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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평화연구원 초청 강연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적 의의와 현재적 함의"

雲靜, 仰天 2012. 3. 31. 10:12

 

제주평화연구원 초청 강연 :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적 의의와 현재적 함의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중국근현대사)

 

목 차

 

1. 김일성, 스탈린, 毛澤東의 전쟁결정 과정

2. 국제정치적 의의Ⅰ: 전쟁억지력으로 작용한 미국의 존재

3. 국제정치적 의의Ⅱ: 동맹의 순기능과 역기능 공존

4. 국제정치적 의의Ⅲ: 외교적 대화와 신뢰의 중요성 확인

5. 현재적 함의Ⅰ: 한반도통일기회 무산요인으로서의 중국의 참전

6. 현재적 함의Ⅱ: ‘위장평화’와 ‘소망평화’의 위험성 교훈

7. 현재적 함의Ⅲ: ‘53년 체제’의 형성

8. 과제 : 전쟁기억의 회복과 국내외 쌍방향 평화체제 구축

 

 

내용 요지

 

1. 김일성, 스탈린, 毛澤東의 전쟁결정 과정

 

가. 김일성의 남침의지와 스탈린의 동의거부

 

○ 북한의 전쟁준비

-김일성은 일제패망 후 북한으로 들어온 직후부터 소련의 비호를 받아 북한의 최고 권력으로 수직 상승한 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을 擬似的 사회주의체제로 전환하면서 전쟁준비를 하기 시작했음→또한 남침전쟁에 필요한 무기 장비, 병력을 각기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전쟁을 치르려고 구상함에 따라 대략 1950년 1월 북한노동당 차원에서 남침을 결정했음. 그 이전부터 북한 단독으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김일성은 각기 소련과 중국과 교섭해 지원을 약속받음에 따라 대략 1949년 봄부터 가일층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음.

-1946년부터 전쟁 직전까지 소련은 지속적으로 무기 장비를 북한에 지원해 북한군의 무력을 증강시켰고, 전쟁발발 후에도 김일성의 지원요청에 응해 북한군이 필요한 무기 장비를 거의 모두 보충해줬음→지원은 무상이 아니었고, 직접 병력은 보내지 않았지만(중국군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한반도 상공으로 투입시킨 공군은 예외였음), 소련은 북한의 남침전쟁에 필수불가결한 무기 장비의 지원으로 한반도 적화전쟁의 후견인 역할을 했음.

-毛澤東은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개전 직후까지 도합 7차례에 걸쳐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3개 사단 최소 5만 명 이상의 한인병력을 북한에 제공해 북한군 남침의 주력이 됐음→환언하면, 중국은 북한의 남침전쟁발동에 동력이 됐음.

 

○ 스탈린의 전쟁동의 거부

-1949년 3월 초 김일성은 전격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한반도 적화를 위한 무력도발을 승낙해줄 것을 요청했음.

-스탈린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남침불가를 분명히 했음→첫째, 북한인민군의 군사력은 아직 속전속결로 남한군을 손쉽게 제압할 정도가 아니다. 둘째,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이 반드시 개입할 것이며, 셋째, 또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38도선 분할에 관한 협정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었음. 그는 이 세 가지 장애가 사라지는 환경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한 무력도발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음.

-그러나 스탈린의 동의거부는 남침전쟁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도발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었음→따라서 적절한 시기가 오면 전쟁발동은 가능하다는 의사였음→적절한 시기란 바로 중국이 공산화되면 모택동을 설득해 중국군을 한반도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국제정치적 환경변화를 의미했음.

-북한으로 귀환한 김일성은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지만 스탈린의 지시대로 때 를 기다려면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음.

 

나. 毛澤東의 방소와 스탈린의 동북아전략 조정

 

○ 동상이몽의 중소정상회담

-毛澤東은 국공내전이 마무리 돼 갈 즈음인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예정 보다 앞당겨 수립한 뒤 모스크바를 방문→표면적인 목적은 스탈린의 칠순을 축하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소련에게 경제, 군사지원을 요청함을 물론, 스탈린을 설득 혹은 압박해 구중소동맹을 폐기하고 새로운 중소동맹 조약을 체결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음.

-그러나 스탈린은 아시아의 신생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毛澤東을 자신의 영역 까지 불러들여 세계공산주의운동에서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지와 위상을 과시 하고자 한 심산으로 毛澤東의 방소를 수락했을 뿐임.

