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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기행 : 杜牧의 題烏江亭

雲靜, 仰天 2017. 11. 24. 09:09

古典 紀行 : 杜牧의 題烏江亭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당나라 시인 杜牧의 칠언절구 한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절제된 감정으로 가을산행을 노래한 먼저 번의 ‘山行’과 달리 이번에는 리더가 되려는 자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題烏江亭’이라는 시다.

 

최근 지역 환경을 황폐화 시킨 기업에게서 거액을 받아 갈취한 사악한 무리들을 규탄하기 위한 공청회를 치르면서 갈취한 비리를 알면서도 눈 감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사안일, 복지부동 자세를 취하는 P지방 공무원들의 행태를 보곤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던 중 이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題烏江亭
 
杜牧(803~852?)
 
勝敗兵家事不期(승패병가사불기)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烏江亭에 부쳐
 
승패는 兵家에게 늘 있는 일이라 예측할 수 없다네.
수치를 안고 모욕을 참아내야만 참남아이느니라.
江東子弟들엔 뛰어난 준재가 많았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재기가 가능했을지 알 수 없지 않는가?
 
이 시는 두목이 楚覇王 項羽(B.C. 232~202)가 죽은 지 1,0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安徽성 북쪽에서 양자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烏江에 이르러 그 옛날 垓下城(현 안휘성 소재) 전투에서 漢王 劉邦에게 패한 항우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초한전의 전체 윤곽을 알려주는 전투 요도
항우의 전략을 알 수 있는 요도
근래 2013년에 새로 놓은 것으로 보이는 표지석. 위 사진에 나와 있는 곳과 동일한 지역인지는 필자가 아직 답사해보지 않아서 확언할 순 없다.

 

이 시에는 항우의 이름이 없다. 그럼에도 일세의 풍운아 항우를 읊은 시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구문은 극히 평이하지만, 주인공 항우의 이름이 없어 자구대로만 보면 당시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겐 이해가 쉽지 않다. 우선 구문을 뜯어본 뒤에 지은이의 작시 의도나 詩情을 가늠해보자.
 
起에 해당하는 첫 구에서 지은이는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장수에겐 늘 있는 일임을 환기시킨다. 勝에 해당하는 둘째 구는 항우의 도량이 넓지 않고 대장부 기질이 결여돼 있음을 문제시 했다. 내용 전환이 필요한 轉에서 강동 항우의 휘하엔 인재가 많았다고 하면서 결론 격인 結에 가서는 항우가 만약 江東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정비하고 다시 출진의 깃발을 올렸더라면 어찌 됐을까 하고 매듭을 짓는다.
 
권토중래란 자구대로 옮기면 “흙먼지를 날리며 다시 온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딛고 재기하는 뜻을 지닌 고사성어인데, 두목이 이 시에서 처음 쓴 말이다.
 
오강은 항우가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자기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두목은 오강의 客舍에서 오강을 바라보니 항우가 격앙해 제분을 참지 못해 강에 뛰어들어 자결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연민을 품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항우가 이곳으로까지 패주해오게 된 것은 자신의 운명과 나라의 흥망을 건 건곤일척 한판 승부였던 해하성 전투에서 한나라 군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항우가 오강 중에 뛰어든 곳으로 알려져 있는 지점이다. 안휘성 馬鞍山시 和縣 烏江鎭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항우는 밤중에 한나라 군졸들이 부른 四面楚歌를 듣고선 초나라 전역이 점령당한 것으로 오인한 나머지 가장 총애한 애첩 우미인(虞美人)과 눈물로 헤어진 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던 중 이곳 烏江에 이르렀다.
 
烏江亭(亭은 국경지역에 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縣 아래의 작은 지방행정 단위)을 지키는 亭長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항우에게 배로 오강을 건너 자신의 본거지인 江東으로 가서 훗날을 기약할 것을 진언했다. 강동은 비록 땅은 작지만, 사방 천리나 되고 사람도 수십만이나 되는데다 강을 건널 배는 자신의 배 밖에 없으니 한나라군이 추격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정장이 항우에게 강동으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라고 진언한 곳이라고 한다. 오늘날은 그 고사를 기념해 정자가 지어져 있다. 그런데 안휘성의 이곳 일대는 곳곳에 '烏江亭'이거나 여타 이와 비슷한 이름을 붙인 정자가 많이 지어져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자기 지역에 관광객을 많이 오게 하려는 의도에서 지방정부가 서로 경쟁적으로 짓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항우는 이 진언을 듣지 않았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는데 내가 강을 건너 무엇을 하겠는가?”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여 子弟들과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서 부형들을 대할 것인가?”(我何面目渡見之)라며 휘하 수많은 장수와 병사들의 전사를 슬퍼했다. 그러고는 항우는 자신의 애마 추를 정장에게 건네주고선 추격해온 한나라 기병들과 싸웠다. 결국 중과부적이 돼 추격을 따돌릴 수 없었고, 항우는 패배의 수치를 참지 못해 그만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파란만장한 31년의 짧은 생애였다.

