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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氏) 천년의 기록 : 이천에서 달성까지, 한 가문의 발자취

雲靜, 仰天 2026. 9. 13. 21:25

AI가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21세기 우주개척 시대에 자기 가문을 얘기하고 조상을 자랑하면 자칫 팔불출(八不出)처럼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단순한 가문 자랑과는 다르다. 수백 년,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기 조상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삶이 어떻게 후손들에게 이어졌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곧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동안 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과제 중에 하나인 서씨의 연원 정리를 이번에 손을 댔다. 이천서씨, 달성서씨, 대구서씨 등 서씨 전체의 시조는 신라말 포수의 화살을 맞은 사슴을 숨겨서 살려준 과보로 몇대에 걸쳐 자손이 번성하고 인물이 많이 난 설화의 주인공 서신일이다. 그래서 이천 서씨는 고려조의 4대 명문가였고, 3대조 서희 장군은 서신일의 손자다. 그리고 7대조 서진이 분가해서 달성서씨의 시조가 된다. 달성과 대구서씨는 같은 성씨이고 정승을 조, 부, 손 3대에 걸쳐 배출한 기록이 있다. 3대에 널쳐 정승이 나온 집안은 조선조를 통털어 청송 심씨, 청풍 김씨와 함께 서씨 세 집안 뿐이다. 또 조선시대 정2품 관직으로 홍문관과 예문관과 함께 문형(文衡), 곧 ‘문장의 저울을 잡는다’고 표현할 정도로 국가의 학문과 문장을 대표하는 자리였던 대제학(大提學)을 3대로 내리 배출된 가문은 전주 이씨, 광산 김씨, 연안 이씨, 달성서씨 등 네 가문이 있다. 그런데 3대 연속 정승과 3대 연속 대제학을 낸 가문은 서씨가 유일하다. 게다가 서씨는 요즘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도 가장 많이 낸 가문 중의 하나다.

나는 위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문헌을 통해서 직접 확인했다.

늘 그렇듯이 위정자들이 사는 게 너무 어렵고 바쁘게 만들다 보니 조상과 가문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자고로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수원 없는 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조상과 가문을 알아보고 뿌리를 확인하는 것도 뜻 있는 일이다. 가문의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다른 가문에 대한 우월의식이 아니라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의식하면서 사는 책임의식의 연원이다. 영국 신사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는 건 그들이 제각기 가문의 명예와 긍지를 지키고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씨(徐氏) 천년의 기록 : 이천에서 달성까지, 한 가문의 발자취


    서상문(역사학자, 달성서씨 학유공파 제26세손)

왜 지금 조상의 내력을 기록하는가?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21세기 우주개척 시대에 자기 가문을 얘기하고 조상을 자랑하면 자칫 팔불출(八不出)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가문 자랑과는 다르다. 수백 년,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상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삶이 어떻게 후손들에게 이어졌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곧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현대인이 성씨와 가문을 바라볼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한국의 성씨와 본관은 오랫동안 부계 중심으로 계승되어 왔지만 실제 한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으로부터 유전적 형질을 물려받는다. 다시 그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그 윗대로 올라갈수록 조상의 수는 계속 늘어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어느 서씨도 생물학적으로 오직 서씨만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는 아니다. 수많은 다른 성씨와 가문의 남녀가 혼인으로 연결되어 오늘날의 한 사람을 이루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가문의 피’라기보다 가계와 역사·문화적 전통의 계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따라서 조상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다른 성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남녀 조상들의 삶과 선택이 겹겹이 쌓여 오늘의 자기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이 글은 그러한 관점에서 서씨의 한 후손이자 한 사람의 역사학자로서 서씨 가문의 시조로부터 고려의 문벌가문, 그리고 조선의 명문가에 이르기까지 그 발자취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시조 서신일과 이천에서 시작된 가계 이천서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말 효공왕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서신일(徐神逸)이다. 후대 족보에는 그의 구체적인 생몰연대와 행적이 전하지만, 동시대 기록으로 확인되는 내용은 제한적이므로 생몰연대를 단정하기보다는 신라 말 이천 지역에서 활동한 호족계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학적으로 안전하다.

