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맛본 “조선엿”
나는 엿 먹었다. 한국에서도 좀처럼 먹지 않는 엿을 일본에서 먹었다. 해외 여행 중에 엿을 먹었다니 무슨 일인가?
일본 큐유슈우(九州)의 쿠마모또(熊本) 여행중 해가 비실거리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근대 일본의 대문호 나쯔메 소우세끼(夏目漱石, 1867~1916) 기념관을 보고나서 다음 행선지인 헌책방이 몇 군데 모여 있는 곳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가고자 한 고서점 두 곳이 쿠마모또 시내 상가 안에 위치해 있었다.
목적지를 대략 200m 정도 남겨 놓고 우보로 지나가는데 전방 왼쪽 편으로 나의 눈을 잡아 끄는 게 있었다. “조선엿원조”라는 간판이었다. 일본에서 '조선'이란 말만 들어도 눈이 뜨이는데 '조선 엿'이라니 순간 눈을 의심했다. 오래된 2층 건물의 가게 입구의 간판에 “朝鮮飴元祖 園田屋”이라고 쓰여 있었다. 飴자가 일본어로 “아메”라고 발음되는데 엿을 뜻한다. 그러니 어찌 못 본 듯이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망설일 거 없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봤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엿들이 있었다. 크지 않은 가게에 진열돼 있는 각종 엿들을 보니 분명한 한국엿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과거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거나 아니면 이곳 큐우슈우, 아니 전일본에서 도자예술가 집안으로 이름난 심수관가의 선조들처럼 도공과 여러 가지 기술자들과 함께 이곳 큐우슈우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가지고 온 엿에서 유래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면 제3의 가능성으로 일본에 잡혀온 조선인이 여기서 엿을 새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유가 어쨌든간에 그 엿이 만약 임진왜란 때부터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면 벌써 400년이 더 지났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가게 여주인의 말을 들어 보면 내가 “겐또”(見当, 추측, 어림 잡음, 예상 등을 뜻하는 일본어) 짚은 게 완전히 빗나갔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몇살 많아 보이는 여주인이 하는 말로는 앞에서 내가 추측한 세 가지 가능성 중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완전히 틀린 추측이었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전에 이미 엿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고 했다. 주인도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엹은 웃음을 지었다.
진열장 안에 진열돼 있는 제품들을 보면서 이것저것 물으니까 주인은 친절하게 답해준다. 이곳 가게가 벌써 아즈찌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 있었던 소노다야(園田屋)의 개조인 소노다 다께에몬(園田武衛門)이 만들었던 엿을 파는 아주 오래된 가게(老舗)라고 한다. 믿어야 될지 듣고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이미 엿을 만들어 판지가 500년 가까이 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의 엿이 최초 언제 만들어졌고 그것의 유래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현재로서는 어쩌면 엿은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져서 임진왜란 때 한국에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무튼 이곳 가게의 홍보 “찌라시”에는 대략 이렇게 적혀 있다. 초기에는 “장생엿(長生飴)” 또는 “히고엿(肥後飴)”으로 불렸다고 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일본에선 文禄慶長の役라고 부름)이 일어나자 당시 히고국(肥後国)의 성주였던 가또우 기요마사가 이 엿을 병량목록(兵糧目録)에 넣어 한반도로 출병하였고, 장기간 휴대해도 맛이 손상되지 않아 병사들의 영기(英気)를 돋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이후에는 “조선엿(朝鮮飴)”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얘길 듣고 나는 일본 인터넷 싸이트에 들어가 자료를 검색해보니 왜군들이 출병했을 때 한반도에 존재하던 엿제조법이 도입되었다는 설도 있다는 얘기도 보인다. 내가 그 얘길 했더니 이 여주인은 그 설을 부인했다.
에도(江戶)시대 중기까지는 히고번이 사들이는 어용 물품들로 여겨졌고, 제조법도 관리되어 일반에게는 유통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군량으로서 매우 유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전략물자로 취급되었던 것 같다. 역대 히고번주는 조선엿을 에도막부(幕府)와 조정에 바치는 헌상품, 또는 여러 다이묘들(諸大名)에게 나눠주는 선물(贈答品)로도 사용했다. 메이지(明治)시대에는 유신 3걸 중의 한 사람인 오오꾸보 도시미찌(大久保利通)가 “투명하게 해 풍미 감미(風味甘美)”, “제조의 오래된 숙련의 묘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조선 엿은 원조인 소노다야 외에도 여타 가게에서도 제조와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老舗 소노다야 엿이 특제라고 하는 소리가 많다. 원래는 흑설탕과 현미를 사용한 담갈색의 흑조선 엿이 제조되었으나 현재는 상백당(上白糖)과 정백미(精白米)를 이용한 흰색의 조선엿이 제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전반기에는 30집 이상의 업자들이 취급해서 매상의 총액이 10억 엔에 이른 적도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기에는 2억에서 3억 엔으로 감소하는 바람에 제조업자도 노포 소노다야 등 몇채만 남아 있다. 그 중 이 가게 소노다야의 특제품이 단연 독보적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한 설도 있다. 약 400년 전 소노다 다께에몬이 찹쌀, 물엿, 설탕을 원료로 반죽해 녹말가루를 묻혀 만든 엿과자(飴菓子)였다. 처음에는 '장생엿'이라고 불렸지만 가또우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에 출병했을 때 이걸 휴대하여 진중 식품으로 삼았고, 가또우 기요마사가 보존 기간, 맛, 영양 면에서 일본 최고의 보존식이라고 극찬한 것에서 유래하여 '조선엿'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에도시대 중기까지는 히고번이 매입하여 막부, 조정에 대한 헌상품, 여러 다이묘들에게 보내는 선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제조법도 엄격하게 관리되어 서민들이 입에 넣을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흑설탕과 현미를 사용한 흑조선 엿뿐이었지만 설탕과 쌀의 정백화(精白化)가 진행된 현재는 흰색깔의 조선엿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여주인이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에 대한 답례로 나도 엿을 한 봉지 샀다. 값은 600엔, 비싼 편은 아니었다. 맛도 괜찮았다. 한국 엿에 비해서 단맛이 조금 더 강했다. 내가 해외 여행중인 일본에서 엿을 먹게 된 연유였다. 일단은 나의 겐또가 빗나간 엿이었지만 맛은 다르지 않았다.
2024. 11. 12. 22:08.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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