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지도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을까? :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최후
서상문(고려대학교 연구교수)
국가지도자는 위국, 위민, 애민정신을 본령으로 한 리더십을 갖춰야 됨은 물론이거니와 도덕적으로도 국민의 귀감이 돼야 한다. 또 평소 살아생전에 쏟아낸 수많은 말들이 행동과 일치하는 삶을 살다가는 게 참다운 지도자다. 그럴려면 죽음을 초탈한 모습으로 의연하게 세상을 고할 수 있는 품성을 타고나야 한다.
언행의 진정성은 죽음에 직면한 시점에 가감 없이 드러난다. 죽음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순신,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모두 그랬다. 누군들 죽고 싶어 하겠는가만 그들은 모두 형언불가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의연하게 애국애족, 위민과 인류평화의 메시지를 남기고 최후를 맞았다.
현대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죽음에 직면해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태어난 해는 달랐지만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
1976년 9월 7일 서거 이틀 전,혼수상태에 있던 마오쩌둥은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는 회광반조(廻光返照)였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병수발을 들고 있는 근무자가 자신의 의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 다급한 모습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손으로 자신이 누운 나무침대 가장자리를 세 번 두드렸다. 세 번, 즉 ‘三’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제서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아차린 근무자가 물었다. “주석님,일본의 싼무(三木) 소식을 듣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무자는 바로『三木武夫』책을 마오에게 건넸지만, 기력이 없던 마오는 가까스로 책을 집어 들고 몇 분 정도 보더니 이내 또 다시 혼절상태에 빠졌다.
마오쩌둥은 싼무라는 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려는 듯했다. 그가 알고자 한 싼무, 즉 ‘三木’은 일본 수상 미끼 다께오(三木 武夫, 1907~1988)였다. 당시는 중일평화우호조약 문제로 일본과 교섭을 해오던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연이은 하야가 어렵사리 성사된 중일평화우호 조약체결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까봐 염려했다.
미끼는 일본의 자유민주당 총재에서 다나까 가꾸에이(田中 角榮, 1918~1993) 수상의 뒤를 이어 1974년 12월 수상직에 올랐다가 2년 뒤 부패문제로 물러난 일본정계의 거물이었다. 미끼 수상은 1976년 7월 27일 다나카 전 수상이 체포된 록히드(Lockheed)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려 하였다.
다나카는 1974년 미국 군수업체인 록히드사로부터 6억 엔의 금품을 받은 독직사건으로 실각했지만, 중일 국교정상화를 이끈 거물이었다. 이에 당내 보수파 세력 및 다나카 옹호파가 미끼를 수상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자민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마오쩌둥이 미끼 수상 관련 소식을 듣고 싶어 한 이때는 미끼가 수상직 사퇴를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결국 미끼 내각은 같은 해 12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공인후보만으로 과반수 이하 패배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명분으로 12월 24일 총사직하였다. 1978년 8월 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은 미끼 수상에 이어 수상으로 취임한 후쿠다 타께오(福田赳夫, 1905~1995)의 재임 때였다.
마오는 만년에 이처럼 변화무쌍한 일본 내 정세변화에 줄곧 눈을 떼지 않았다. 마오는 임종이 임박해서도 국가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틀 뒤 9월 9일 새벽 0시 10분, 마오쩌둥의 숨이 멎었다. 향년 83세였다. 불같은 열정과 카리스마로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 일세를 풍미한 현대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그렇게 최후를 마쳤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지도자인 저우언라이 총리는 지금도 중국 민초들의 존경과 숭앙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그가 타계했을 때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몰려온 조문객들의 줄이 10리나 됐을 정도였다. 저우언라이는 일생 동안 일벌레였다.
중공 당 서열 1위로서 중공 총서기이자 국가주석 그리고 당 서열 2위인 국무원 총리가 각기 외치와 내치를 나눠서 맡고 있는 오늘날과 달리 마오쩌둥 집권 시절에는 당 서열 3위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외교와 내정은 물론, 때로는 막후에서 전쟁과 군사까지 관장했다.
