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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중국사 : 쌍십절(雙十節)과 신해혁명(辛亥革命) 簡介

雲靜, 仰天 2025. 10. 9. 16:21

교양 중국사 : 쌍십절(雙十節)과 신해혁명(辛亥革命) 簡介


                                         서상문(중국사학자)

중화민국 쌍십절(雙十節)은 매년 양력 10월 10일을 기념하는 대만의 최대 국경절로,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서 일어난 무창기의(武昌起義)를 기리는 날이다. 쌍십절의 기원은 청(清) 말, 신해혁명의 시초가 된 무창기의에서 비롯된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청조에 반대하는 혁명군이 봉기를 일으켰고, 이것이 각 성(省)으로 확산되어 청 조정이 붕괴하였다.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손문(孫文, 1866~1925, 호 중산 中山)이 초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였으며, 서기 1912년을 민국(民國) 원년으로 삼았다. 쌍십절은 전제군주국가인 청을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근대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성립되는 전환점을 기념한다. 공식 건국일은 1912년 1월 1일이지만 쌍십절은 사실상의 건국기념일로서 대만과 해외 화교 사회에서 더욱 크게 기려진다. ‘십(十)’이 두 번 겹치는 10월 10일(雙十)이라는 명칭 자체가 상징성을 더한다. 오늘날 대만에서는 국가 경축 행사와 퍼레이드로, 미국 등 해외 차이나타운에서는 화교 사회의 연례행사로 이어지며, 중국 대륙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서 비교적 절제된 기념이 이루어진다.

이하에서는 신해혁명을 잘 모르는 한국 독자를 위하여 시대사적 배경, 직접적 원인, 과정, 결과, 사후 영향, 역사적 의의 순으로 정리한다.

시대사적 배경

신해혁명은 청 정부의 부패 심화, 제국주의 침략의 가속, 중국 민족자본주의의 초보적 성장이라는 조건 위에서 발생하였다. 그 목적은 청조의 봉건 통치와 황제 제도를 타도하고, 민족의 위기를 구제하며, 국가의 독립·민주·부강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19세기 말~20세기 초 청은 아편전쟁 이후 누적된 불평등조약과 열강의 이권 침탈 앞에 반식민지 상태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무술변법의 좌절, 의화단 사건과 8국연합군의 진입, 거액의 배상금은 조정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켰다. 해외 유학생·신흥 지식인·상공 세력 사이에서는 애국·혁명 사상이 서책과 정기간행물을 통해 확산되었고, 흥중회(興中會)·화흥회(華興會)·광복회(光復會)·과학보습소(科學補習所) 등 혁명 단체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1894년 11월 손문은 하와이로 이민 간 형 손미(孫眉, 18??~19??)에게 가서 의학 공부를 하려다 호놀룰루(중국어명 檀香山)에서 흥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홍콩(香港)에 총부를 두어 반청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1905년 8월 일본 동경(東京)에서 중국 최초의 전국적 자산계급 혁명정당인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성립되어 손문을 총리로 추대하고, “달로(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세우고 지권을 평균한다(驅除韃虜, 恢復中華, 建立民國, 平均地權)”를 강령으로 확정하였다. 혁명당은 해외 화교를 연계하고 중국 국내의 회당과 신군(新軍)을 움직여 중국 서남 지방에서 수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들은 실패로 끝났으나 전국 적 혁명 고조의 도래를 촉진하였다.

같은 시기 서양 신식 교육의 도입과 1천년 이상 내려져온 과거제 폐지(1905년)는 사상 체계의 측면에서 청조의 기반을 동요시켰다. 서학을 수용한 신식 학당에서 배출된 엘리트와 신군 장병들은 이후 혁명의 인적 자원이 되었다.

