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쿠마모또 시절의 나쯔메 소우세끼 고택에서

雲靜, 仰天 2024. 11. 12. 22:25

쿠마모또 시절의 나쯔메 소우세끼 고택에서

1896년 4월 13일, 일본 큐우슈우(九州)의 가고시마(鹿児島) 본선 이케다(池田) 정거장에 14시 3분 기차로 온 29세의 한 남자가 내렸다. 일제시대 구제 제5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 나쯔메 킨노스께(夏目金之助)였다. 제5고등학교는 현 쿠마모또(熊本)대학의 전신이다. 역사를 빠져나온 킨노스께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역 앞의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완만한 언덕을 올라 교우마찌따이(京町台)에 다다랐다. 인력거를 타고 가면서 비탈길 아래로 펼쳐진 아담한 쿠마모또 마을을 처음 본 킨노스께는 “쿠마모또는 숲의 도시구나(熊本は森の都だな)”라고 말했다. 쿠마모또가 “숲의 도시”라고 불리는 연원이었다. 10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이 변했겠지만 아직도 대략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곳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나쯔메 킨노스께’는 젊은 날의 나쯔메 소우세끼(夏目漱石, 1867~1916)였다. 킨노스께(金之助)는 그의 본명이고, 소우세끼는 그의 호였다. 그는 하이쿠를 쓸 때 사용하는 작자의 이름을 뜻하는 하이메이(俳號)로 “구다부쯔”(愚陀佛)라고 불리기도 했다. 1895년 봄, 28세의 나쯔메가 젊은 영어 교사로 마쯔야마(松山) 중학교에 부임해서 2층집의 별채에 하숙을 했는데 이 2층집을 자신의 호를 따서 ‘愚陀佛庵’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1912년의 나쯔메 소우세끼, 죽기 4년 전의 모습인데 이미 지병인 위궤양으로 여러 차례 입원하고 해서 그런지 사진에서도 병세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나쯔메 소우세끼는 이곳 쿠마모또에 4년 3개월을 살았다. 이 사실을 나는 대학시절 토우쿄우(東京) 대학에서 한일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고 김태준 교수님의 ‘일본문학 강독’을 수강하면서 진작에 알았다.  문체가 시원시원해서 소우세끼다운 필치가 유감 없이 드러나는 '도련님'(坊っちゃん), 이름 없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관찰하면서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과 이기주의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 등등의 소설을 공부하면서 소우세끼의 삶을 알게 된 바 있다. 나중엔 어디선가 쿠마모또역의 하나인 북역(현재의 카미구마모또역)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도 주워들었다.

나쯔메 소우세끼! 근대 일본의 최고 문호로 평가되는 소설가이자 영문학자다. 1916년 1월 9일 위내출혈로 쉰 살도 채우지 못하고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비교적 단명의 작가였지만 사후 영향은 일본문단뿐만 아니라 일본 외의 여러 나라 문학에까지 미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잠시라도 살았던 곳을 내가 여행하게 됐는데 그를 찾아가보지 않는다는 건 앙꼬 없는 찐빵 같은 여행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무신경한 처사다. 내가 이곳에 온 이상 나쯔메 소우세끼가 살았던 쿠마모또의 고택을 보지 않고 귀국할 순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이번 쿠마모또여행의 주요 목적이었다. 11월 12일 여행 이틀 째, 나는 그가 머물렀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하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추색이 진하게 다가오는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나는 전차를 타고 구마모또성으로 향했다. 시내를 관통하는 노면 전차는 마치 숲속을 기는 지렁이처럼 느릿느릿했다. 구마모또성을 관람하고나서 성 뒤편에 있는 임진전쟁 시 왜군 장수였던 가또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 신사까지 둘러 봤다. 그랬더니 오전이 금방 다 소진됐다. 오전에 본 두 곳은 할 얘기가 너무 많다. 그래서 별도로 소감과 함께 임란 후 권력자에 대한 줄서기가 달라서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라진 가또 기요마사와 코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1558~1600) 두 인물에 얽힌 흥미진진한 역사 얘기를 소개할 생각이다. 글을 쓰는 데도 살라미 전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육질이 부드럽다고 소문이 나 있는 구마모또 스테이크로 점심 식사를 한 후, 목표가 정해진 이상 나는 좌고우면 할 것 없이 바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소우세끼가 살았던 우찌쯔보이(內坪井) 집의 위치를 보니 쿠마모또성을 바라보면서 오른 편이었다. 크게 보면 아소산(阿蘇山)의 外輪山 줄기에 위치한 곳이다. 천천히 걸어서 목적지를 향해 쿠마모또 시가지 중심가로 이동했다. 도중에 행인들에게 물으니 나쯔메 소우세끼기념관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모두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오래 걸리지 않아 이윽고 당도했다. 건물 정면을 보니 ‘夏目漱石內坪井舊居’라는 나무푯말이 서 있다. 이 집은 현재 기념관으로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전통 일본식 목조 건물이다.


