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올라온 어떤 박태준 관련 글에 대한 부언
최근, 어떤 분이 Facebook에 청암 박태준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면서 나에게 그 글을 보내주면서 글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왔다. 나는 즉각 답글을 써서 보냈는데 청암 박태준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에도 두 글을 모두 올린다.
2025. 8. 29. 07:01.
충북 음성의 충북혁신도시
대소 호텔 408호실에서
雲靜
박태준에 대해선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서상문 박사님이 전문가이신 것 같은데 아래 글쓴이는 박태준에 대해 얼마나 연구하고 쓴 글인지요?
제철입국의 꿈을 완성한 위대한 지도자, 청암 박태준 회장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완수하고 삼가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와 ’경제부흥’에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포항과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 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세계 6대 철강 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중략)정치인, 정부 각료들, 악의적인 기업인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도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열세 차례에 걸쳐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이 말은 1968년 4월1일부터 92년 11월 5일까지 이십사년을 포스코 최고경영자로 재임하며 포철신화를 마무리 지으면서 박정희대통령 묘소에서 92년 10월3일 보고한 내용이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은 ‘기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6·25 전쟁의 폐허 위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했다. 그 과정에서 경부고속도로가 산업의 대동맥을 열었다면, 포항제철은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심장을 뛰게 한 기관차였다. 철강이 없이는 자동차, 조선, 건설, 기계 산업이 발전할 수 없으며, 국가적 자립 또한 불가능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과제를 짊어지고 ‘제철입국’을 완수한 인물이 청암 박태준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도전 – 포항제철의 탄생
포항제철 설립은 그야말로 ‘불가능의 도전’이었다. 우선 자금 문제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력으로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제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국제 금융기관은 “한국은 아직 제철소를 건설할 능력이 없다”며 냉담하게 돌아섰다. 심지어 국내에서도 “밀가루를 수입하는 나라가 무슨 제철소냐”는 조롱 섞인 반대가 거셌다.
그러나 박태준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철강인들을 설득하여 식민지배 배상 성격의 차관과 기술 협력을 이끌어냈다. 한일협정 체결 이후 얻어진 자금과 기술을 국가 산업의 뿌리로 전환한 것이다. 또한, 그는 대일청구권 자금이 농업에 투입하게 되었던 것을 제철소 건설에 투입하는 정치적 반대와 사회적 비관론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단순히 탁상공론이 아닌, 직접 현장에 나서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철강 없이는 국가도 없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1973년 마침내 포항에 1기 종합제철소가 준공되었을 때, 세계는 놀랐다. 가난한 한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제철소를 세워냈다는 사실은 단순한 산업적 성과를 넘어 국가적 자존심을 세운 사건이었다. 중학생 시절 포철이 완공되면 이루어질 한국의 발전상을 듣고서 꿈에 부풀었다. 그때 들었던 최고의 희망은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는 말이었다.
확장의 결단 – 광양제철소 건설
그러나 박태준은 1기 제철소 준공에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국의 산업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동차, 조선, 기계 산업이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철강이 필요했다. 그는 곧바로 제2종합제철소 건설을 구상했고, 그 무대는 전남 광양만이었다. 이는 아산만에 제2제철소를 건설하려는 많은 정부관계 장관들의 주장에 박태준이 25만 톤 규모의 원료를 지속 공급할 수 있는 항만의 입지조건을 들어 관철시킨 결과였다.
광양제철소 건설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전이었다. 자금조달, 부지 확보, 기술적 문제 등 숱한 난관이 또 다시 가로막았다. 그러나 박태준은 “철강은 곧 국가 생존”이라는 신념으로 밀어붙였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차관을 마련하고, 세계적 기술을 도입했으며, 무엇보다 광양만 입지의 최대 난관인 연약지반 강화도 해결했다.
그 결과 광양제철소는 세계적 규모의 제철소로 완공되었고, 한국은 철강 수입국에서 철강 수출국으로 탈바꿈했다. 이 성과는 곧 한국 자동차 산업과 조선 산업의 세계 진출을 가능케 했으며, 오늘날 한국이 글로벌 제조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인재 양성의 결단 – 포항공대(포스텍) 설립
이러한 건설의 이면에는 직원들의 복지와 의료 그리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그의 솔선수범과 다가올 도전을 사전에 예측하고 난관을 극복한 결과였다. 그는 제철소를 완공하기까지 전쟁을 하는 것처럼 도전요소를 극복했다.