저우언라이는 왕성한 의욕과 체력으로 마오쩌둥에게 묵묵히 정책을 보고하거나 지시사항을 일일이 챙기는 등 세심하게 일을 수행했다. 마오는 젊은 시절 한 때 저우언라이의 아래에 있던 적도 있었지만 저우는 단 한 번도 마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았고, 정책 면에서도 반대의견을 내기는 해도 그것을 끝까지 관철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이 암 발병의 원인이었을까? 저우는 암 발생 후 초기에는 표시를 내지 않고 묵묵히 통증을 견디면서 국사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다시 병이 재발했을 때는 이미 암이 상당히 진전돼 마지막 단계의 위독한 상태였다.
마오쩌둥과 여타 지도자급 인물들이 반강제로 저우언라이를 병원에 밀어 넣었다. 저우언라이는 떠밀려 병원에 들어갔지만 입원 중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병상에서도 산더미 같이 쌓인 일들을 처리했다.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한 번도 통증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오직 자신이 버텨내지 못하면 중공과 중국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했다.
1975년 9월 하순부터 병이 더 위독해지기 시작한 저우언라이는 결국 병상을 떠날 수 없게 됐다. 병상 중의 어느 날,저우언라이는 혼수상태에서 느릿하게 의식이 돌아오자 침상 머리맡에서 걱정스럽고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를 봤다. 그리고 입술이 힘겹게 몇 번 어물거리더니 천천히 몇 마디 했다. “나는…돌보지 않아도 되니… 다른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봐주시오. 나 보다는… 그들이 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할테니……”
이 말에 의료진들 모두 흐느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해를 넘겨 서거 7일 전인 새해 첫날, 저우언라이는 쳰자둥(錢嘉東), 자오무펑(趙茂峰) 등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온 비서들을 병상으로 불렀다. 그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기력이 다 떨어진 상태였음에도 오른손으로 ‘평등’을 가리킨 후 비서들에게 힘겹게 겨우 입을 열었다. “모두 왔는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전해주게... 피곤하다(累)!” 말이 끝나자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저우언라이 곁에서 8년간 일하면서 같이 지낸 비서는 저우언라이가 쉬지 않고 연속 20시간, 30시간 일을 해도 한 번도 피곤하다고 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일각에 비서들에게 남긴 말이 “피곤하다!”는 한 마디였다. 이 말이 저우언라이가 인간 세상에 남긴 최후의 말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저우언라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78년을 살면서 혁명의 열정을 불태운 마오쩌둥과 함께 평생을 중국혁명과 건국 그리고 냉엄했던 냉전 시기 내우외환의 상황에 직면해 통치기반을 닦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간 지도자였다.
마오와 저우 두 사람은 공산혁명을 성공시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불굴의 혁명가, 정치 군사 지도자였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계급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세계의 노동자와 제국주의에 대항해 힘없는 약소국의 기둥이 돼준 삶을 살았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누구나 공명할 수 있는 범인류애적인 진정한 박애, 평등, 정의에 부합되지는 않았다. 단지 중국과 중국민족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는 두 사람이 제국주의와 패권주의가 횡행한 시대에 살았던 혁명가이자 정치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해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최후를 마쳤다는 점이다.
살아생전에 평소 언행이 일치하고 자신의 말에 무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자세로 삶을 산 사람은 그가 지도자이든, 평범한 필부이든 마지만 죽음 앞에서는 대부분 겸손해지고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오늘 이 땅의 정치지도자로 나선 이들의 면면을 보면 열이면 여덟, 아홉은 지도자라고 하기엔 심히 부끄러운 언행을 일삼고 있다.
어떤 지도자는 반성은커녕, 구속 수감돼서도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모두 부인한다. 언필칭 말끝마다 국민을 위하네, 나라와 결혼했네 하면서 국가를 위해 사심 없이 일하겠다고 했지만 입만 열면 거짓말이요, 자신이 한 말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뒤집기 일쑤다. 죽음이 임박하면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생각하면서 생을 마감할까?
위 글은『시사 Inn』, 제521호(2017년 9월 1일)에 게재된 글의 수정 전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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