나쯔메 소우세끼는 짧은 49년을 사는 동안 여러 곳에서 살았다. 자신이 태어난 토우꾜우(東京都新宿区喜久井町)를 비롯해서 유학을 한 영국 런던, 쿠마모또(熊本) 등지에서도 산 바 있다. 쿠마모또의 지금 이 저택은 그가 영국 유학을 가기 전에 잠시 기거한 곳이다. 그러니까 1896년(메이지 29년), 제5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 나쯔메 소우세키가 쿠마모또엔 4년 3개월 동안 체류했는데 그는 이 기간 중에 다섯 번이나 이사했다. 이 집은 그가 다섯 번째로 이사한 집으로 가장 긴 1년 8개월을 보낸 곳이다.

특히 이 집은 갓 결혼한 나쯔메 부부가 신혼을 보낸 곳이었는데 부인 쿄우꼬(鏡子)와의 사이에 장녀가 탄생한 집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이 훗날 “쿠마모또에서 산 집 중에서 제일 좋았다”(“熊本で住んだ家の中で一番良かった”)라고 말한 집이다.

빨리 집안 내부를 보고자하는 마음이 급해도 먼저 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우선, 나메쯔 소우세끼를 표기하는 현행 우리 한글의 외래어표기에 문제가 많다는 걸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夏目漱石를 일본어로 읽으면 なつめ そうせき이고 이 히라가나를 한글음으로 표시하면 “나쯔메 소우세끼”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선 예외 없이 모두 이걸 “나쓰메 소세끼”라고 표기한다. 한글의 외래어표기 규칙에서 이렇게 적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를 모르는 사람은 누구나가 그의 이름이 '소세끼'로 알고 그렇게 읽고 쓴다. 소세끼라 좀 어감이 좋지 않다.

아무튼 그의 성 나쯔메 중의 ‘쯔’는 ‘쓰’와 발음이 완전 다른데도 ‘나쓰메’로 표기한다. 이름 또한 소세끼가 아니고 소우세끼이다. 일본인들에게 소세끼라고 하면 완전히 달리 들린다. 한글의 외래어표기를 현행 표기법으로 정한 한글학자들이 일본어 장음을 표시하는 것을 무시하고 모두 단음으로 표시하도록 규칙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일본어뿐만 아니라 여타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해놨는지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거 1970년대였던가, 그 시기 한때는 일본어의 장음을 뜻하는 부호로 매 음가 위에다 –를 표기하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자취를 감추고 없다. 일본어의 단음과 장음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나쯔메 소우세끼라는 문호와 그가 잠시 머물렀던 집을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 왠 한글 외래어 표기 문제를 장황하게 늘어놓나 싶을 것이다. 한글학계나 언어학자들 중에서 아무도 이 폐단이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으니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가 보이지 않아서 나라도 기회 될 때마다 한 마디씩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제기는 여기서 처음 하는 게 아니다. 또 이 문제는 실제로 언어와 문학의 한 분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글에서라도 장음과 단음 그리고 격음과 경음의 표기를 정확하게 할 것이다.

