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와 현종의 로맨스와 최후 : 화려한 향연 뒤에 남은 비극
당 현종 이륭기(唐玄宗 李隆基, 685~762)와 양귀비 양옥환(楊貴妃 楊玉環, 719~756)의 로맨스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면서도 비참하게 끝난 애정사이다. 절정의 권력을 쥔 황제는 왜 수많은 후궁을 마다하고 며느리였던 양귀비에게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을까? 그 사랑은 어떻게 당나라를 거대한 파국으로 몰고 갔을까? 그리고 당사자들의 말로는 어땠을까?
첫눈에 반한 며느리, 화청지에서 시작된 운명
740년, 당 현종은 아들 수왕(壽王 이모 李瑁, 720~775)의 아내인 며느리 양옥환을 보고 첫눈에 완전히 넋 나간듯이 마음을 빼앗긴다. 一見鐘情!(중국어로 첫눈에 반했다는 뜻임) 도대체 얼마나 미인이었기에 며느리에게?
중국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양귀비는 당시 기준으로 단단하고 풍만한 체형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냘픈 몸매의 여느 미인들과 달리 양귀비는 키 162cm에 풍만하고 건강한 체형을 가진 여인이었다. 좋게 말해서 풍만하다고 했지 사실은 조금 살찐 비만형이었다.
현종은 퉁실퉁실한 여자를 좋아하는 타입이어서 한 눈에 뿅 갔을까? 그것은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당나라 시대 때의 미적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당나라 시대 여성미의 기준은 그 뒤나 오늘날과는 자못 달랐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데는 근거가 있다. 당나라 시대 유물인 ‘당삼채(唐三彩)’의 여인상이나 당대 민화 속 여인들을 보면 볼 살이 통통하고 체구가 넉넉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고대 4대 미인 중 초선, 서시, 왕소군이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몸매에 피부가 하얗고 선이 고운 전형적인 가련형 미인이었다면, 양귀비는 풍만하고 건강한 미의 대명사였다.




아무튼 현종은 첫눈에 “뿅” 간 이래로 상사병을 앓고 있었다. 정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단을 강구했다. 현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환관 고력사(高力士, 684~762)는 양귀비의 두 몸종 하녀를 매수하여 늘상 양귀비에게 궁에 들어가 만세 어르신, 즉 황제의 총애를 받으라고 권유하도록 했다.
양귀비는 귀가 솔깃했다. 본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허영끼가 있는데다, 스스로 생각해도 남편 수왕을 그다지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다. 환관 고력사의 공작과 현종의 끈질긴 구애가 계속되던 중 어느 날 온천궁인 화청지(華清池)에서 황제가 그녀에게 미친 듯한 모습을 보이자 양옥환은 수왕과 결별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양옥환은 수왕부를 떠나 화청지에서 황제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시아버지면 어떠냐? 모든 걸 거머쥘 수 있는 황제의 애첩이 되는데!
화청지는 나도 1996년에 가봤지만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오늘날의 西安)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의 연못이다. 연못엔 옥으로 깎은 양귀비의 등신상이 서 있다.


당대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長恨歌」에서 현종과 양옥환의 이 운명적 만남을 이렇게 읊었다.
“타고난 아름다움은 스스로 버리기 어려워, 하루 아침에 황제의 곁에 선택되었네.” (天生麗質難自棄, 一朝選在君王側。。)「長恨歌」『全唐詩』 卷435)
예오(藝傲)를 공유한 영혼의 소울메이트
현종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양귀비에게 헤어 나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앞서 가늠해봤듯이 양귀비의 인물과 몸매는 고혹적이 아니었다. 그런 미모 정도라면 현종이 자기 아들의 처를 넘보았겠는가? 현종을 뇌살시킨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결정적 이유는 ‘예술적 교감’이었다. 양귀비는 춤과 노래가 일품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가무라도 이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양귀비가 뛰어난 안무실력을 갖고 있었다면 현종 역시 그 분야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양귀비는 당대 최고의 가무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현종 역시 스스로 작곡을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였기 때문에 현종의 눈에 양귀비가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현종이 꿈속에서 들은 음률을 바탕으로 작곡했다는 유명한 『니상위의곡(霓裳羽衣曲)』에 맞춰 양귀비가 완벽한 춤을 선보이던 날, 현종은 매료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탄복했다.