직접적 원인직접적 도화선은 보로운동(保路運動), 곧 철도 이권 수호 투쟁이었다. 1911년 청 정부는 민간이 출자하여 건설 중이던 월한(粵漢, 광주-한구)·천한(川漢, 사천-한구) 철도를 국유화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 4국 은행단과의 차관 계약으로 그 이권을 제국주의에 넘기려 하였다. 호남(湖南)·호북(湖北)·사천(四川)·광동(廣東) 네 성에서 민중의 반발이 고조되었고, 특히 사천에서는 보로동지회가 결성되어 파업·동맹휴학·무장봉기로까지 확대되었다. 청 조정은 진압을 위해 호북 등지의 신군을 사천으로 급파하였고, 그 결과 무창 일대의 수비는 공백에 가까워졌다.황화강(黃花崗) 봉기 실패 직후 밀려온 이 보로 풍조 속에서, 동맹회의 영향 아래 있던 호북의 혁명 단체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는 봉기 준비를 서둘렀다. 거사 일자는 여러 차례 연기되었고, 한구(漢口) 러시아 조계에서 폭탄 제조 중 사고가 발생하여 명단이 발각되자 체포를 우려한 신군 병사들의 긴장이 극에 달하였다. 1911년 10월 10일 밤, 호북 신군 공정 제8영의 혁명당원 웅병곤(熊秉坤, 1885~1969)·금조룡(金兆龍, 18??~19??) 등이 먼저 발포하였고, 각 영이 호응하여 초망대(楚望臺) 병기고와 호광총독 아문(총독 집무실 청사)을 점령하였다. 무창이 하룻밤 사이에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간 이 사건이 신해혁명의 기점이자, 오늘날 쌍십절이 기념하는 순간이다.

전개 과정

서구 열강의 각축 속에 기울어 가던 청은 이 봉기를 기점으로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혁명 세력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한 달 남짓 사이에 전국의 약 14개 성이 호응하여 청조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하였다. 무한 삼진(무한, 한구, 무창?)이 광복되고 혁명 측의 호북군정부가 수립되자 각 성은 앞 다투어 혁명정부를 구성하였고, 만청의 통치는 와해되었다.

신해혁명의 상징적 지도자로 추대된 손문은 해외에서 혁명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이던 중 중국의 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1년 12월 29일 남경(南京)에서 열린 17개 성 대표회의는 손문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였고,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어 국호를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 정하였다. 임시참의원이 조직되고 ‘중화민국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이 통과되었으며, 자산계급 민주정치와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유리한 일련의 정령이 공포되었다. 서기 1912년 1월 1일부로 민국 원년이 되었다.

손문은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치기 위해 혁명 시대의 정부 과제를 민족·영토·군정·내치·재정의 통일에 있다고 보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통일을 주창하였다. 당시는 청조가 무너졌지만 원세개(袁世凱, 1859~1916)가 중심이 된 청조 세력이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남방 광주(廣州)의 민국정부와 대립한 상황이었다. 안으로는 임시정부 파벌의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밖으로는 일본·영국 등 열강의 개입으로 북벌(北伐)을 통한 혁명의 철저화가 곤란해졌다. 북방의 실권자 원세개는 청 조정의 군권을 장악한 채 남방 손문의 국민당 측과 협상에 나섰다. 임시 대총통이었던 손문 측이 원세개에게 대총통 자리를 이양하는 조건으로 청 황실의 퇴위를 요구하였고, 원세개가 이를 수락하여 군정 양권을 장악하였다. 1912년 2월 12일 선통제 부의(宣統帝 溥儀, 1906~1967)가 퇴위 조서를 내림으로써 청조가 268년간 이어 온 봉건 전제 통치와 2천여 년의 황제 제도가 함께 종언을 고하였다. 2월 15일 남경 참의원은 원세개를 대총통으로 선출하였고, 3월 10일 그는 북경(北京)에서 취임하였다. 같은 해 9월 민국 정부는 임시참의원 결정에 따라 양력 10월 10일을 민국 국경일—쌍십절—로 공포하였다. 무창 수의가 음력 8월 19일이었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10일이었기 때문이다.결과신해혁명의 가장 뚜렷한 결과는 2천여 년에 걸친 군주전제 제도와 청 정부의 부패 통치를 종식시킨 것, 그리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의 탄생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공화 관념이 국호·약법·국경일이라는 제도적 형식으로 중국인의 정치 언어 속에 자리 잡았다. 동시에 혁명의 과실은 곧 원세개를 우두머리로 한 북양군벌의 손으로 넘어갔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 등극한 원세개는 의회를 압박하고 과거의 황제 체제로 되돌아가 가려는 생각에서 제제(帝制) 복귀를 시도하는 등 혁명의 민주적 약속에 역행하였고, 이로써 ‘혁명 시대’는 조기에 종말을 고하였다. 중앙 권위가 약화되자 각 지역을 장악한 군벌, 국민당 내부 파벌, 이권에 몰두하는 외세가 맞물려 중국은 사실상 분열 상태로 진입하였다.