말이 조금 길었다. 자, 이만 각설하고 지금부터는 나쯔메 소우세끼 얘기를 조금 해보자. 이 짧은 글에선 소우세끼의 삶과 문학, 사상과 영향 등을 다 얘기 할 순 없다. 또 글의 주제도 아니다. 그의 고택에서 그의 체취나 문향을 음미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근대 일본문학에서 점하는 그의 문학사적 위치와 영향 정도는 소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메이지(明治) 시대 말기부터 다이쇼(大正)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소설가 나쯔메 소우세끼는 소설뿐만 아니라 하이꾸와 수필은 물론, 한시에도 손을 대서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나쯔메 소우세끼의 성가는 멀리 갈 것 없이 한국 국내에 소개된 가라따니 코우진(柄谷行人, 1941~)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역, 민음사)을 읽어보면 그가 일본 문학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나쯔메 소우세끼는 당시로선 드물게도 영국에 유학을 한 인텔리였다. 1900년, 일본 정부 문부성의 제1호 국비 유학생으로 짧은 2년간의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영문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영문학자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는 당대 일본 최고 수준의 영어 실력자였다. 영어 독해력과 영문학에 대한 학문적 이해도는 영어의 본토 영국인 학자들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토우쿄우 제국대학 재학 시절 외국인 교수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고전인 『방장기(方丈記)』를 영어로 번역했을 정도였다. 다만, 말은 일본인 특유의 발음에다 회화 훈련이 안 돼 있어 수준 이하였던 모양이다.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수학하던 유학 시절 그가 영국인들과의 대화나 사교에 어려움을 겪어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나쯔메 소우세끼의 영문학적 영향은 그의 일본 문학작품이 일본문학에 끼친 영향에 비견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그의 영향력은 당대 거의 모든 일본의 주요 작가들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학에서 후학을 기르고 자기 작품을 쓰느라 바빴던 가운데서도 자연스레 형성된 목요회(木曜会)에 훗날 일본문학계에 한 획을 그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몰려든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문학적인 훈도를 미쳤다. 목요회란 하도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자기 집필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요일 오후에 찾아오라고 시간을 정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모임으로 발전한 것이다. 목요회는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학 살롱이자 제자들과의 교류 모임이었는데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토우쿄우 제국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부터 시작되어 그가 타계한 1916년까지 지속됐다. 소우세끼라는 거대한 지성을 중심으로 모여든 문학, 철학, 과학 분야의 젊은 인재들이 이곳을 통해 성장했다.

목요회에 모여들었던 인물들은 훗날 일본 문학계와 학술계의 거목이 되었다. 이들을 일컬어 “소우세끼 산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요 참여자는 소우세끼가 가장 아꼈던 제자 중 한 명인 테라다 토라히꼬(寺田寅彦, 1878~1935), 소우세끼에게 작품 『코(鼻)』가 극찬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일본 단편 소설의 거장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芥川龍之介, 1892~1927), 아꾸따가와와 함께 활동한 소설가이자 극작가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 철학적 수필집(평론집) 『인격자(人格者)』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였던 아베 지로우(阿部次郎, 1883~1959), 소우세끼의 독특한 유머와 문체를 이어받은 작가 우찌다 햐꾸껜(内田百閒, 1889~1971)이 주요 거봉들이었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소우세끼는 당대, 특히 다이쇼 시절 이름을 날린 작가들에게도 막대한 문학적 파장을 드리웠다. 그의 제자격인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는 물론이고, 나쯔메 소우세끼와 양대 산맥으로 아사히(朝日)신문에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모리 오오가이(森鷗外, 1862~1922), 요코미쯔 리이찌(橫光利一, 1898~1947), 가지이 모또지로우(梶井基次郞, 1901~1932) 뿐만 아니라 현대의 감각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1949~), 저명한 문예평론가 에또우 준(江藤淳 1932~1999) 등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 입말을 주창한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 1881~1936)이 그랬던 것처럼 나쯔메 소우세끼 역시 무엇보다 오늘날 현대 일본어에도 통용되는 언문일치의 현대 일본어를 만들고 다듬은 공헌이 크다.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에게는 영어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 작품 경향은 다르지만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었고, 중국에 루쉰이 있었다면, 일본엔 나쯔메 소우세끼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나쯔메 소우세끼는 심지어 중국 현대의 대문호 루쉰에게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소우세끼의 작품은 이광수(1892~1950), 염상섭(1997~1963) 등이 활동한 1910년대와 20년대 한국문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루쉰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소설 阿Q정전을 읽어 보면 거기에 나오는 시니컬하고 우스꽝스런 어투가 소우세끼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인 고양이가 말하는 비꼬거나 건들거리는 듯한 어투를 연상시킨다. 또한 소우세끼의 소설『산시로우(三四郎)』의 주인공 산시로우가 토우쿄우로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변화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을,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주인공 이인화가 조선의 현실을 묘지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비교해 보는 등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듯이 소우세끼는 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름난 문학평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소우세끼론을 썼을 만큼 현대 일문학의 기초를 놓았다.