-따라서 스탈린은 새로운 중소동맹을 체결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중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소련의 기득권을 보장해주고 있던 이른바 얄타체제를 허물고 새로운 조약을 맺는 모험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임.

 

○ 중소동맹체결을 성사시키기 위한 毛澤東의 의지

-1949년 12월 16일 毛澤東은 10여명의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열차편으로 모 스크바에 도착→그로선 난생 처음의 해외여행이자 최초로 스탈린과 면식을 갖게 된 기회였으며, 동시에 신중소동맹을 성사시켜 1세기 이상 제국주의 식민지 약소국으로 전락한 치욕을 씻고, 명실상부한 독립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각오를 가지고 장도에 올랐던 것임.

-소련 고위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의중을 받들어 모스크바에 도착한 毛澤東 일행을 형식적으로는 환영했지만 처음부터 교묘하게 그를 무시했음→단지 원래 계획했던 방문일정만 소화하고, 여유가 있다면 소련 각종 공업 및 관광지를 시찰하고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었음.

-이에 毛澤東은 새로운 중소동맹을 체결하지 않으면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스탈린을 압박해 1950년 1월 초에 이르러 그의 승낙을 이끌어내는데 성공.

 

○ 스탈린의 동북아전략 조정과 조건부 동의

-毛澤東패기어린 압박에 밀려 새로운 중소동맹을 맺기로 마음을 고쳐먹자 때마침 재차 소련 재방문을 승낙해주기를 요청한 김일성의 의사를 접한 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스탈린은 동북아 전략을 가다듬은 뒤 먼저 당시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던 모택동에게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확실하게 승리로 끝낼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북한이 요청한 문제를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했음.

-스탈린이 조정한 새로운 동북아전략이란 毛澤東의 요청에 따라 중국의 여순, 대련항을 중국에 돌려주고,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한을 점령케 해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을, 그 동안 소련이 여순, 대련항에서 누려왔던 각종 기득권과 이 항구들이 지닌 군사전략지로서의 기능을 대신하게 만들겠다는 것으로 요약됨.

-毛澤東은 스탈린이 흡족해 만큼의 단정적 긍정은 아니더라도 부정적으로는 반응하지 않았고, 그 후 스탈린은 즉각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호출해 그에게 남침전쟁 발동을 동의해줬음→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毛澤東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는 조건부 동의였음.

다. 김일성의 전쟁구상과 毛澤東의 동의 : “동의할 바엔 실제 행동”으로

 

○ 좌절된 김일성의 전쟁구상

-김일성은 자신이 1950년 봄 소련을 방문하는 시기에 맞춰 자신의 심복인 김일을 북경으로 보내 남침전쟁에 대한 毛澤東의 의사를 타진함과 동시에 미구에 개시할 한반도적화 전쟁을 북베트남, 몽골, 일본공산단 등 아시아 공산주의국가 혹은 세력들을 규합해 자유진영에 대항하자고 요청했는데, 물론 그 역할을 毛澤東이 맡아달라는 것이었음.

-김일성의 구상은 바로 자유진영 vs 공산진영 간의 전쟁을 유도하는 것으로 서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판단됨→당시 이것이 실행될 경우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었음→그런데 毛澤東은 시기상조인데다 아시아 공산국가들의 호응도가 낮다는 이유로 반대했음.

-그러나 毛澤東은 북한이 단독으로 개전하고자 한 김일성의 남침전쟁계획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음→소련방문에서 귀국한 뒤인 1950년 5월 중순 극비리에 북경을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毛澤東은 처음에는 시급히 해결 해야 할 각종 국내문제와 대만‘해방’이 남아 있다는 이유를 들어 한반도전쟁 을 반대했지만 스탈린이 이미 동의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엔 태도를 바꿔 적극적으로 찬성했음.

 

○ 전쟁도발의 최종합의 : 毛澤東의 동의 의미

-毛澤東은 처음에 김일성에게 미군이 간섭해올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 개전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음→그러나 이미 스탈린이 동의함으로써 대세가 전쟁을 결행하는 것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毛澤東의 미군개입 경고는 김일성에게 단지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수준의 의미였을 뿐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의한 기왕의 결정을 뒤집을만한 계제는 되지 못했음→따라서 그는 김일 성이 속전속결로 미군이 한반도에 전개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지을 것을 요구한 셈임.

