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체대비의 마음을 품기에는
선험적 체험은 성인의 경지다.
우리는 대체로 상처를 겪고서야 배운다.
세상사의 슬픔과 아픔, 그 고통을
마치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 일,
그런 마음이 있어야 타인의 처지가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폭력의 논리를 끊으라는
가장 급진적인 명령이었다.
“로마의 폭력 논리에 맞서지 말라,
그 논리 자체를 무력화하라.”
복수는 악을 확장시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지배하던 시대에
그는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순간
인간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고 보았다.
석가모니도 자신을 세 번이나 해치려 한
사촌 데바닷타를 저주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도 자기 업의 과보를 겪을 뿐이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행위를 넘어
그 존재의 고통까지 껴안는 일.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픔을 느낄 만큼 사랑하면,
아픔은 사라지고
오직 더 큰 사랑만이 남는다.”
티베트 수행자들에겐 각인된다.
“모든 존재는 언젠가 네 어머니였다.”
그 기억 한 조각이
원수마저 자기 가슴으로 이끈다.
그러면 자비는 피처럼 돋는다.
나 역시 그 방향을 알고,
그 길을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앎과 삶 사이의 거리는 멀다.
나는 아직 범부의 자리에 서서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를
그저 흉내 낼 뿐이다.
늦었지만 모방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동체대비의 빛이
내 안에 깃들기를 바라며
오늘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2026. 1. 5. 15:01.
중앙대학 병원에서
雲靜 초고









'왜 사는가? >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간은 무얼 위해 살까? (0) | 2026.01.12 |
|---|---|
| 숲이 숲인 이유 (0) | 2026.01.10 |
| 나는 폭군이로소이다! (0) | 2026.01.02 |
| 丙午年의 첫 새벽 (1) | 2025.12.31 |
| 저무는 을사년의 석양 아래에서 (0) | 2025.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