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호미곶 제주 해녀 정착기
오늘 새벽, 고등학교 동기 밴드에서 아주 좋은 글 한 편을 봤다. 동기 친구가 직접 써서 올린 글이었다. 통상, 좋은 글이란 잘 쓰든 못 쓰든, 또 내용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경험하고 자신이 직접 쓴 글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런데 여기에다 역사성 있는 이런 저런 내용들이 곁들여져서 읽는 재미는 물론, 지식과 정보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없이 좋다. 친구의 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주제는 지금으로부터 60년도 더 지난 1960년대에 제주 해녀들이 머나먼 이곳 영일만 호미곶에까지 오게 된 사연들이다. 즉 제주 해녀들의 육지 정착기다. 쉽게 구할 수 없는 해녀들의 사진도 여러 장 같이 곁들여져 있어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현장감과 리얼리티(Reality)까지 선사해주는 아주 훌륭한 내용이었다.
이 글을 보면서 나는 해녀들의 꿈과 애환 그리고 물질을 하기 위해 뭍에까지, 심지어 멀리 국외의 홍콩까지 진출하게 된 사정들의 실상을 또 한번 알게 되었다. 해녀 문화에 얽힌 그들만의 용어도 몇 가지 새롭게 알게 됐다. 우리만 보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쓴이인 친구의 동의를 얻어 귀한 玉稿를 다시 본 블로그에 올린다.
본문에서 소개되는 사진도 모두 글쓴이가 제공한 것이다. 글도 하나도 손 대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긴다. 다만, 가독성을 고려해서 사진배열만 조금 바꾸었다. 덧붙여 친구에게 이 주제의 글들을 계속 쓰되 더 많은 자료로 보충하고 고증을 거쳐 단행본으로 내볼 것을 한번 고려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또 한 가지! 해녀들의 실명과 사진에서 얼굴이 나온 것이 혹여 당사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 글을 쓴 친구의 말대로 그들이 이 소개글을 보더라도 선의의 공개이니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모쪼록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이 해녀에 얽힌 바다 이야기, 해녀 및 어업의 역사와 문화 내지 해양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친구가 소개한 대로 해녀는 전 세계 일본과 한국을 빼고 지구상 어디에 가도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일본에는 이들을 한자로 海女라고 그대로 쓰고 '아마'(あま)라고 읽는다. 인류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전승해야 할 소이연이 여기에 있다.
친구 덕분에 이 참에 한 가지 더 소개하면, 편집자가 올해로 10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환동미래연구원을 2012년 11월 11일에 설립했을 때 내건 연구원의 기치가 바로 "인간과 자연의 상생, 바다와 뭍의 조화, 지역민과 함께하는 연구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바꾸지 않고 동일하다. 바다 역시 뭍과 함께 우리 인간이 묻힐 회귀의 원초적 장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편집자 주
포항 호미곶 제주 해녀 정착기(삼춘 어디 감수광...)
/글 사진 김재진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해녀와 함께 생활해 왔다. 해녀의 사전적 의미는 바닷속에 산소공급 장치 없이 수심 1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소라·전복·미역·톳· 우뭇가사리· 성게· 운단 등을 채취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을 칭한다.
해녀는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되어 있으나 제주도가 원조로서 한반도 각 해안과 여러 섬에 흩어져 있으며 현재 국내에는 약 2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육지에 정착한 해녀들은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고 있어서 물질만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농사일을 치르는 사이에 물때에 맞추어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므로 이들의 밭은 뭍과 바다에 걸쳐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해녀들은 밭일과 물질을 한나절 씩 치르는 경우가 흔하며 해녀작업은 봄에서 가을까지 특히 한여름철에 성행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많다. 해녀들은 해산물의 채취능력이나 기량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고향 호미곶에서 해녀의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한동네에 한두 명 정도의 해녀가 제주도에서 와서 정착하여 살았었는데 5.16 군사혁명시 해병대 중령으로서 혁명주체 세력으로 참여하여 전매청장을 지낸 좌병욱(바우)의 모친인 고사분이 대표적 인물이다.
궁핍했던 시절 은행 등 금융기관은 없고 좀도둑들은 극심하여 물질을 하러 나갈때 돈을 맡기거나 보관할 데가 없어 눈에 띄지 않은 부엌 아궁이의 잿더미 속에 뭉칫돈을 감추었다 깜박 잊고 불을 지피어 돈을 다 태워 먹은 일화는 유명하다.
고사분은 교육열이 대단하여 외아들 좌병욱을 포항고에진학시켜 간부후보를 거쳐 장교로 성장하였는데 그는 출세후에도 기회 닿을 때 마다 어머니에 대한 모정을 고향 앞바다에 와서 슬피울며 애도하곤 하였다.
우리 고향에서 조직적으로 해녀 인솔작업이 본격화 된 것은 1960년부터였다. 육지에서 제주도에 들어가 선금을 주고 상군들을 스카우트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우리 고향의 해녀들은 김부자 서유순 좌창연 좌창주 홍남진 배선자 강영희 등의 상군 들이었다.