전승에 따르면, 서신일은 신라 말 국운이 기울자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오늘날 경기도 이천 효양산 일대로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칭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늦은 나이에 서필(徐弼)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서신일의 묘소. 해마다 가을이면 서씨 대종회 주최로 묘제가 열리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 효양산에 있다.

서신일보다 앞선 인물로는 서두라(徐豆羅)가 전해지며 신라 개국공신이자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을 지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후대에 편찬된 족보와 성씨 관련 기록에서 전해지는 것으로, 신라 초기의 실제 관제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서두라를 역사적으로 확인된 인물이라기보다 가문에 전승되어 온 원조 설화의 영역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부모 없는 자식은 없다. 서신일에게도 당연히 부모와 선조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을 확인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계보상 시조가 서신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시조란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최초의 조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후대의 계보가 그로부터 연결된다고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는 다른 많은 한국 성씨에서도 볼 수 있다.

서목과 왕건, 그리고 ‘이천(利川)’의 유래

이천서씨가 고려왕조와 일찍 인연을 맺게 된 데에는 서신일의 조카 서목(徐穆)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서목은 서신일의 아우 서신통의 아들로 전해진다.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위한 남방 정벌 과정에서 당시 황무군(黃武郡) 일대를 지나게 되었는데, 홍수로 강을 건너지 못하던 왕건의 군대를 서목이 인도하여 무사히 건너게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천시는 이 강을 복하천(福河川)으로 설명한다. 왕건이 승리한 뒤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 곧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말에서 ‘利’와 ‘川’을 취하여 이 지역을 이천(利川)이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이천시도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이 전승을 공식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부 문중 전승에서는 왕건이 서목을 이천백(利川伯)에 봉했다고도 한다. 다만 이 봉작 부분은 이천 지명의 유래처럼 비교적 널리 확인되는 기록과는 구분하여, 문중 전승으로 밝혀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천서씨가 “고려 건국에 참여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고려 건국 이후 후삼국 통일의 마지막 과정에서 왕건을 도우며 왕조와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고려는 이미 918년에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이천서씨가 본격적으로 고려 중앙의 명문가로 성장한 것은 그 뒤 서필·서희·서눌의 시대였다.

사슴 설화와 서필·서희·서눌

서신일에게는 유명한 사슴 설화가 전한다.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 그의 집으로 들어오자 서신일이 사슴을 숨겨 살려주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 사슴이 자신의 아들이었다며 은혜에 보답하여 서신일의 자손 가운데 대대로 재상이 나도록 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서신일의 사슴 구명 설화는 필자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직접 배웠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구해 준 뒤 그 은혜로 자손 가운데 재상이 이어졌다는 내용은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보은담이었다.

이천과 달성 서씨의 시조 서신일은 우리가 어릴 때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나뭇꾼과 사슴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또한 서신일이 늦은 나이에 서필을 낳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오늘날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설화가 이후 실제로 서필-서희-서눌로 이어지는 고위관료들의 출현과 결합하면서 가문의 집단 기억과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서필(徐弼)은 고려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에 올라 국정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 서희(徐熙)는 한국사에서 더욱 유명하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서희는 담판을 통해 대규모 전쟁을 피하고,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논리적으로 주장하여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할 수 있는 외교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서희의 동상. 서희는 출중한 외교관이기도 하고 문관으로서 장군의 역할도 해서 한국의 영토를 넓힌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서희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산53-1, 상두산 자락에 있다.