일본에서 소우세끼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적지 않다. 당시 젊은 문학도들에게 그의 목요회에 출입한다는 것은 문단 데뷔를 위한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여겨지기도 한 것이라든지,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가 소우세끼의 편지 한 통에 감격하여 문학적 확신을 얻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또 나쯔메의 소설을 연구한 어떤 사람이 나쯔메 소우세끼론을 썼는데, 시간이 흘러 몇십 년이 흐르자 그 소우세끼를 연구한 사람을 연구한 사람이 나왔고, 소우세끼 연구 일대기를 연구하는 이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윤상인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나쓰메 소우세끼는 한 마디로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영웅”이고 “그의 텍스트가 일본 국민의 의식을 만들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그만큼 그의 문학이 일본인의 삶이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소리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그의 얼굴이 나와 있는 일본 화폐의 1,000엔짜리 지폐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나쯔메 소우세끼는 또한 ‘언문일치’를 주창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였던 후따바떼이 시메이(二葉亭四迷, 1864~1909)와 함께 현대 일본 순수 문학의 본령인 사소설이라는 체계를 최초로 대중들에게 선보인 선구자이기도 했다. 소우세끼 이전 기존의 일본문학은 배운 사람이나 이해하는 어려운 한문체 말투로 쓴 소설이 위주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쯔메 소우세끼가 영국문학에서 배워서 일반 대중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쓴 언문일치체로 썼던 것이다. 그것도 일본어가 가진 리듬감을 살려서 소리 내서 읽으면 더 재미있는 만담인 일본의 전통 예능 라쿠고(樂語)와 고우단(講談) 스타일을 글로 썼다. 쉽게 말해서 한국으로 치면 판소리 사설체를 글로 그대로 옮겨 적은 것과 비슷한 느낌의 문체다. 이것은 현대 일본인이 그의 소설 원문을 읽어도 불편함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modern) 문학으로 분류되는 기점이 됐다. 그가 수많은 근현대 일본문학가들 중에 일본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문호중 한 사람으로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이유다. 서민들의 구미에 맞게 쉽고 재미있게 다가간 그의 문학적 기조를 알려면 그가 남긴 많은 유작들을 다 볼 필요가 없다. 앞서 거론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한 작품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사실 그렇게 된 건 생활상의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일반 대중이 읽는 신문에 글을 연재했기 때문에 신문 독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체가 필요했었다. 같은 시기 『요미우리(読売)』신문에 연재됐던 '金色夜叉'(こんじきやしゃ, 1897년~1902년 간 연재)도 일반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일치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옛날 우리 세대까지만 해도 신파극으로 많이 들었던 “이수일과 심순애”의 원작이었다. 이 작품으로 소우세끼는 일본문학사상 언문일치를 이룩한 혁명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나쯔메 소우세끼도 흠결이 없지 않았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것으로도 그의 타국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인물이지만 딱히 작품이나 글 등에서 제국주의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으나 한국, 중국 등 주변 국가의 민족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언행을 종종 보여 왔다. “만주와 한국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라는 글에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들을 했다. 이 발언을 예로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충분하진 않지만, 주변 나라들을 그가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점은 약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썼다.

“인력거는 일본인이 발명한 것이지만 끄는 사람이 중국인이나 조선인인 경우에는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그들은 어차피 남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털끝만큼도 인력거에 존경을 표하는 방식으로 끌지 않는다. 고려의 고적지를 보러 갔을 때는 엉덩이가 방석 위에 닿을 틈이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결국 조선인의 머리를 탁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 끄는 방법에 기술이 없어 단지 무턱대고 달리기만 하면 능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에서 완전히 조선식이었다.”(「만주와 한국 여기저기」,1909년, 서은혜 등 공저, 『일본문학의 흐름』,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문화원, 2007년).