박태준의 시야는 산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곧 미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소가 국가 산업의 기반을 세웠다면, 인재 양성은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원동력이었다. 그는 철강 산업에서 얻은 성과를 인재 양성으로 이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1986년, 포항에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포스텍)를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이 대학을 만든다’는 발상은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은 기업이 아닌 국가의 자산”이라며 장기적 안목에서 과감히 투자했다. 포스텍은 곧 세계적 연구중심 대학으로 성장했고, 수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배출하며 한국 산업과 과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포스텍은 단순한 대학이 아니라, 박태준이 남긴 또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이다. 철강으로 국가를 세웠다면, 교육으로 국가의 미래를 열어젖힌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리더십
박태준의 리더십은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시대정신과 결단력이다. 그는 누구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던 제철입국의 과제를 끝내 완수했다. 둘째, 솔선수범의 자세였다. 그는 임원실에 앉아 지시하는 리더가 아니라, 항상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았다.
셋째,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이었다. 직원들의 주거·의료·복지를 챙겼고, 후대 인재 양성을 위해 포스텍을 세웠다. 그의 리더십은 단순한 기업 경영자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국가적 지도자로서, 시대적 사명을 완수한 진정한 리더였다.
후대에 남긴 교훈
오늘날 한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서 있는 데에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심장부에는 청암 박태준의 결단과 실천이 자리한다.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소, 그리고 포스텍은 그가 남긴 세 개의 거대한 기념비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고, 국가의 기반을 세웠으며, 미래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한국의 리더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시대정신, 솔선수범, 그리고 사람을 향한 믿음이다. 청암 박태준은 단순한 산업경영인이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태준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청암 박태준 연구총서’ 5권의 논문집이 있고 문고판으로는 서갑경이 짓고 윤동진이 옮긴 ‘박태준의 삶과 시대정신’이 있다. (끝)
아래에 올려놓은 글은 내가 위 글 관련 물음에 대한 답글 형식으로 쓴 졸고다. 이 졸문 역시 가급적 전문적인 내용은 피하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쓴 것이어서 청암에 얽힌 수 많은 일화들(예컨대 일본 거주 시절 유도선수 생활, 수영 대회 참가 등에서 형성된 리더십, 육사 시절 박정희와 맺게 된 인연,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군 시절 시 부패척결, 박정희가 청암에게 허여한 마패 신화, 효자동 주지 별명의 유래, 영일만 우향우 돌진, 제철소 건설시 극복한 난제들, 건설자금 마련의 고충, 일본인들과의 교류 등등)을 다 망라할 수가 없고 몇 가지 사실들만 나열했다.
굿모닝!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연구한 흔적은 하나도 안 보입니다. 그저 남이 쓴 글들을 짜집기한 것이네요. 그것도 청암이 보여준 제철보국과 교육입국의 사상과 정신, 일관제철소를 건설한 위업과 그 공로, 역사의 교훈, 국가관, 인간관, 교육관 등등 핵심은 다 빠뜨리고 주변부 이야기만 했습니다. 주로 서갑경의 ‘박태준의 삶과 시대정신’을, 그것도 머리말 정도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보이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죠.
제가 수 년 전 국방, 사상, 경제, 교육 등등 각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불리는 교수 학자들로 편성된 '박태준 연구진'에 참여해서 공동으로 집필한 '청암 박태준 연구총서’ 5권은 위 글쓴이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참고자료로 글 아래에 밝혀놨지만, 이 책의 내용은 참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깊이 있는 내용들이 많은데 위 글쓴이의 글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책을 참고했더라면 최소한 그런 식으론 쓰진 않았겠죠. 고등학생들 중에도 똑똑한 학생은 그런 식으론 쓰지 않으니까요. 이걸 자신은 박태준의 사상도 잘 안다는 식으로 자랑 삼아 글을 내놓는 거 보면 학인으로서 참 후안무치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암 박태준 연구총서’5권은 저도 필진의 한 사람인데 박태준의 리더십에 대한 것이 아니라 10여 명의 정치, 사상, 경영, 교육, 군사, 역사 등등 각계 전문가들이 함께 청암의 사상과 정신을 학술적으로 밝혀낸 전문 학술연구 총서입니다. 물론 청암의 리더십 연구도 일부 들어가 있습니다. 청암의 無私死生觀과 군인정신, 그리고 군인정신과 기업가정신을 비교한 저의 논문도 두 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청암에 관해선 한국 학계 최초의 학술연구 성과이고 아직까지는 이 책의 수준을 능가하는 연구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무사사생관과 군인정신 관련 저의 졸문은 여기 저의 블로그에도 올려놨습니다.