서희의 아들 서눌(徐訥)은 문하시중까지 올랐다. 서눌의 딸은 고려 현종의 비인 원목왕후(元穆王后)가 되었다. 이로써 이천서씨는 단순한 고위관료 가문을 넘어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외척가문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결국 사슴을 살려준 은혜로 “대대로 재상이 나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 실제 여러 대에 걸쳐 고위 재상이 배출된 뒤 그 가문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설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려의 대표적 문벌가문으로 성장

이천서씨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 등과 함께 고려의 유력 문벌가문으로 거론된다. 다만 ‘고려 4대 문벌가문’이라는 표현은 당시 국가가 공식적으로 정한 서열이나 제도가 아니라 후대에 붙여진 평가라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천서씨가 고려 개국공신 가문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유력 호족세력에서 중앙정치의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서목을 통한 왕건과의 인연이 있었지만, 가문의 명문화에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은 서필·서희·서눌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관직·혼인·학문적 기반이었다.

특히 서필-서희-서눌 3대에 걸쳐 국가의 최고위 관직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전기 이 가문의 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여러 고위관료와 재상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이천서씨는 고려의 대표적 문벌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천에서 달성으로: 서진과 달성서씨의 분관

이천서씨 계통에서는 훗날 달성을 관향으로 삼는 새로운 계통이 형성되었다. 달성서씨는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와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서진(徐晉)을 시조로 받든다.

달성 서씨 시조인 서진의 묘소(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 인근의 문양리 산 19-3에 있다.)

서신일은 이천서씨 계통의 시조이며, 달성서씨 문중에서는 서진을 이천서씨에서 분적한 후손으로 전한다. 다만 서신일에서 서진까지의 세부 계대에는 후대 족보들 사이에서도 고증상의 공백이 있으므로 “몇 세손에서 정확히 분파되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서신일계에서 분관했다고 전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신중하다.

현재 널리 소개되는 분류에서는 이천서씨를 14개 주요 대파로 나누기도 한다.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원숙공파(元肅公派)·문한공파(文翰公派)·공도공파(恭度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전서공파(典書公派)·예빈공파(禮賓公派)·부령공파(副令公派)·참봉공파(參奉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절효공파(節孝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창사공파(倉使公派)·교리공파(校理公派)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파의 구분과 계대에는 족보와 문중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각 대파 아래 다시 여러 소파와 소문중이 존재한다.

달성서씨는 문중에서 현감공파(縣監公派)·학유공파(學諭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백진사공파(伯進士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계진사공파(季進士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종사랑공파(從仕郎公派) 등 9개 파종회로 운영하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학유공파의 족보

여기에서 대구서씨(大丘徐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의 관계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두 본관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달성서씨 문중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두 계통은 선계(先系)를 같이하며, 달성에 남은 계통을 향파(鄕派), 서울로 올라가 벼슬한 계통을 경파(京派)라 하여 각각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로 족보를 달리 편찬해 왔다. 1702년 간행된 『대구서씨세보』도 달성서씨와 대구서씨의 유래가 같음을 전제로 달성서씨를 별책 합보 형태로 수록하였다.

이후 경파는 1736년 대구서씨 관향의 족보를 따로 간행했고, 향파는 1755년 『달성서씨세보』를 편찬하면서 족보가 분리되었다. 문중은 오늘날에도 “향파(달성서씨)와 경파(대구서씨)는 족보는 분리되어 있으나 선계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徐氏淵源誌』(徐鍾慶 編, 1991년)는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를 각각 별도 본관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대구서씨가 서신일의 후손으로 이천서씨에서 분적되었다는 계보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상고하기 어렵다고 유보한다. 따라서 문중 전승과 족보상으로는 선계가 같은 향파·경파 관계로 인식되어 왔지만, 역사학적으로는 세부 계대의 연결에 아직 고증상의 공백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신중하다.