현종의 입에서 찬탄의 소리가 나왔다. “오직 귀비만이 내 음악의 참뜻을 아는구려. 이 넓은 세상에 그대야말로 내 단 하나의 영혼의 짝이오!”
양귀비가 만면에 희색을 띄면서 화답했다. “폐하의 음률이 이토록 아름다우니, 소첩은 그저 폐하의 꿈을 춤으로 풀어낼 뿐입니다.”
황제가 무슨 꿈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까? 이 정도면 화술도 보통이 아니었던 셈이다. 황제의 몸을 달게 만들고도 남은 멘트였다. 이런 걸 보면 현종에게 양귀비는 단순한 색향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을 이해해준 단 하나의 소울메이트였던 셈이다. 사서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음흉한 권력욕과 아첨을 “지혜”라고 표현했다.
“태진(太真, 양귀비-필자 주)은 자질이 풍부하고 유려하며, 노래와 춤에 능하고, 음률에 밝아 통달하였으며, 지혜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太真姿質豐豔, 善歌舞, 通音律, 智算由是動相阿合。)「玄宗楊貴妃」『舊唐書』 卷51.
거구의 이방인 안록산과 ‘세아례(洗兒禮)’의 연극
양귀비는 권력욕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기에다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정치적 감각도 갖추고 있었으니 조신하게 가만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녀는 중앙아시아 소그드족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족 장수 안록산(安祿山, 703~757)을 자신의 수양아들로 삼았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아들로 삼은 속내가 무엇이었을까? 진짜 이유는 현종의 의심을 사지 않고 황제의 완벽한 신임을 얻기 위한 ‘영리한 정치적 연출’이자, 조정의 실권을 쥔 양씨 가문과 막강한 군사력을 쥔 절도사 안록산 간의 ‘정치적 동맹 결성’이었다.
안록산은 당시 키는 작지만 몸무게가 300근(약 170~180kg)에 달하고 뱃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이한 초고도 비만의 거구였다. 751년의 어느 날, 자신보다 16살이나 어린 양귀비가 그를 아기처럼 비단 포대기에 싸서 목욕시키는 ‘세아례(洗兒禮)’를 치렀을 때, 안록산은 사서의 기록처럼 징그럽도록 완벽한 아기 연기를 펼쳤다.
안록산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포대기 속에서 꺄르륵 웃으며) 응애, 응애! 어마마마, 물이 아주 따뜻합니다요! 이 록아(祿兒)는 평생 어마마마의 어여쁜 아기로 살겠습니다!”
현종은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으며 “허허, 저 어마어마한 덩치의 오랑캐 장수가 귀비 앞에서는 완연한 갓난아기로구나! 탕진할 만큼의 금은보화를 세아전으로 줄 터이니 귀비와 록아는 마음껏 즐기거라!”하면서 크게 흡족해 했다.
안록산은 자신에게 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철저히 바보 시늉을 냈고, 양귀비 역시 황제의 의심을 없애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연극을 주도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줄 모르는 황제의 어리석음이 문제였다.
안사의 난과 마외파(馬嵬坡)의 비극적 최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양귀비의 눈속임과 처세술이 최악의 배신으로 돌아왔다. 3개 지역의 절도사를 겸임하며 군사권을 쥐게 된 안록산은 755년 또 다른 절도사 사사명(史思明, 703~761)과 함께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일으켰다. 안록산의 진짜 목적은 양귀비의 사촌 오빠이자 실권자인 간신 양국충(楊國忠, ?~756)을 처단하고 조정을 삼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중국의 사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안록산은 모반할 뜻을 품고 표문을 올려 양국충의 죄악을 고발하며 ‘간신을 제거해 나라를 돕겠다’고 청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祿山陰懷逆謀,上表歷言國忠罪惡,請誅奸臣以輔政,遂興兵。) 「逆臣安祿山」『新唐書』 卷225.
피난길에 오른 현종 일가는 마외파(馬嵬坡)에 도달하지만, 분노한 호위 군사들이 양국충을 칼로 베어 죽이고 현종을 둘러쌌다. 군사들 중의 한 장수가 현종에게 다그치듯 고했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양씨 일가를 더는 둘 수 없습니다! 양귀비마저 처형하지 않으시면 저희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현종은 창백해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귀비는 깊은 궁궐에만 있던 여인이다. 어찌 그녀에게 반란의 죄를 묻는단 말이냐!”라고 외쳤다.