당시 제주항에서 도라지호로 꼬박 이틀 뱃길로 부산항으로 와서 다시 버스로 하루꼬박 걸려 호미곶으로 오던 시절이었으니 실로 대단한 여정이었다. 이들 중 강영희는 수영 제주도 대표선수를 역임한 팔등신 미녀로서 상군 중의 상군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현재는 경남 남해에 정착하여 패션모델을 하며 잘 살고 있다.
그녀들은 우리고향 동리의 각 가정에 셋방을 얻어 삼삼오오 함께 생활을 해 가며 봄 여름 한철 벌어 제주도로 귀향하였다. 고무옷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물질을 오래 할 수 없었다. 뭍에 나오자 마자 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야 했었다. 지금도 어렸을 때 물질을 하러 태왁을 이고 가던 긴 해녀들의 행렬이 생각이 난다.
해녀들은 바닷속에 무자맥질하여 보통 수심 5m에서 30초쯤 작업하다가 물 위에 뜨곤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수심 20m까지 들어가고 2분 이상 물 속에서 견디기도 하였다. 물 위에 솟을 때마다 “호오이” 하면서 한꺼번에 막혔던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이색적인데 우리 어릴적엔 한여름 부느리께와 까꾸리께 큰게 한내의 바다에는 여기저기서 울러나는 이 숨비소리로 활기가 넘쳐났다.
해녀들은 간편하게 마련된 탈의장이나 바위 틈에서 ‘물옷’이라는 해녀복으로 갈아입고 ‘눈’이라고 하는 물안경을 꼈었다. 해녀들이 부력을 이용하여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테왁’ 은 박을 건조하여 만들었으며 그밑에는 채취물을 담는 자루 모양의 망시리가 달려 있었다. 해녀들이 무자맥질할 때에는 이 ‘테왁’과 ‘망시리’를 물 위에 띄워두고 한가득 차면 뭍으로 걸어 나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고향의 2세대 해녀들은 일본에서 고무옷이 개발되어 우리나라에도 전래된 1970년이었다. 고무옷으로 인해 보온성이 확보되어 바다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겨울철에도 물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우리고향에는 고성순 백선자 이순자 김순아 김옥선 양순선 김춘희 양매선 홍영대 홍명대 등의 상군들이 있었다. 이들 중 홍명대는 제주도 안의 또다른 섬인 우도(소섬) 출신의 상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지에서 배우자들을 만나 결혼 후 정착하기도 하였다.
음력으로 칠월칠석 날은 모두가 물질을 중지하고 호미곶 등대밑 솔밭으로 소풍을 가서 미리 채취한 홍합으로 다시물을 내고 국수를 조리해서 먹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타향에서의 향수를 달랬던 모습들이 바로 어제의 일로 느껴진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조직적인 해녀인솔이 이루어지기이전의 세대들로서 멀리 제주에서 개별적으로 도다이(호미곶 등대의 일본식 지명)에 가면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소문을 듣고 뱃길과 찻길로 만리길을 마다 않고 와서 정착한 개척자 세대들이다. 초기에는 현지인들로부터 다소 무시를 당하였으나 생활력이 강하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유난히 강하여 현지인들도 점차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우리 포항고 27회 동기들 중에 잠수질을 잘 하였던 친구는 울진 영덕출신의 김소출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세대에서 어릴적 수영이나 잠수질을 잘 하였던 친구들은 대개 포항 수산고로 진학을 하였으나 김소출은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몸으로 잠수질을 잘 하여서 방학때엔 고향 앞바다에서 잠수질로 해산물을 채취하여 용돈을 벌어 쓰기도 하였다. 해사에 진학한 송라출신의 손영식은 단거리 육상도 잘하였지만 수영도 잘 하여 생도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쳤다고 들었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의 해녀 기피로 인해 제주도는 물론 우리 고향에도 해녀들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고 있으며 그 숫자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경상북도는 지난해 해녀 문화 전승·보전에 관한 조례를 만든데 이어 올해부터 이 조례를 바탕으로 해녀 어업보전 및 육성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기로 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호미반도를 중심으로 해녀들의 생활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해녀의 역사, 문화, 생활양식, 음식문화 등을 발굴하고 수산물 직판장, 해녀 체험 교실, 해녀 작업장·휴게실 등을 갖춘 해녀 복지 비즈니스 타운을 건립해 해녀의 삶과 관광을 연계한 문화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수산 창업지원센터가 오는 7월 문을열면 해녀 교실도 개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각종 복지사업을 마련·지원하기 위해 해녀증을 발급하고 제주도와 울릉도 해녀 교류사 재조명 사업 등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한다.
경북의 현재 해녀 수는 1천370명으로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으므로 경상북도는 지역 해녀 어업을 보전하고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녀문화 전승보전 위원회를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소직이 개인적으로 수차 관직에 있는 친구들과 관계 요로에 제안해 왔던 사업들이 현실화 되니 고향발전을 위해 작지만 기여한것 같아 보람을 느끼고 너무 기쁘다.