-毛澤東의 동의가 자발적이었든, 아니면 피동적이었든 간에 그와 김일성 간에 논의된 사실 자체는 모택동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이 전쟁의 사전공모에 연루돼 있었음을 실증함→“동의할 바엔 실제 행동”으로 지지하겠다는 적극적 입장으로 전환했음.

-자의였든, 타의였든 毛澤東의 동의는 스탈린이 毛澤東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전쟁을 무기한 연기하라고 지시해놓은 상황에서 결국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성사시켜준 조건이 된 셈임.

-스탈린은 표면적으로 毛澤東의 동의를 구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전쟁결정에 대한 최종 승인을 내리는 역할을 毛澤東에게 맡김으로써 김일성을 毛澤東에게 구속시킴과 동시에 毛澤東으로 하여금 전쟁도발에 대한 책임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떠안게 만든 것임.

 

○ 한반도 적화전략

-스탈린, 김일성의 속전속결 전략 vs 毛澤東의 장기전 전략

-스탈린, 김일성의 영토점령 전략 vs 毛澤東의 군사력파괴 전략

 

○ 전쟁지속 여부

-毛澤東과 김일성은 대규모 살상과 전쟁을 지속할 능력부재로 1951년에 들어온 뒤로는 줄곧 휴전을 원했음.

-그러나 스탈린은 휴전제의가 나왔을 때 초기엔 단호하게 반대했고, 나중에는 휴전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명하면서도 내심 가능하면 전쟁을 장기적으로 끌고 가려고 했음.  

 

2. 전쟁의 국제정치적 의의Ⅰ: 전쟁억지력으로 작용한 미국의 존재

 

가. 모호한 미국의 개입 가능성

 

○ 미국의 중국철수

-미국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손을 떼고 중국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 중국이 공산화 되도록 방치

-중국국민당의 반공 역할 한계

 

미국의 아시아 정책변경

-1947년 후반기부터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변경→즉 이 시기부터 일본을 재건하여 아시아의 반공방파제 역할을 맡기기로 함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적 중요성 저평가

-1950년 1월 미국은 ‘애치슨 선언’의 발표를 통해 한반도를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 선언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 한 근거→뒤집어 보면, 역설적으로 미국의 존재가 전쟁도발 결정을 일으킨 요인이 됐음.

 

 

애치슨 선언에서 제시된 애치슨라인. 위 지도에는 일본의 북단 홋카이도가 미국의 방어선 안에 있는 것으로 선이 그어져 있지만 실제 홋카이도는 애치슨라인의 바깥에 있었다.

 

나. 스탈린의 전쟁 유보 요인 : 전쟁도발 결정상의 인식차

 

○ 미국의 개입 여부에 대한 견해차

-남침조건을 논의하는 가운데 스탈린, 毛澤東과 김일성 3자 간엔 미군의 개입여부를 두고 일치되지 않았음.→바꿔 말하면, 미군의 개입은 남침전쟁을 추 동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짓는 주요 변수였음.

-스탈린과 毛澤東은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한데 반해 김일성은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음.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미국의 존재가 전쟁도발의 억지력으로 작용.

-그러나 1950년 1월의 ‘애치슨 선언’은 스탈린이 남침전쟁을 결정한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지만 그로 하여금 미국개입에 대한 판단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게 만든 요인이 됐음.

-따라서 스탈린은 전쟁을 승인하는 시점인 1950년 초에는 미군이 개입해도 그 대안으로 중국군의 투입을 상정해두고 있었고, 毛澤東은 끝까지 미군의 개입을 우려했고, 결국 그의 예측은 현실로 들어났음.

 

3. 전쟁의 국제정치적 의의Ⅱ: 동맹의 순기능과 역기능 공존

 

가. 북한, 소련, 중국의 상호동맹 혹은 ‘준동맹’의 역기능

 

○ 스탈린의 지지 및 지원

-김일성 오판의 근원으로서의 후원세력

 

○ 중소동맹 : 전쟁도발의 결정요인

-모택동이 1949년 12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1925년 8월 14일 장개석정부와 소련이 맺은 “중(화민국)소동맹”을 대신할 새로운 중소동맹을 맺자고 요구, 압박→스탈린은 처음엔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1949년 12월 말에서 1950년 1월초 사이 모택동의 요구를 수락하기로 결심 →그 결과 2월 12일에 중소동맹이 체결됨.