이번에는 고력사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군사들의 분노가 이미 하늘을 찌릅니다. 귀비 마마를 내어주지 않으시면 폐하의 안위조차 보장할 수 없습니다!”
결국 현종은 자진을 명할 수밖에 없었고, 양귀비는 붉은 비단으로 목을 매어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長恨歌」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읊었다. “6군(황제의 군대-필자 주)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아름다운 여인은 눈앞에서 죽어갔네.” (六軍不發無奈何, 宛轉蛾眉馬前死。)
아버지를 버린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침묵
이 비극의 현장에는 한때 양귀비의 남편이었으나 아버지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수왕 이모(李瑁)가 현종의 호위 장수로 함께 있었다. 그는 옛 아내가 목을 매어 죽어가는 모습을 핏기 없는 얼굴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로서는 아내를 아버지에게 빼앗길 때나 지금 아내가 눈앞에서 죽어 갈 때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외파 사건 직후, 수왕의 형인 황태자 이형(李亨, 훗날 당 숙종 唐肅宗, 711~762)이 아버지를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러자 수왕 이모는 망설임 없이 아버지 현종을 등지고 새로운 왕의 편에 섰다. 마외파 사건 직후, 수왕 이모는 남쪽으로 피난 가려는 아버지 현종을 따라가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가 독립하여 황제에 오른 형에게 가서 그의 신하가 되었다. 권력을 잃고 허망하게 남쪽으로 떠나는 늙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수왕 이모는 속으로 차가운 혼잣말을 나뇌었다.
“아바마마··· 절대의 권력으로 제 아내를 빼앗으셨을 때, 세상이 영원히 아바마마의 것일 줄 아셨습니까? 천하를 지키지 못해 사랑하는 여인마저 제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지금, 황제의 자리마저 빼앗기고 떠나시는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저는 아바마마처럼 권력에 미치지도, 여인에게 미치지도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아바마마의 몰락을 똑똑히 지켜볼 것입니다.”
수왕 이모가 멀어져 가는 현종의 가마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아바마마··· 속으로 차가운 혼잣말을 나뇌었다”라며 속마음을 직접 말하는 대목은 필자가 문학적 연출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 중국의 정사(正史)에는 그가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혼잣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대사는 내가 임의로 재구성한 것이지만, 그 대사의 기반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100%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앞서 봤듯이 현종이 아들 수왕 이모의 아내(양옥환)를 빼앗아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안사의 난 때 수왕 이모가 현종을 직접 호위했고, 그 과정에서 양귀비가 죽어가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홀로 남아 향낭을 쥐고 흘린 황제의 눈물
황위에서 쫓겨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현종은 훗날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아들 숙종과 환관 이필(李輔國, 704~762)에 의해 태극궁 감로전에 철저히 감금당했다. 그를 평생 보필한 충신 고력사마저 유배를 떠나고 홀로 남겨진 현종은 날마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보며 눈물을 짓다가 시름시름 앓았다.
어느 날, 마외파에서 비밀리에 양귀비의 시신을 거두어온 환관이 그녀가 품에 지니고 있던 향낭(향주머니)을 올려 바쳤다.
“상황이 촉에서 돌아와 비밀리에 개장하게 하니, 살과 피부는 이미 썩어 없어졌으나 오직 오직 향주머니(향낭)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환관이 이를 올려 바치니 상황(현종)이 받아 들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上皇自蜀還, 密令改葬··· 肌膚已朽, 唯香囊猶在。宦官以獻, 上皇受之, 垂淚涕泣。) 「玄宗楊貴妃」『구당서(舊唐書)』 卷51.
현종이 울부짖었다. 썩지 않고 남아있는 향낭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오열하며 말했다. “옥환··· 옥환아! 내 너를 지키지 못했구나. 이 화려한 궁궐이, 이 덧없는 천하가 너 하나 없는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아내를 빼앗겼던 아들 수왕 이모는 실제로 끝까지 살아남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감금당하는 아버지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모든 권력과 사랑을 잃은 현종은 차가운 감금 생활 속에서 양귀비의 향낭만을 쥔 채 762년, 77세의 나이로 외롭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모는 현종 사후에도 13년을 더 살아 775년에 생을 마감했다.
자고로 여색을 밝힌 권력자 치고 성군이 된 예를 보지 못했다. 모든 게 덧없는 것이거늘!
2026. 8. 9. 22:03.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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