

재일본 한국 조계종 管長(한국의 종정에 해당) 泰然 大宗師님의 살아 계실 때 모습. 스님은 늘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보면 자비롭고 맑은 심성이 바로 느껴지는 선지식인 같았다.


暘峯堂 태연 대종사께서 행하신 일본에서의 포교 및 불사 행적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68년 2월 태연 스님은 한일불교친선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한일불교회 초청으로 서옹대종사를 한국측 단장으로 한 11명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행으로 가셨다. 교또 妙心寺에서 한일 친선 법회 일정을 마친 후 3월 중순경 토쿄로 가셔서 한국대사관과 한국민단 분들의 안내로 30여 명의 일행이 일본 후생성(현 한국정부의 보건복지부에 해당)을 방문하여 그곳 지하실에 보관된 2329구의 유골을 보시게 됐다. 안내인에게서 "이런 곳이라도 안치되어 있는 것이 다행으로, 일본 전국의 절이나 신사, 탄광 등에는 명부 정리조차 되지 않은 채 유골이 방치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후 작은 위령의 법회를 마친 후 아직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각지에 방치되어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대한민족희생자들의 유골을 모아 위령탑을 건립하고 공양할 것을 맹세하셨다.

그 후 스님은 오사까의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대한민국 민단 분들의 협력을 얻어 위령탑을 건립하고자 선교활동을 시작하셨다. 스님의 願力에 신자분들 수십 명이 모여 매월 1000엔으로 3일간 기도하는 普賢寺모임(普賢사会)을 발족시켜 1968년 5월 오사카 이꾸노구 이까이노(大阪生野区猪飼野)에 38평의 집을 빌려 '재일본 대한불교 조계종 달마사'(日本大韓仏教曹溪宗達磨寺)를 건립하셨다. 한국 조계종의 종지로 매일 참선을 중심으로 대중 포교 활동을 위해 화엄경 보현행원품 강의를 하시면서 매일 백팔예배 참회를 격려함으로써 종교법인 普溪院으로 설립되면서 포교 활동이 활성화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73년 8월 이꾸노구 이까이노(生野区猪飼野)에서 이꾸노구 카츠야마끼타(生野区勝山北) 5-12-39의 부지 126평의 가옥을 구입하셔서 그곳으로 옮겨 종교법인 조계종 총본산 '普賢寺'를 건립하셨다.

그간의 경위를 간략하게 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68년 2월  
한일불교 친선교류회로 일본측이 초청해서
서옹대종사가 한국측 단장이 되어 동행한 석태연 스님 최초로 来日

1968년 5월  
오사카시 이꾸노구 이까이노에 '달마사' 건립

1972년 7월  
종교법인 조계종 '보현원'으로 허가 받아서 발족

1973년 8월  
본원을 이꾸노구 가쯔야마끼타 5초메로 이전
종교법인 조계종 총본산 보현사로 명칭 변경하면서 서옹 대종사를 방장으로 추천

1975년 10월 
교또의 산중에 고려사 부지 6만평 확보

1999년 6월  
종교법인 조계종 총본산 고려사로 명칭 변경

고려사 경내의 수월관음보살상
태연 큰스님께서 일생을 바쳐서 지으신 6만 평에 달하는 高麗寺(京都府 相楽郡 南山城村 童仙房簀子橋 13) 전경
高麗寺 대웅전 법당 내부 장엄(사진 출처 : Soichro Koriyama 촬영)
오사까의 보현사, 1960년대 후반에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디신 태연 스님이 먼저 오사까에 세우신 보현사 전경. 1985년 7월 우리가 갔을 때 이곳에서 1주일 가까이 머물렀는데 2층 법당이 있는 주지스님 방에서 스님께 삼배를 드렸다. 그리고 스님께 여행경비를 보충도 할겸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데 일할 게 있느냐고 여쭸더니 즉석에서 고려사 뒷산 산길을 닥아보라고 하셨다. 그 다음날 스님께선 손수 우리를 차에 태워 오사까, 나라, 쿄또의 중간 깊은 산속에 지어진 고려사로 데리고 가셨다. 우리는 그 절에서 머물면서 3일 간 일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1인 당 일당 1만 엔씩 해서 총 9만 엔을 받았다.
보현사 법당에 모셔진 불상
보현사 법당 안의 연등들
1985년 7월 일본을 여행하면서 태연 스님과 인연이 된 세 사람(뒷줄 맨 오른쪽,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오사까에 오기 전 히로시마에 갔을 때 중앙공원에서 당시 일본정부가 추진하려던 외국인 지문날인제도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재일교포들과 함께 기념촬영
일본 국보 제1호 나라(奈良)의 法隆寺를 찾았을 때 수학여행 온 일본 소학교 학생들에게 안내자가 뭐라고 소개해주는가 싶어 같이 앉아서 듣고 있는 필자(앞줄 더벅머리의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