-신 중소동맹은 군사동맹으로서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임. 중소 양국이 다 른 제3국으로부터 군사적으로 공격을 받을 경우 양국은 공동으로 협의하고 지원하기로 약정돼 있음→이것은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군사개입하게 된 배 경 가운데 하나가 됐음.

 

○ 북중“혈맹”관계의 역사적 근원

-중국혁명을 도와준 한국인 공로(북한이 가로챔)

-김일성은 중공이 1946년 이후의 국공내전에서 직접 군사를 보내거나 혹은 군수, 의료, 병참 등의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았음→또 중공군이 중국관내에 서 동북으로 이동하는데 북한을 경유해 가도록 편의 제공

-북한정권 내 적지 않은 친중공계(연안파) 인물들이 포진

 

나. 한미동맹 순기능의 연원

 

○ 미국의 개입 : 인류보편 가치로서의 ‘평화’ 수호의지

 

○ 한미군의 연합작전 수행 : 한반도 적화방지의 역할

 

○ 반공과 평화추구의 공동의지 : 한미동맹체결의 출발점

-한국에게 동맹의 필요성을 절감케 만든 계기

-실제로 전쟁 이후 반세기 이상 북한의 남침전쟁 억제력으로 작용

 

 

한국전쟁은 2만 8500명의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사진출처 : AP통신)

 

4. 전쟁의 국제정치적 의의Ⅲ: 외교적 대화와 신뢰의 중요성 확인

 

가. 중미간 소통부재의 역사적 배경

 

○ 국공내전

-국공내전 전기간 동안 중공은 미국의 공정한 중재와 교류를 희망했고, 또 정권을 잡아 공산국가를 수립하더라도 미국과 외교관계를 가지기를 희망했음→그러나 미국은 시종일관 이 요구와 희망을 외면했음

 

○ 미국의 중국철수

-미국이 국공내전에서 손을 떼고 중국에서 빠져 나감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중국적화를 초래한 한 배경이 됐음→중공 수뇌부는 미국이 국공간의 중재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국민당에 우호적인 편파성을 보인 적대세력으로 간주했음.

-모택동, 주은래 등등의 중국수뇌부는 미국이 당장은 물러났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국민당을 지원하여 중국으로 들어올 것으로 예단했음→즉 한반도에 개입한 미국의 저의가 한반도 점령에 국한된 게 아니라 중국점령에 있다고 의심한 역사적 배경이 됐음

 

○ 중국공산당과의 대화채널 폐색

-미국은 중국철수 후 자국 내 ‘중국통’들을 행정부와 군부의 주요 직위에서 물러나게 했음→신 중국과의 대화 채널이 사라지게 결과를 초래.

 

나. 중미간 소통부재의 결과

 

○ 중국의 경고에 대한 미국의 무시

-1950년 9월 말 미국이 당초 전쟁방침을 바꿔 북진하기로 결정→같은 시기 이 결정과 군사적 징후에 대해 북경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강력하게 경고했음→즉 38도선 이북에 한국군만 북진시키면 묵과하겠지만 미군이 북진하면 절대 용납하지 않고 중국군을 파병할 것이라고 공표.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미군을 38도선 이남지역에 묶어 놓으려는 얕은 수작 혹은 “허세”, “허풍”으로 치부하고 무시→10월 7일 미군 북진 결행

 

○ 미국의 약속에 대한 중국의 불신

-북진을 결정한 미국행정부는 처음엔 중국공격을 금지했고, 맥아더도 평양- 원산 이북지역에는 미군을 올려 보내지 않고 한국군만 북진하도록 한다고 했음→그러나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맥아더는 이 북진한계선을 철폐하고 미군에게 북진계속을 명령→또 압록강에서 약 60㎞ 정도 떨어진 지역에는 접근하지 않도록 것까지 허물고 계속 진격하도록 했음→결국 중미간의 쌍방 불신의 증폭을 결과했음.