 
 

자신의 검으로 목을 베어 자결하는 항우의 최후(사진 속은 중국에서 상영된 영화의 한 장면)

   

위 시에는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장수가 훗날을 도모하려고 하지도 않고 너무 이른 나이에 자결한 항우의 죽음을 애석해 한 두목의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두목이 특히 애석히 여긴 부분은 패배는 병가에게 늘 있는 일임에도 일시적인 패배를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강동의 부형’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았더라면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도 없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자결해버린 사실이다.
 
두목이 애석해 한 것은 객수의 시인이 가질 수 있는 단순한 감상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우는 성격이 단순하고 과격하긴 했어도 애첩과 이별할 때 스스로 읊었듯이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을(力拔山兮 氣蓋世) 정도로 완력 면에선 대단한 장수였다는 사실이 전제돼 있는 평가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시를 통해 두목이 말하고자 한 것들 중엔 항우가 유방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유가 행간에 숨어 있다. 초한전의 전쟁승패가 왜 갈렸는가 하는 점은 곧 항우에 대한 인물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항우가 자결하기까지 막다른 상황으로 몰리게 된 이유는 그가 끈질긴 승부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귀가 얇아서 자기절제와 평정심이 부족하고, 기회를 살리는데 능하지 못한데다 아랫사람들의 건의도 잘 듣지 않았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국의 군주로서 천하를 두고 자웅을 겨루고자 한 자가 인재를 얻지 못했다면 결국 용인술이 좋지 못해 劉邦에게 패했던 게 아닌가 한다. 인재를 얻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는 범증을 잃은 것 이외에도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王安石이 “강동의 자제는 항우를 위해 권토중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 평가도 있다. 이 말대로 과연 강동의 부형들이 항우를 위해 일어나지 않았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왕안석의 이 얘기는 곰곰이 되짚어볼 가치가 없지 않다.
 
두목이 평한 대로 항우가 정말 뒷날을 도모하지 않고 자진했을 정도로 인내심이 부족했다면 천하를 거머쥐려고 한 장수로서는 자질이 부족한 게 맞다. 두목의 이 평가는 당시 陳平(B.C.?~B.C. 178)이라는 자가 남긴 항우에 대한 인물평과 일치한다. 어쩌면 두목은 陳平의 평가에 근거해 내린 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陳平은 劉邦의 중요한 책사로 유방을 도와 楚漢戰에서 항우를 패퇴시켜 漢나라를 창업케 한 개국공신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우는 인색하고 의심도 많다. 항우의 신하 중에서 진짜 충성스러운 사람은 范增, 龍且, 鍾離昧, 周殷 등 몇 사람 밖에 없다. 잘만 하면 내부에서 서로 죽이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진평은 유방이 河南성의 滎陽(형양)현을 사수하고 있었을 때, 유방에게 황금 수 만 냥으로 항우의 군신들을 이간시키자고 건의했고, 항우는 이 말을 전해준 범증이 적과 내통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선 그만 막하 최고의 책사인 범증을 내쳤다. 이로 인해 범증은 홧병으로 병사했고, 항우는 범증을 내친 뒤로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항우가 “인색하고 의심도 많다”는 부분은 司馬遷의 史記「高祖本紀」에서도 기록된 게 있다. 한왕조를 개국한 뒤 고조가 된 유방이 도읍한 雒陽의 南宮에서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제후들과 장수들은 짐을 속이지 말고 모두 마음을 이야기해보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또 항씨(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高起와 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고,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폐하는 사람을 부려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그것을 나누어 주어 천하와 利를 함께 합니다. 항우는 현명한 자를 시기하고 유능한 자를 질투하여 공을 세운 자에게는 해하고, 현명한 자에게는 의심합니다. 싸워서 승리해도 그 사람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땅을 얻어도 사람들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답을 듣고선 고조가 말했다.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 리 밖에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나는 자방(子房, 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독거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되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蕭何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몰아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적지를) 취하는 것이라면 내가 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들이다.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 쓰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公知其一, 未知其二. 夫運籌策帷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鎭國家, 撫百姓, 給餽饟, 不絶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軍,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爲我擒也.)
 