우리고향 포항 호미곶에 제주도 해녀가 이주하여 정착한지 어언 100년. 아무쪼록 우리고향의 큰 문화적 자산인 해녀들로 인해 지역 경제가 활성화 되고 또 하나의 관광테마로서 포항과 호미곶이 크게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끝) (출처 : 포항고등학교 제27회 동기회 밴드)
★나는 위 글을 읽고 동기회 밴드에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앖다.
아주 소중한 자료를 재미 있게 잘 읽었네. 해녀들의 삶과 애환이 가늠되는 역사의 일부 같아서 읽으면서 절로 마음이 짠해지더라. 우리 5002세대의 살아 있는 삶의 일부! 사진들도 어떻게 구했는지 굉장히 자료 가치가 높아 보인다. 우리만 보고 있기가 아깝다!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해녀들의 물질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그들이 가슴에 안고 물질하던 도구가 '테왁', '망시리'라는 것도 친구 덕분에 오늘 처음 알았네. 공부가 많이 돼서 고맙심데이~ 그런데 그 많은 해녀들의 이름까지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나? 博覽强記혀! 대단하이!
한 7~8년 전에 포항 해도 우리 집 바로 앞 길 건너 작은 술집에 멸치회를 판다는 간판이 붙어 있길래 들어가봤더니 주인이 50대 정도로 보이던 여성이었는데 얼굴 전체가 심한 화상을 입은 모습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해녀 출신이라고 해서 갈 때마다 해녀들의 이것저것에 관해 많이 물어보곤 했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얼굴이 그렇게 된 것도 일종의 잠수병 중의 하나로 보여서 조금 마음이 짠했심다. 그래서 밖에서 술을 한잔 하면 늘 마지막 2차나 3차는 그 집에 가서 했는데, 그래서 우리 형과 함께 단골이 됐죠.
나도 잠시 포항중학교 수영선수를 한 바 있는데, 당시 포중에 국제 규격인 50m 짜리 수영장이 생기기 전(3학년 때 소삼령 교장 선생님의 작품!)에 영일군과 포항시를 통털어 수영장이 있던 곳은 구룡포와 송라뿐이었다네. 25m 짜리 풀장이었고, 나도 청하 보경사 연산장 내와 구룡포 초등학교 수영장에서 열린 영포지구 수영대회에 나가기도 한 추억이 있다. 수영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여름방학 때 포항중학교 체육 선생님(권기성)의 인솔하에 우리 수영부가 송라중학교에서 모개이들한테 뜯겨 가메 숙박하면서 연산장 풀장으로 가서 연습한 추억이 남아 있다. 또 어릴 적 초등 때는 여름이면 늘상 동빈동 선창가 배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송도로 헤엄쳐 건너가서 놀다오기도 하고, 항구동 '축항'에서 자맥질도 많이 했었지. 그 때는 이 멀대도 역부역강한 중고등학교 시절이라서 물속에 한번 들어가면 2분 이상은 너끈히 있었심다요. 한번은 같이 간 친구(김홍엽)가 물 밖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물속에 들어간 뒤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니까 죽은 줄 알고 해양경찰에 신고한 일도 있었죠.ㅋㅋ 암튼 해녀 문화에 대한 기록과 보존, 전승이 대단히 의미 있는 걸로 보이니 친구의 활약이 크게 기대된다.
참고로 한 마디 사족을 달면, 어릴 때 우리가 '머구리'라고 부르던 건 일본말인데, 모구루(もぐる=潜る, 잠입하다, 자맥질하다, 잠수하다, 숨어 들다라는 뜻)라는 동사의 명사형(もぐり) '모구리'를 잘못 발음한 말이라는 걸 나중에 커서 알게 됐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재작년엔 늦여름에 구룡포 선배들과 함께 구룡포 앞바다에 들어가봤다네. 해삼, 성게, 멍게나 잡아볼까 해서... 그런데 아무 것도 안 보이더라. 겨우 작은 고둥 몇 마리 밖에 보이지 않더군. 뭐 이는 구룡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해안 일대가 거진 다 그렇지만서도...사람들이 너무 많이 잡아서 그런 모양이야. 또 우리 바다에 플랑크톤이나 해초 등이 없어져 홍합이나 전복, 게 같은 걸 잡으면 굉장히 영양가가 없어 꽉 차지 않고 3분의 2 정도만 차 있는데 이것도 그렇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점에선 무단 채취에 대해 엄격하게 단속하고 벌금을 물리면서 해양자원을 보호하는 일본이 대비돼 보이기도 하고... 마침 4월 1일 오늘은 어업인의 날(1969년 오늘 제정)이네요.
새벽부터 주저리주저리 읊었는데(댓글을 이렇게 길게 쓴 것도 처음 있는 일!), 이해해주시고, 친구의 건강과 활약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