 

5. 전쟁의 현재적 함의Ⅰ: 한반도통일기회 무산요인으로서의 중국의 참전

 

가. 좌절된 한반도통일의 꿈과 전쟁의 성격변화

 

○ 무산된 한반도통일의 꿈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하순 대략 서부전선에서부터 정주-운산- 초산-희천-장진호-부전호-단천을 잇는 지역까지 육박해 북한전역의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음.

-그러나 10월 중순부터 극비리에 북한지역으로 전개한 중국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더 이상 북진을 할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퇴각해야 했음→심지어 1951년 1월에는 또 다시 서울을 적에게 내주게 됐고, 37도선까지 물러난 뒤로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서울과 38도선을 중심으로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벌여야 했는데, 이러한 상황반전은 모두 중국군의 불법 개입 때문이었음.

 

○ 국제전에서 중미의 한반도 패권전쟁으로

-북한정권은 애초부터 소련과 중국의 동의 및 지원을 받고 침략을 했음→그렇기 때문에 6.25전쟁 초기 북한군만 남진했다고 해서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음.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미군의 한반도 투입 후에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 수행의 주력이 한국군이나 북한군이 아니라 미군과 중국군이 됐다는 사실 임.

-전쟁수행과정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이 각기 유엔군과 중국군에 작전권을 이양했다는 점에서, 또한 종전 후 각기 후견국들과 맺은 군사동맹을 통해 한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미국 간에는 한반도를 둘 러싼 패권전쟁의 성격이 다소 존재함을 부인하지 못할 것임.

 

나. 중국군사개입의 동기 및 목적

 

○ 북한정권의 붕괴방지

-毛澤東 등의 중국수뇌부는 중국군의 참전목표를 1차적으로 북한정권의 붕 괴를 막는 것에 두었는데, 이것은 곧 자국의 안보를 보장하려면 그 국경 바깥쪽 藩屬國들의 안전을 지켜줘야 하고, 그렇지 못해 藩屬國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면 자국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중국 전래의 전략관인 “脣亡齒寒”적 관점에서 발상된 것임.

-북한도 중국지도부에게 중국 변방 바깥의 많은 울타리 국가들 가운데 동북 지역의 중요한 방어벽으로서 적의 공격을 완화시켜줄 완충국가로 인식돼 왔음.

-동시에 북한정권을 구제해준다면 자국의 국가안보가 보장 받게 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음.

 

○ 국가안보를 고려한 자구책의 선제발동―현지방어에서 전진공격방어로

-중국인의 국가안보 개념에 따라 중핵지대, 東北지역, 한반도 세 지역간의 지정적 관계를 보면 북한은 중국안보의 전초기지(outpost)이고, 東北은 전진 기지(advanced base)에 속하며, 관내 중핵지역은 東北을 지원하는 후방 지 원기지(supporting base)인 셈인데, 이러한 지정적 상호관계는 한반도에 전 쟁이 발생할 경우 북한이 중국 東北의 전진기지가 되고, 東北지역은 후방지 원기지에 속함.

-중국지도부는 중국의 한반도 무력개입을 자위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인식했고, 미국이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진을 감행한 것은 실제 毛澤東으로 하여금 ‘국가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케 만들었다는 것임.

-중공 정권의 안위와 생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들 때문에 중국 국내에 앉아서 “적”을 기다리기 보다는 국외의 전장으로 들어가 과감하게 미군과 한국군을 공격하는 “적극적 방어” 전략을 구사하게 만들었음.

 

○ 국내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국외전장화

-신 중국은 정권출범 초기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었음. 즉 1) 스탈린으로부터 약속받은 이권환수와 외국과의 평등한 외 교관계 수립을 통한 국가의 진정한 독립쟁취, 2) 대륙 도처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국민당의 잔류부대, 특무와 토비들의 섬멸을 통한 국내정 치의 안정, 3) 臺灣과 티벳에 대한 공략을 통한 국가 정치적 통일의 완성, 4) 피폐된 경제를 전전 수준으로 회복시켜 국가재정의 안정 및 민생안정의 도모, 5) 토지개혁의 추진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 구축 등.

-중국수뇌부는 이러한 국가적 과제들은 중공의 일당독재의 공고화, 나아가 공산국가로서의 중국의 국가안보에 직결된다고 봤음.

-毛澤東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도달하기 전에 먼저 전진방어 지역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의 북진행로의 목진지 매복을 통해 적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 호할 수 있는 개념을 가리키는 글라시스(glacis)를 확보하고자 했음.