사마천은 또 같은 史記에서 항우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만 앞세웠을 뿐 지난 일을 교훈으로 삼지 않았다”(自矜攻伐, 奮其私智而不師古)라고 썼다. 즉 자신에 대한 과신이 넘쳐 지난 날 역사의 교훈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패왕의 업을 이루고도 힘으로 천하를 경영하려다가 5년 만에 초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죽으면서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줄 몰랐으니 그게 잘못이었다고 평가했다. 즉 항우가 전투에서 패한 것에 대해 자신을 망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지 결코 자신이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라고 했으니(天亡我, 非用兵之罪也) “어찌 잘못이 아니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러한 예증들을 접하면, 나 역시 항우는 자신의 역강한 힘만 믿었지 지혜롭거나 슬기로운 智將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적으로 항우가 漢나라 병사들이 부르는 초나라 노래를 듣고는 한나라 군대가 초나라 땅을 전부 다 점령한 것으로 착각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처럼 전형적이고도 기본적인 심리전에 대해서조차 오판한 사실도 지장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항우는 우미인과 이별한 뒤 애오라지 100여기에 불과한 패잔병들을 이끌고 달아나니 楚군이 대패했던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항우가 이런 상황에 처해 亭長의 진언을 일언지하에 무시한 게 사실이라면 달리 다른 증거를 찾아 볼 일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한나라 군대가 항우를 추격함과 동시에 초나라 군사 8만 명의 목을 베니 마침내 초나라는 재기의 기회가 사라진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항우의 자살에 대해서는 평가가 상반될 수도 있다. 8,000명이나 되는 부하 장수들을 불귀의 객으로 보낸 마당에 비굴하게 자기 혼자 살아남아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진한 것이 오히려 영웅다운 기개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가하면 한 때는 처참하고 비굴하게 느껴지더라도 죽은 부하들의 원혼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하는 게 옳았지 않았을까? 깨끗하게 자결하는 것과 구차하지만 훗날을 도모하는 것 둘 중에 나는 모든 경우에 어느 한 쪽이 반드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항우의 경우엔 강동으로 갔더라면 재기할 가능성이 있었던 점에서 그가 후자를 취했어야 하는 게 옳다고 본다.
 
나의 이러한 판단은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도 똑 같이 한 바 있다. 마오는 항우를 이렇게 평했다. 항우가 영웅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살한 것은 비굴하게 살았던 국민당 친일파 거두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와 중공 초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장정시 자신과 군사노선을 두고 대립한 바 있고 나중엔 국민당으로 전향한 장궈타오(張國燾, 1989~1979) 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하지만 항우가 자살하기보다 江東으로 가서 다시 8,000명을 불러 모아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렇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마오는 역사의 교훈으로 “항우의 영웅적 기개와 절개를 배워야 하지만, 자살은 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要學項羽的英雄氣節, 但不自殺, 要幹到底)고 강조했다.
 
너무 성격이 강한 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 모르고 참을성이 부족해 대사를 그르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항우에게서 찾을 수 있다. 採根譚에서는 이를 경계한 경구가 있다. 즉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하지만, 마음이 유순하고 기가 평온한 사람에겐 백 가지 복이 저절로 모여든다.”(性燥心粗者, 一事無成, 心和氣平者, 百福自集)는 말이다. 항우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세상일이란 게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자신이 바라고자 하는 것을 아무리 애쓰고 노력을 해도 이뤄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때론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생각지도 않게 남이 이뤄줄 경우도 없지 않다. 자신이 손을 대지 않아도 남이 대신 코를 풀어줄 때도 있잖은가 말이다.
 
봄날의 버들가지마냥 바람 부는 대로 낭창낭창 휘감길 거까지는 없겠지만 무릇 리더라면 수치, 오욕과 모욕을 참고, 분루를 삼키며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靜觀과 어떤 경우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마음공부다.
 
2017. 11. 11. 18:35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

위 졸고는 2018년 7월 11일자
World Korean신문에 게재된 것입니다.

https://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