사후 영향황제 제도를 없앴으되 1916년 원세개 사후 그의 부하들이 각지에서 제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군벌과 외세, 중국의 분열과 그로 인한 국공내전이 뒤를 이었다. 각 지역을 장악한 군벌과 중국국민당 내부의 각 파벌, 이권에 몰두하는 외세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었고, 1920년 11월 창당한 중국공산당까지 세력을 키워 천하 쟁패의 구도에 가담하였다. 그 후 역사는 제1차 국공합작—장개석(蔣介石, 1887~1975)의 북벌—4·12 상해(上海) 쿠데타— 제1차 국공내전—장개석의 5차에 걸친 초공—초공에 피해 도주한 중국공산당의 ‘대장정’—1931년 만주사변—1937년 중일전쟁—1936년 서안(西安) 사변—1938년부터 개시된 제2차 국공합작—항일전 승리—일제 패망—국공협상 결렬—제2차 국공내전—1949년 국민당의 패퇴—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동년 12월 국민정부의 대만 천도로 이어지는 격동의 연쇄로 전개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반봉건·반제국주의·반군벌의 혁명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민주와 과학을 내건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중화민국은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면서도, 모두 손문을 근대 혁명의 선구자로 기리며 신해혁명의 기억을 각자의 국가 서사 안에 배치한다. 대만에서는 쌍십절이 국가 경축일로 이어지고, 본토에서는 신해혁명 기념 대회와 학술·문화 행사로 그 의미를 되새긴다.

역사적 의의

혁명의 성격과 사후 평가의 분기신해혁명은 중국에서 완전한 의미의 근대 민족민주혁명을 열어젖힌 사건으로 평가된다. 2천여 년을 이어 온 군주전제 제도를 종식시키고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국가 형태를 아시아에 처음 세웠으며, 중국 국민의 사상 해방을 촉진하였다. ‘민족 독립, 민주 자유, 민생 행복’이라는 손문의 과제는 한 세기 넘도록 양안과 해외 화교 사회에서 소환되는 정치적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사후 평가에서 신해혁명에 대한 해협 양안의 시각은 뚜렷이 갈린다. 대만(중화민국·중국국민당 계열의 역사 인식)에서는 이 혁명을 왕조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제를 도입한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혁명으로 본다. 삼민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공화제가 역사 발전의 도달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신해혁명 이후에는 또 다른 혁명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반면, 중국 대륙의 공산당 체제에서는 신해혁명과 손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혁명을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의 역사발전 5단계설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사상을 추종한 모택동(毛澤東, 1893~1976) 등의 중국공산당의 혁명 이론에 따르면, 그것은 마르크스적 역사 발전 단계 중 네 번째 단계(근대 부르주아 사회)에 해당할 뿐이며, 최종 단계인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 단계이지 종착점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그 다음 단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이른바 신민주주의혁명을 거쳐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중국 대륙을 지배중인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 섬을 통치하고 있는 중화민국 모두 손문을 숭상하며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는 다른 점이 있다.