-원래 국경으로 쓰이는 산이나 산맥의 정상 바로 너머에 자국 방어를 위해 확보해놓은 땅을 가리키는 글라시스의 확보는 한 국가가 외침에 직면했을 때 국경 안쪽에서 방어전을 치를 경우 자칫하면 쉽게 국경돌파를 당할 수 있으므로 국경너머 어느 정도의 폭을 지닌 땅을 확보해 그곳에서 방어전을 치르면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호(double projection)할 수 있기 때문임.

 

○ 중화주의적 報恩관념, 대국의식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결합

-새로운 정권을 거머쥔 중공지도자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1920년대의 북벌, 3~40년대 중반까지의 항일운동, 40년대 중반 이후의 국공투쟁에 참여한 사실에 대해 대국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관념이 존재했음.

-더욱이 중공은 공산혁명 과정에서 북한정권으로부터 각종 편의를 제공받은 사실에 대해 기회가 되면 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음.

-여기에다 중국지도자들에게는 북한이 공산주의이념을 지향하는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입각해 약소국 공산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혼재해 있었음.

다. 毛澤東의 得과 失 :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는가?

 

○ 得

-毛澤東의 당내 권력공고화 및 당외 위상제고

-파병개입 결정의 정당성 확인

抗美勝戰의 정치도구화―毛澤東의 정치적 자산

-미국에 대한 평가의 변화와 毛澤東 민족주의의 강화

친미주의자의 몰락(배척)과 반미사상의 주입

반미풍조의 전국화와 毛澤東 숭배의 가속화

사회주의적 국민통합의 기회로 활용

-黨內整風에서 黨外整風운동으로의 확대

-정적제압의 기반확립(高崗, 饒漱石, 王明 축출)

-山頭主義의 소멸과 毛澤東체제의 강화

-중국군사 현대화의 계기

-사회주의 과도기 체제의 확립 계기

-북한정권의 붕괴 방지와 동북지역에서의 藩屬확보

-북한에 대한 영향력 확대

-티베트 ‘해방’성공과 서북지역 변경안전의 확보

-지역 강대국으로 부상한 계기

 

○ 失

-대만‘해방’의 기회상실과 2개 중국시대의 개막

-해협양안 대립의 고착화와 미국의 대만문제 개입 계기

-미국의 중국봉쇄로 인한 중국의 대일, 대미수교 기회의 상실

-대소 종속심화의 계기와 중소분열의 기원

-장기 피봉쇄 및 대외교류의 단절로 인한 우민화와 정치발전의 장애

 

6. 전쟁의 현재적 함의Ⅱ: ‘위장평화’와 ‘소망평화’의 위험성 교훈

 

가. 위장평화의 근원-스탈린의 38도선 분단상태 지속 지시

 

○ 스탈린의 얄타체제 고수

-1945년 2월의 얄타조약은 소련의 국익, 특히 동아시아와 중국에서의 소련의 국익을 보장→일본북방 영토 점령승인, 1945년 8월 중순의 중소동맹으로 중국서부와 동북지역에서의 이권을 챙기게 됨→예컨대 중동철도 경영권 획득, 여순, 대련항의 사용권 획득 등등.

-스탈린은 이러한 “얄타체제”를 허물지 않으려고 노력.

 

○ 전쟁 전 스탈린에 의한 38도선 지속

-1949년 3월 김일성 방소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38도선 허물지 말 것을 지시→김일성은 이 지시에 불만을 품었지만 한동안 지시를 따랐음.

-그러나 1949년 여름~가을 사이 김일성은 한반도 38도선에서 국지적 도발을 시도하고, 이를 기회로 전쟁을 전면적으로 확대하려고 계획.

-1949년 여름~가을 간 스탈린은 또 한 번 김일성에게 38도선 분단상태를 지속하라고 두 차례 경고함에 따라 김일성의 계획은 무산됐고, “위장평화”가 지속됨.

 

○ 김일성의 위장 평화공세

-또한 1949년 3월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에게 38도선의 평화상태의 현상유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를 평화적으로 통일하라고 지시→남한의 이승만은 이를 일축했음.

-김일성은 남침전쟁 도발 직전인 1950년 6월 중순 남한에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위장평화”공세를 했음→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전쟁발동의 명분으로 삼으려고 한 명분 쌓기였음.

