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대신동 “똥꼴 동네” 1

雲靜, 仰天 2026. 1. 16. 14:08

대신동 “똥꼴 동네” 1



대신동 북부시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담이 없는 동네다.
사람들은 그곳을 ‘똥꼴동네’라 불렀다.
골목마다 냄새나는 꽃송이가 많아서 그랬겠다.

집집마다
수저가 몇 개인지도 훤히 보이던 이웃들
아침 마다 공동변소 오가다 마주치면
또래 여자아이들이 얼굴 붉히고,
19공탄 위 석쇠에
생선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던 곳

나는 그곳에서 번지러운 골목대장이었다.
졸대로 나무 칼을 수십 개나 만들어
동네 아이들 스무 명 이상 몰고 다니며
병정놀이한다고 골목골목 누비고 다녔다.
손수 도화지에 등고선 그려넣은 지도를 들고
'부하'들과 함께 편 갈라 산을 오르내리면서
날이 어둑해 질 때까지 놀았다.

세월이 나를 멀리 데려갔지만
마음은 아직 그곳에 머문다.

오늘도 시장통 저편,
다 같이 못살던 시절의 불빛이
대신동 똥꼴동네 위로 스며든다.

2026. 1. 16. 14:09.
일산 향동 포레병원에서
雲靜 초고

노란 시멘트 벽돌 구조 2층집이 내가 어릴 적 초등 4학년~중고등학교 졸업 후 군 입대 전까지 살았던 북부시장 내 나의 집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시멘트 벽돌 집이 아니었고 일제시대 적산 가옥 같은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이 일대 건물이 다 비슷한 구조였는데 그 이후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주인들이 이런 식으로 개조를 해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 북부시장엔 그때나 지금이나 집집마다 담이 없다.
대신동 북부시장 나의 집에서 항구로 가는 도로. 직선거리로 약 4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여름에는 이 거리를 수영복만 입고 바닷가로 가서 은빛 모래가 반짝이던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로 건너가기도 했다.
반 세기보다 더 이전 포항은 다섯 개의 섬으로 형성된 도시였다. 지금은 다 복개천으로 돼 있다. 송도, 해도, 죽도, 상도, 대도 등 5개의 섬과 섬 사이로 강물이 흘렀는데 최종적으로는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갔다. 내가 나고 자란 학산동, 항구동과 대신동은 뭍과 송도를 사이에 두고 바닷가를 연해 항구가 형성돼 있는 곳이다.
위 사진 속 바다에서 왼쪽편이 포항항구이고 오른쪽 편이 송도다. 이 수로를 따라 사진의 아파트가 서있는 전방으로 계속 나가면 영일만으로 통한다. 이 두 곳 사이의 바다는 넓은 데는 폭이 대략 250m 가까이 되었고 좁은 데는 200m 정도 되었다. 나는 이 푸른 바다를 초등학교 4학년 때 최초로 헤엄을 쳐서 건넜다. 나보다 두 살 많은 형, 형 친구들과 함께 헤엄을 쳤는데 마지막에 가선 힘이 딸려 상체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하면서 짠 바닷물도 몇 번이나 마시면서 가까스로 건너 편에 닿았다. 먼저 도착한 형이 뒤를 돌아 보니 동생이 바닷물을 마시면서 물속에 잠겼다가 떠올랐다 하면서 힘겨워 하는 걸 보고 죽는가 싶어서 마음 졸이면서 고함을 치고 했다고 지금도 추억담을 이야기한다. 그 뒤로는 난 자신감이 생겨서 해마다 여름이 되면 수시로 옷을 항구에 정박돼 있던 배에다 벗어놓고 건너곤 했다. 항구에서 송도 해수욕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나른 거룻배의 배삯이 10원이었는데 그 10원이 없어서 헤엄을 쳐서 건넜던 것이다. 죽도시장 다리결에 국화빵 20개가 1원 했고, 국민학교 3학년 때 난생 처음 시공관에서 서영춘과 김희갑 출연의 “왕마귀”라는 영화를 10원 주고 봤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아침부터 햇볕이 따가웠던 어느 토요일 오전 그날도 마찬가지로 헤엄을 쳐서 건너는데 거룻배를 타고 송도해수욕장으로 가시던 같은 학교 중학교 체육 교사 권기성 선생님한테 발각된 바 있다. 나는 당시 1학년 6반 체육부장이어서 선생님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권 선생님의 지시로 그 다음 주 월요일 학교로 호출 당한 후 그날부로 "반강제로" 포항중학교 수영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권 선생님의 지도와 인솔하에 합숙 훈련을 하고 보경사와 구룡포에서 열린 영일군 수영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3학년 때부터는 포항중학교에도 50m짜리 국제 규격의 수영장이 생겼다. 당시 교장이셨던 소삼영 선생님이 벌인 각고의 노력으로 맺은 결실이었다. 나는 당시 미술 교사 출신이었던 소삼영 교장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내가 미술부원으로 각종 사생대회에 나가 큰 상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특별히 나를 위해서 그려 주신 가을날 낙엽이 지던 풍경의 수채화 작품을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앨범에 나와 있는 사진 속 모습이다. 당시 나는 별명이 “서 방구”였다. 6학년 담임 선생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 별명은 담임 선생님만 부르고 반 아이들은 나에게 별명을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르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이유는 상상에 맡긴다. 담임 선생님은 성함이 김우곤이었는데 걸핏하면 나를 무시하고 핀잔 주는 소리를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매일 점심시간 40분 전에 나를 자기 집으로 보내서 사모님이 싸주시는 따끈한 도시락을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켰다. 1년 동안 딱 두 번 칭찬을 들었다. 한 번은 국어 시간에 나전칠기의 빛깔이 어떠냐고 반 아이들한테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어서 내가 “아주 독특한 빛깔입니다”라고 했더니만 칭찬을 해 주셨다. 그리고 반아이들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을 붓글씨로 쓰는 시간에 내가 붓글씨를 잘 썼다고 옆반의 다른 선생님들까지 불러서 자랑을 하면서 나에게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도 나를 제자는커녕 아동 취급 안 했지만 나도 그를 선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 졸업식 하고 난 후에 학생 반 아이들 다 앉혀 놓고 하는 말씀이 자기가 1년 동안 왜 나를 “서방구”라고 하고 그렇게 구박을 한 이유가 내가 좀 지저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쎄다. 이것이 이유가 될까? 나는 그를 교사다운 교사로 보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6학년 첫날 반편성 후 첫날 조회를 하시는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칠판에다 영어로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쓰고 난 후 자기가 영어를 잘한다고 자랑하면서 자기는 초등학교 선생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서 초등학교 선생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여러 차례 하셨다. 나는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아니 초등학교 선생이든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든 다 같은 교사지 중고등학교 교사가 더 낫나, 뭐 더 용빼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반 아이들에게도 불평을 했다. 그 이후로부터 나는 선생님이 선생님답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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