나쯔메 소우세끼가 얘기했듯이 인력거는 확실히 일본인이 발명한 게 맞다. 1869년경 이즈미 요우스께(和泉要助, 1829~1900), 스즈끼 토꾸지로우(鈴木徳次郎, 1826~1882), 다까야마 코우스께(高山幸助, 1836~1882)라는 세 사람의 일본인이 서양의 마차에서 힌트를 얻어 일본의 좁은 길에 맞게 개량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870년에 공동으로 토우쿄우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했던 게 효시였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승객의 불편을 헤아리지 않고 무작정 끌고 달린다며, 인력거를 끄는 행위에 어떠한 존경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고 그걸 ‘조선식’이라 하며 한민족 전체를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조금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만주와 한국 여행기의 다른 내용을 기사에서 언급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안에 늘어선 대부분은 중국인, 인도인 쿨리였다. 한 명도 더러운데 둘 이상이 모이니 더욱 볼꼴사나웠으며 거북하다. 인력거도 모두 저 소란스러운 패거리들이 끌었고 內地(일본)보다 느낌이 안 좋다.”(24쪽)

또 다른 그의 소설 작품『암살』에서 인용한, 나쯔메 소우세끼 본인이 『만주일일신문』에 기고한 「한만소감-하」 역시 이런 시각이 보인다. 이를 요약하자면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은 다행이다. 일본인이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만주, 조선에 있다 온 동포가 문명 사업에서 활약하고 우월한 존재가 된 것을 보면 일본인도 믿음직하다. 난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들 앞에서 승자의 패기를 가지고 일하는 동포는 운명의 총아이다”라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나쯔메 소우세끼의 작품에서나 발언 중에 비일본민족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꽤 발견된다고 위 글을 번역 출간한 김유영 동덕여대 일본어학과 조교수가 지적한 바 있다. 대외적으로는 반전주의와 천황제 비판을 보이면서도 “일본인들은 자랑스럽다”, “영국인들은 당당하다”, “러시아 건축물은 훌륭하다”면서 “피식민지 하층민은 더럽다, 불쾌하다”고 하여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인터뷰기사도 있다. 일제가 아시아 이웃나라들은 침략할 때 후진국을 선진국인 일본이 통치를 해서 계몽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식민지 침략을 합리화, 합법화한 사상적 편린이 그의 이와 같은 인식에서도 엿보인다.

이 집의 옛주인 인물 소개는 대략 이쯤에서 끝내고, 이제 그의 집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옛날 그가 살았던 시절에는 대문 구조의 저택 문 앞에 “夏目金之助”라고 적힌 문패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정원이 각종 나무들이 많아서 잡목림 같다. 당시 부지는 500평, 크고 작은 방이 아홉 개에다 마굿간(馬丁小屋)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타따미방에는 어디든지 거의 예외 없이 있는 토꼬노마(床の間)에는 소우세끼가 일관되게 이상으로 삼은 테마였던 노리뗀꾜시(則天去私, 즉 자아의 집착을 떠나 자연의 도리에 따른다는) 복제본의 축이 걸려 있다. 닳아서 윤기가 나는 복도의 나무마루, 기둥의 작은 흠집들, 대부분 그가 살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보존과 관리가 잘 돼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치 복도 안 서재에서 금방이라도 “한국에서 오셨다고요?” 하면서 소우세끼가 걸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집안을 기웃거리면서 요모조모 보고 있는데 나쯔메 소우세끼 대신 나타난 이는 이 기념관을 관리하는 시오따(塩田賢俊)라는 관장이었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내가 나도 작가라고 하니 반갑다면서 친절하게 나에게 나쯔메 소우세끼와 이 집에 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다. 그는 이 집에는 아직도 일본어로 “우부유(うぶゆ)”라고 읽는 산탕(産湯), 그러니까 갓난아이를 목욕시키는 더운물로 쓰기 위해 길어 쓴 우물도 남아 있다면서 정원에 있는 우부유를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밖으로 나가서 자세히 보니 1899년 5월 31일 태어난 장녀 후데꼬(筆子)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나쯔메 소우세키가 쓴 하이꾸 安々と海鼠の如き子を生めり(やすやすとなまこのごときこをうめり, 느릿느릿 해삼 같은 새끼를 낳고)가 새겨져 있었다. 아내가 결혼 첫해에 유산한 아픔이 있고 난 뒤 출산을 빌어온 부부의 마음고생 탓에 아내가 무사히 아이를 순산한 것에 안도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난 자기 딸을 해삼 같은 새끼라고 비유한 게 아주 특이한 발상이다.