 

나. “소망평화”의 위험성

 

○ 해방공간에서의 민주주의 도입기, 실험기 남한정치의 혼란상

-정파 간의 극도의 파쟁성, 사회혼란→빨치산에게 후방교란과 사회치안부재의 공간을 제공한 요인이 됐음.

-대북 정치의 창구 단일화 실패→대북 대응력 약화.

 

○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의지와 구호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일 수도 있는 “북진통일”을 줄기차게 주장→방어용 군사지원에 국한해왔던 미국의 반발과 불신초래.

-결과적으로 미국 군사지원의 장애를 초래했고, 이것은 북한의 군사공격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군사력도 갖추지 못하게 된 요인이 됐음→반면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무기 장비를 지원 받아 꾸준히 전투력을 제고했음→남북한 군사 력 불균형요인으로서의 소련, 중국의 대북 군사지원→전쟁도발 결정요인으로서의 남북한 군사적 불균형 초래.

 

7. 전쟁의 현재적 함의Ⅲ: ‘53년 체제’의 형성

 

가. 현 남북관계, 북미관계 경색의 시발점으로서의 휴전체제

 

○ 국제법적 취약요인 : 전쟁당사자인 한국이 배제된 휴전협정

-휴전협정은 유엔군 대표를 일방으로 하고, 중국 및 북한대표를 다른 일방으로 하여 체결된 것으로서 전쟁당사자인 한국군이 제외돼 있는 문제가 있음.

-이 휴전협정은 지금까지도 변한 게 없고, 남북 및 북미 간의 대화를 어렵게 만든 주요인이었음.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상태를 종식하기 위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경우 수반되는 여러 문제들(예컨대 북한을 일방으로 한 평화협상 체결시 국제법상 북한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평화조약이 체결됐지만 유엔군사령부의 해체 및 유엔군의 철수로 인해 남북한간에 완전 한 평화가 정착되기 전 과도기적으로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국가들을 국제평화감시단으로 구성할 것인가 등)에서 소외되기 십상일 것으로 보임.

 

○ 전쟁의 유산 1 : 적대의식과 상호불신의 심화

-김일성정권에게 반외세, 반제, 반미를 실질적 내용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내부 통합을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동원할 수 있도록 만듦→북한체제우위 선전의 원형질로 작용.

-남한은 반공을 국시로 삼은 결과 오랫동안 대북 인식 및 정책에서 자기 박제화의 요인이 됐음.

 

○ 전쟁의 유산 2 : ‘53년 체제’의 형성

-민족분단의 고착화→1948년의 분단이 유동적이고 한시적인 것이었음에 비해 1953년의 분단은 항시적이자 현재 진행형인 것이었음.

-남북한 모두 정권 수준에서는 불안하고 유동적이고, 격동이 있었지만, 국가 수준에서는 대단히 안정적인 상황이 지속돼 왔음.

 

○ 전쟁의 역설 : 전후 한국발전의 추동력

-전쟁이 역설적이게도 사회발전에 이바지 한 측면이 존재함→전쟁 자체는 동족상잔의 행위가 상징하듯이 대단히 파괴적이고, 반민족적이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한 간에 정권 안위 수준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낳았음.

-그것이 상대 체제를 압도하기 위한 자주국방, 경제건설의 열기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분단질서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한 역설이 존재함.

 

나. 동아시아 국제관계 재편의 계기

 

○ 북방3각“동맹” 및 남방3각“동맹”(편의적 개념임)체제의 형성

-북방3각“동맹”체제의 형성

① 중소관계의 밀착과 중국의 “全般蘇聯化”심화→중국은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전략상 ‘全盤蘇化’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됐음.

② 중국 및 소련의 대북한 영향력 관계의 변화→소련의 대북한 영향력은 약화된 반면, 중공의 그것은 증대됐음.

③ 중북관계 변화의 기폭제 : 전우에서 혈맹관계로→전후 중국의 북한복구 지원과 중북동맹체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1961년 7월 11일)

-남방3각“동맹”체제의 형성

①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에 큰 변화(군사력 증강 계기, 대소 및 대중 군사적 우위추구 등)를 가져다 줬고, 게다가 당시 유럽중심으로 진행중이던 냉 전체제가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로 확산되고 격화되는 계기가 됨.