저는 저의 논문에서 청암의 사상적, 정신적 핵심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하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 무사사생관과 그것의 엄정한 실천이라고 봤습니다. 무사사생관이 일관제철소인 포스코를 건설함으로써 한국의 중공업 시대를 열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사상적 요체와 정신이었다면 청암이 제철소 건설 당시 이에 시비를 걸고 걸핏하면 일본의 외자 중 일부를 정치 자금으로 뜯어가려는 정치권의 훼방에 방패막이가 되어준, 박정희라는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를 만난 것 그리고 일본이 제공해준 외자는 청암의 정신과 의지를 실현시킨 필요충분 조건들 중 한 가지였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날의 포스텍을 위시한 5~6개의 포스코 산하 교육기관들도 모두 청암의 무사사생관의 실현이었다고 봤습니다. 일본 측 제철소 관련 기업들에서 리베이트로 당시 7,000만원(요즘 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해당)이라는 거금을 박태준에게 보냈는데 청암은 그것을 1원 한 푼 쓰지 않고 몽땅 들고 청와대를 찾아가서 박정희에게 통치자금으로 사용하라고 보고했더니 박정희가 청암에게 한 말이 걸작이었죠. “그건 임자 돈이야. 임자가 알아서 써!” 청암이 그 돈으로 만든 게 바로 오늘날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있는 포스코 교육재단입니다.
청암은 포스코 건설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 지내면서도 재산 축척과 개인 비리가 일체 없었고, 죽을 때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죠. 개인 재산은 하나도 없고 서울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 2층짜리 허름한 양옥집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청암이 청렴한 삶을 살았음을 증명해주는 사실들은 적지 않습니다. 제가 청암과 관련되는 국내외 사료들을 입수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전부 살펴보니 그는 실제로 감탄할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았습디다. 한국 전쟁 후 5사단(6사단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해졌음!) 참모장 시절 군단장 빽을 믿고 고춧가루에 붉은색 색소를 탄 톱밥을 섞어서 납품한 군납업자의 악질 비리를 권총으로 납품업자를 위협해서 해결한 일화들도 그 한 가지! 이 사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공무원, 기업인, 법조인, 언론인, 정치인 할 거 없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귀감이 되고 사표가 되는 일화였습니다.
제가 청암의 삶과 사상의 핵심이자 요체를 무사사생관으로 파악한 이유였죠! 제가 청암을 다시 보고 이순신, 안중근 같은 위인의 반열에 올려서 역사 인물로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고, 그런 숨은 일화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청암이 김영삼 대선 캠프의 선거총괄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자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정치 보복을 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김영삼은 청암이 도피해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일본에서 일본측으로부터 받았거나 포스코를 운영하면서 축적한 돈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선 박태준의 개인 은행계좌를 샅샅이 뒤졌지만 일본측에게서 받은 돈도 없고 개인 돈도 한 푼 나오지 않았지요.
만약 청암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보복으로 그의 견제를 받지 않고 계속 정치권에 남아 국무총리 역임 후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문제 많은 포스코가 완전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도 엄청나게 업그레이드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타의에 의해 청암의 뜻이 좌절된 것은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청암 연구를 하면서 아마도 박정희가 살아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답니다. 물론 한국 정치계가 너무 썩어서 비리가 만연하고 돈을 주고받거나 국민들의 도덕감이 수준 이하인 이런 정치 생태 속에서 박태준이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요!?
2025. 8. 18. 06:5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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