대만은 신해혁명을 중화민국 건국의 원점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이 혁명을 정통 노선으로 삼고 있고, 이와 달리 중국은 공산당의 혁명이론에 따라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의 건국을 정통으로 삼고 있다.

근현대사 획기(劃期)의 차이

역사학에서 시기를 가르는 ‘획기’는 장구한 중국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핵심 장치이다.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어떤 국가·사회로 만들 것인가, 그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상이한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근현대사 시기구분도 확연히 갈린다. 양측의 공통점은 중국 근대사의 출발점을 1840년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에 둔다는 것이다. 외세의 침략으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은 일치한다. 그러나 근대의 종결·현대의 기점, 그리고 ‘당대사’ 개념의 유무는 일치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예시는 아래 도표와 같다.

구분           근대사         현대사            당대사 중국(대륙)1840~1919 1919~1949 1949~현재
대만         1840~1911 1911~현재(용어 없음)

대만에서는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武昌) 봉기를 계기로 한 신해혁명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는다. 봉건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제의 중화민국을 수립한 결정적 계기였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 공화제를 역사 발전의 최종 단계로 보기 때문에 아편전쟁으로 열린 근대는 신해혁명으로 닫히고 그 이후는 줄곧 ‘현대’로 서술되며 ‘당대사’라는 별도 범주는 쓰지 않는다.

중국 대륙에서는 1919년 5·4운동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는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사학계 논쟁을 거쳐 모택동의 혁명 이론으로 수렴된 결과이다. 1954년 호승(胡繩, 1918~2000)이 『역사연구(歷史研究)』 창간호에 발표한 「중국근대역사의 분기문제」 이후, 1840~1919를 근대사(구민주주의혁명 시기), 1919 이후를 현대로 보는 구도가 주류가 되었다. 구민주주의혁명은 국민당을 부르주아 계급의 정당으로, 신해혁명을 노동·농민을 배제한 채 부르주아가 주도한 민주주의혁명으로 평가하는 개념이다. 이에 대비되는 「신민주주의혁명」은 1948년 4월 모택동이 진수(晉綏) 간부회의 등에서 제시한 것으로,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반관료자본주의 혁명, 곧 노동자·농민·민족부르주아·지식인 등 제계급 연합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노선을 가리킨다.

한편 범문란(范文瀾, 1893~1969)은 1955년에 펴낸 『중국근대사』 상권에서 ‘사회 성격’에 따라 1840~1949년 전체를 반식민지·반봉건 사회의 근대로 묶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현대(사회주의 시대)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형식상 호승의 구분과 획기 시점은 다르나, 1949년을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개시로 본다는 점에서 모택동의 혁명 이론 및 역사 발전 5단계설의 해석 틀에 수렴한다. 대륙학계의 공식 서술에서 1949년 이후는 ‘당대사’로 불리며,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이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 내지 ‘과도기’로 설명해 왔다. 등소평(鄧小平, 1904~1997) 이후 ‘중국 특색 사회주의’ 노선 아래에서도 이 단계론적 혁명노선 규정은 유지되고 있고, 현재도 변함없이 동일하다.

요컨대 대만은 신해혁명을 왕조 종식과 민주공화 도입으로 혁명이 완결된 지점으로, 대륙은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필요 단계를 수행했으나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으로 더 나아가야 할 미완의 지점으로 읽는다. 10월 10일이 대만에서는 ‘국가의 탄생일’로, 대륙에서는 ‘봉건제의 황제제도를 끝낸 날’이자 더 긴 혁명 서사의 한 장으로 기려지는 이중성 자체가, 신해혁명이 남긴 공유와 분열의 유산을 압축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신해혁명은 제국의 해체와 국민국가의 모색이라는 동아시아 공통의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응답—그리고 그 응답을 둘러싼 양안의 상이한 역사 철학—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