② 한미동맹체결의 계기→미국은 북한정권의 붕괴와 한반도 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한국정부의 존속은 실현시켰음.

③ 일본부흥의 발판과 미일동맹의 배경→일본은 경제적인 면에서 이른바 “전쟁특수”로 무기, 군수품의 제조, 수리가 확대되어 군수산업이 발달, 경제성장의 초석이 됐으며, 미일군사동맹관계가 더욱 밀착되게 된 계기 로 작용.

-미중 적대관계의 시발점

① 미국 : 미국공화당 집권의 배경이 됨과 동시에 중국봉쇄의 가속요인→ 전쟁의 파장으로 미국은 휴전을 공약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 됨으로써 공화당이 집권하게 됐음.

② 중국 : 미국 제1주적화의 장기 지속→중국에게 제1적국이었던 소련 대신 미국이 제1적국의 위치로 자리바꿈 하게 됐음→미국도 소련 이외에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했음. 중국과 30년 가까이 적대적 관계로 대치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을 손상시켰음→중미대화 및 수교의 기회 상실로 이어졌고, 이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된 배경이 됐음.

-한중관계의 장기 단절의 계기

① 해방 후 중공 고위 지도자들과 재중국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 이어져 왔었던 교분이 전쟁으로 인해 끊어졌음.

②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념의 상이를 초월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중 지도자들 간의 왕래는 아니더라도 중한 민간레벨 차원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있었음→그러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가능성이 차단됨으로써 중일간에 존재했던 민간 차원의 내왕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음→중한 쌍방의 오랜 문화적 교류마저 단절되게 된 결과를 낳았음.

다. 국내외적인 양방향에서의 전쟁책임론 규명과 기억의 증발

 

○ 전쟁도발을 주도한 자는 누구였는가?

-“고개 숙인 수정주의” : 전쟁발발 원인 논쟁의 종식

-북한 내부 수준에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공동으로 전쟁을 결정했음.

-김일성, 스탈린, 毛澤東 3자의 共業과 分業

 

○ 전쟁기억의 오도와 전쟁의미의 퇴색

-과거 남한에서든, 북한에서든 정권차원에서 전쟁에 대한 실상을 드러내지 않고 저마다 “침략”과 “피침략”을 체제경쟁에 이용하다보니 사실은 은폐되고 허구가 사실인양 횡행된 시기가 있었음.

-북한에서는 이 현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남한에서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사라졌지만, 전쟁발발 자체마저 망각하는 현상이 보임.

 

○ 한반도 통일의지와 민족재통합의 당위성 퇴색

 

8. 전쟁기억의 회복과 국내외 쌍방향 평화체제 구축의 과제

 

가. 전쟁을 왜 기억해야 하는가?

 

○ 전쟁의 참혹성 경험한 한민족

-500만 명 이상의 인명살상

-사회시설, 국가개산 파괴

-전쟁 경험 세대가 거의 사망→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인구의 대다수

 

○ 평화의 중요성 절감

-참혹한 민족상장의 전쟁을 통해 평화의 절실함과 소중함을 체험

-전쟁이 종료된 게 아니고 ‘휴전’상태

 

나. 전쟁의 기억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 전쟁기억 회복방안 모색

-남침 실상에 대한 정확한 연구

-국민에 대한 지속적 교육 및 홍보→안보 불감증 방지

-군 정신강화시 체계적, 상시적 교육→정신무장 강화

 

다. 국내외 쌍방향 평화체제 구축의 과제

 

○ 휴전에 의한 일시적 평화의 유지에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으로

-평화란 일방적인 ‘소망’, ‘희망’ 혹은 기원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쟁을 통해 체험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정치불순, 안보불감증, 국방매너리즘 등) 제거

 

○ 한미동맹의 지속적 관리

 

○ 대중국관계의 새로운 모색

-중국의 한반도관 내지 인식을 정확히 인식

-북중관계의 특수성 연구, 이해 심화, 확대→군사, 안보, 외교정책에 반영.

 

위 내용은 2010.4.2 금. 15:00~17:00, 제주 평화연구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 보완한 글이며, 영문으로 번역돼 외교통상부가 발행하는 영문저널인 Korea Focus, August 2010에 "International Significance of the Korean War and Implications for the Present"라는 제목으로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