시오따 관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은 과거 에도(江戶) 시대 사무라이, 즉 무사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지 집 구조가 조금 고풍스런 느낌이었다. 넓은 뜰 한쪽엔 사무라이들이 쓰던 마굿간이 남아 있었다.

이곳 나쯔메 소우세끼 기념관의 시오따(塩田) 관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은 과거 에도(江戶) 시대 사무라이, 즉 무사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정원에 남아 있는 산탕 우물
1899년 5월 31일 태어난 장녀 후데꼬(筆子)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나쯔메 소우세키가 쓴 하이꾸 安々と海鼠の如き子を生めり(やすやすとなまこのごときこをうめり, 느릿느릿 해삼 같은 새끼를 낳고)가 새겨져 있다. 아내가 결혼 첫해에 유산한 아픔이 있고 난 뒤 출산을 빌어온 부부의 마음 고생 탓에 아내가 무사히 아이를 순산한 것에 안도하는 느낌이 든다. 태어난 자기 딸을 해삼 같은 새끼라고 비유한 게 아주 특이한 발상이다.

마굿간과 관련된 일화는 소우세끼의 소박하고도 기이한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이 얘길 듣고 보니 이 마굿간도 나쯔메 문학의 알곡이 영근 또 하나의 공간이었던 듯하다. 소우세끼의 제자로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물리학자 테라따 토라히꼬는 스승의 이 집을 방문한 추억을 자신의 수필 「소우세끼 선생님의 추억」(漱石先生の追憶) 등에 상세히 기록했는데 대략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쿠마모또 재직 시절 소우세끼가 살았던 집들 중에는 과거 무사 저택이었던 곳이 많아 마굿간이 딸려 있는 경우가 있었다면서 그는 나쯔메가 그 마굿간을 서재나 명상의 공간처럼 활용하거나, 그 구조를 관찰하며 ‘비인정(非人情)’의 미학을 논하던 모습을 회고했다고 한다. ‘비인정 미학’이란 소우세끼가 제자들에게 문학적 기교보다는 사물을 바라보는 정직한 눈과 개성을 강조한 데서 비롯된 일종의 문학관이었다. 이건 나의 문학관과 완전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 의미가 무엇이었겠는가? 토라히꼬에게 그 마굿간은 소우세끼라는 문학적 거인이 세속적인 권위(제국대학 교수 등)를 내려놓고, 자연과 사물을 응시하던 상징적인 공간으로 기억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풀베개(草枕)』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태도’의 원형을 보았다고 느낀 것이다. (출처 : 寺田寅彦, 「夏目漱石先生」, 「漱石先生の追憶」 (『寺田寅彦全集』 수록) 토라히꼬는 나쯔메 소우세끼를 만난 것을 인생의 가장 큰 행운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물리학자이면서도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우세끼 덕분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었다.

나쯔메 소우세끼가 이 집에 살고 있었을 때는 아직 소설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던 때였다고 한다. 토우쿄우의 친한 친구 마사오까 시끼(正岡子規, 1867~1902)의 가르침을 받아 하이꾸를 지어서 하이꾸 작가로서 이름이 나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쿠마모또 시대에 나쯔메 소우세끼는 하이꾸도 많이 썼다고 한다. 시오따 관장의 살가운 설명에 의하면, 쿠마모또에 정착한 소우세끼는 자기 친구 마사오까 시끼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교사를 그만두고 문학 삼매경의 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자신의 심경을 적었을 정도로 하이꾸 작시에 심취해 있었다.

그의 하이꾸는 주로 서경적 작품이다. 소우세끼의 문학적 발자취를 하이꾸로 뜯어볼 수 있을 정도다. 토우쿄우 제국대학의 물리학자 나가오까 한따로우(長岡半太郎, 1865~1950) 교수의 제자였던 테라다 토라히꼬는 소우세끼에게 하이꾸를 배우고 심지어 그에게 경도되어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소우세끼는 쿠마모또를 떠나 영국 유학길에 오를 때도 당시의 감회를 표현한 하이꾸를 지었다. “行く春や 熊本去ること 二十五里”(가는 봄이여, 쿠마모또 떠나오길 스물다섯 리. 출처 『夏目漱石句集』) 아무튼 그가 남긴 생애 약 2,500수의 하이꾸 중 약 1,000수가 쿠마모또 시대에 읊은 작품이라고 하니 이 집이 나쯔메 문학의 산실인 셈이다. 이 집에 와서 알게 됐지만 그가 하이꾸를 2,500수나 썼다니 참으로 대단한 거장이다. 나는 지금까지 쓴 하이꾸가 모두 해봤자 겨우 50수도 안 되는데···. 쩝~

