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결손 : 일상 속에서 사라진 ‘알맞음’에 대한 기록> 연작
말 한 마디로
“싱겁게 드세요.”
몸엔 짠맛도 필요하지만
의사의 권유엔 유독 소금엔
'알맞게'가 없다.
양념 소금병이 치워진 식탁 위엔
약봉지들이 반찬그릇처럼 늘어선다.
몸은 가벼워지지 않고
돈지갑만 야위어간다.
仁醫 고창순은 저 하늘로 떠나고,
名醫 장기려의 그림자는 희미하다.
의료수가란 벽 뒤에
인간성이 증발되고
제약회사 빌딩만 높아진다.
“적당히 짜게 드세요.”
이 말씀 한 마디가 사라지면서
세상이 점점 더
희한하게 싱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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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의 시계
의사는 환자의 눈보다
모니터상의 수치를 먼저 본다.
보험코드가 시간을 대신하고,
진단서의 인쇄음이 숨소리를 덮친다.
벽시계의 초침만이
움직이는 유일한 생명이지만,
그마저도
알맞게 멈춰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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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앞에서
사시사철 길게 늘어선 사람들,
손마다 쥔 각기 다른 색의 구원들.
누군가는 혈압을 달래고
누군가는 잠을 빌린다.
선반 위 약병들 속엔
희망과 체념이 나란히 눕고,
오늘도 습관이
건강을 대신한다.
이 도시엔
사람보다 약 이름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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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하나로
한국의 대중목욕탕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진풍경—
수돗물이 강물처럼 넘쳐흐른다.
충직한 시종처럼 서 있는
샤워기들을 틀어놓은 채
누군가는 머리에 비누칠 하고,
누군가는 양치질을 한다.
물부족 국가에서
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진다.
아무도 잠그지 않지만
누구나 요금을 낸다.
무신경한 손끝 하나,
세금으로 돌아와
모두의 물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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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안에서
문이 닫히려 할 때마다
누군가 허겁지겁 버튼을 누른다.
한 번의 지연은
모두의 습관이 된다.
그 사이
비상하려던 불빛이 잠시 멈칫
한 곳에 빼곡이 쏟아지는 올빼미 눈들.
기다림과 서두름 사이에서
초조함이 스위치처럼 켜진다.
순간 이기심이 권리가 되는 순간,
공중도덕은 설 자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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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쇼핑몰의 밤불
영업이 끝난 매장들,
진열대 위에서
규격화된 미소가 멈춰 있다.
고객들이 떠난 자리엔
상품에 묻어 있는 손자국들
광고판 속 여배우는
희뿌연 새벽녘에도 웃고 있다.
그 미소가 꺼질 때까지
도시의 밤은
25시 할인 중이다.
2025. 12. 10. 02:12.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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