더 넓게는 쿠마모또가 소우세키에게 아소산 같은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인간의 예술적 관조가 만나는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그가 훗날 대표적인 소설작품의 배경이 되는 경험을 했으니까. 그 경험은 주로 여행을 통한 것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나쯔메 소우세끼는 아내나 친구와 함께 자주 큐우슈우 각지를 여행했다. 예컨대 1897년 연말부터 토우꾜우대학 동기로 제5고의 동료였던 야마까와 신지로우(山川信次郞)와 함께 타마나(玉名)군 오아마(小天) 마을의 코뗀(小天) 온천 여행을 했고, 1899년 9월에는 아소산도 등정했다.

이 두 여행은 훗날 나쯔메 소우세끼의 대표작 『풀베게(草枕)』, 『이백 십일(二百十日)』로 나타났다. 코뗀 온천 여행은 소설『풀베게 길(草枕の道)』로 정리돼 풀베게 첫머리의 산길을 오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는 그 산길의 모습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고 한다. 그에겐 쿠마모또는 단순한 부임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시오따 기념관장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쿠마모또대학 교내엔 붉은 벽돌 구조의 위엄 있는 서양관 교사와 당시의 교실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쿠마모또시대의 나쯔메 소우세끼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보존돼 있고, 당시 그가 작성한 영어시험 문제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선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가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쿠마모또 대학에 보존돼 있는 그의 자료들로부터 떠오르는 나쯔메 소우세끼상은 오른 팔을 이마에 대고 생각에 잠기는 신경질적인 만년의 이미지와는 다를 것이
다. 학생들을 잘 보살피고 활발하며 너그러운 성품이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아 교원 총대와 조정부 부장을 지낸 모습일 것이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이 조금 둔해진 느낌이었다. 시간을 보니 4시가 넘었다. 기념관이 4시 반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관장은 먼저 실례한다면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다음은 나 혼자 돌아보는 일만 남았다. 이 방, 저 방을 쌀뒤주 뒤지듯이 다니면서 방문을 열어보니 확 눈에 들어오는 방이 있었다. 각국 언어로 번역 출간된 나쯔메 소우세끼의 작품들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랐다. 한국에도 생각보다 많이 번역돼 있다는 걸 알았다.

시오따 관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고택을 나오니 서서히 붉다 못해 푸른 기가 느껴지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일본 근대 문학의 개창자 나쯔메 소우세끼도 땅거미처럼 사라졌다. 정확하게 1916년 12월 9일이었다. 작고 사유는 위궤양. 천재는 단명하는가? 쉰도 되지 않은 49세, 그의 죽음은 이 고택과 이수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죽음은 일본 국민들과 같이 있다. 소우세끼 사후 그의 뇌가 본인의 유언에 따라 기증되어 현재도 토우꾜우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천재 작가의 뇌 구조를 연구하고자 했던 학계의 요청과 소우세끼 자신의 의연하고 개방적인 사고가 결합된 결과였다.

내가 그의 고택을 나서자 소우세끼가 이곳 쿠마모또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풍경이 나의 눈에도 선명하게 다가오는데 그 대목을 묘사하며 남긴 구절로 이 여행기를 끝맺을까 한다.

“쿠마모또는 숲의 도시다. 모든 집이 남김없이 이름난 나무들에 덮여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숲이 있을 뿐이다. 숲속에서 살고, 숲속에서 잠들며, 숲속에서 죽는 것이다.”(熊本は森の都である。あらゆる家が悉く名木に蔽われている。高くより見ればただ森があるのみである。森の中に住んで、森の中に寝て、森の中に死ぬのである。) (夏目漱石, 『熊本の印象』)

아마도 나는 이 아름다운 “숲의 도시”를 다시 찾을 것 같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2024. 11. 12. 22:25.
쿠마모또 스이젠지 컴포트(水前寺コンフォート) 호텔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