참고로 필자가 속한 달성서씨 학유공파의 종가는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가천리에 있다. 필자도 몇 년 전 선친이 살아 계셨을 때 부친과 함께 가천을 찾아가 종가 어른들을 만나 뵌 적이 있다. 그때 종가에는 오래전부터 몇 대에 걸쳐 내려오던 토지문서와 족보 등 수많은 전적이 있었으나 어느 날 도둑이 들어 모두 훔쳐 갔다는 종가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귀중한 사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워 혀를 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조선의 명문가로 다시 성장

대구·달성서씨는 조선시대 들어 대표적인 문신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문중 통계에서는 문과 급제자 140명 안팎을 비롯하여 다수의 정승·대제학·판서·관찰사·한성부판윤과 왕비까지 배출한 것으로 정리한다. 다만 관직자 숫자는 집계의 범위와 대구·달성 본관 표기 방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숫자는 출처의 기준을 함께 밝혀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서씨 가문이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연속적으로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명문가 가운데 청송 심씨와 청풍 김씨 등에서는 3대 연속 정승이 배출된 사례가 거론되고, 전주 이씨·광산 김씨·연안 이씨 등에서는 3대 연속 대제학이 배출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성서씨 문중에서는 서종태-서명균-서지수로 이어지는 3대 정승과 서유신-서영보-서기순으로 이어지는 3대 대제학을 특히 강조한다. 문중 자료도 이를 대구·달성서씨의 대표적인 문벌 전통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대구·달성 서씨는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모두 배출한 유일한 가문’이다. 이 표현은 한국의 다른 모든 가문의 계보와 관직을 동일한 기준으로 대조해야 완전히 확정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로는 서씨가 유일하다. 적어도 정승가와 문형가의 전통이 한 문중 계통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대제학, 조선 문관 최고의 명예

대제학(大提學)은 홍문관과 예문관 등에 둔 정2품 관직이었다. 문형(文衡), 즉 ‘문장의 저울을 잡는다’고 할 만큼 국가의 학문과 문장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일부에선 대제학을 종신직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대제학은 다른 고위 관직에 있는 문신이 겸임하는 자리였으며, 단순히 품계가 높은 벼슬이라는 의미보다 당대 최고의 학문과 문장력을 인정받은 문신에게 주어지는 명예라는 데 의미가 컸다. 오늘날 특정 직책 하나와 정확히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국가 최고 수준의 학술기관 책임자와 국가 문한의 총책임자를 함께 맡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성부 최고책임자 35명, 94차례 역임

대구·달성서씨의 번영은 정승과 대제학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책임진 한성부 최고책임자에서도 매우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은 1469년 예종 때 한성부 직제가 개편되면서 설치된 정2품 관직이었다. 한성부는 중앙관서인 동시에 수도를 직접 관할하는 행정기관의 성격을 지녔고, 도성의 호적·토지·치안·소송 등 수도행정을 폭넓게 담당하였다. 따라서 한성부판윤을 오늘날 서울특별시장에 비유할 수는 있지만, 당시에는 사법기능까지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권한은 훨씬 복합적이었다.

이번에 내가 이 작업을 하면서 확인한 최종인 편저 『한성판윤』(서울: 도서출판 보청, 2022년)은 초대 성석린에서 제2209대 장현석에 이르기까지 역대 한성부 최고책임자를 연속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의 성씨별 색인을 보면 서씨의 비중이 특히 눈에 띈다.

이천서씨에서는 서선(徐選)이 제56·59대, 서지(徐祉)가 제208·223대로 기록되어 있어 두 사람이 모두 네 차례 최고책임자직을 맡은 것으로 집계된다.

상기『한성판윤』은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를 별개의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구서씨에는 서거정(徐居正), 서성(徐渻), 서문중(徐文重), 서종태(徐宗泰), 서명신(徐命臣), 서매수(徐邁修), 서능보(徐能輔), 서기순(徐箕淳), 서영순(徐英淳), 서염순(徐念淳), 서대순(徐戴淳), 서유훈(徐有薰), 서형순(徐衡淳), 서원순(徐元淳), 서상정(徐相鼎), 서승보(徐承輔) 등 16명이 올라 있으며 모두 41차례 재임한 것으로 집계된다.

달성서씨에는 서문유(徐文裕), 서명균(徐命均), 서종급(徐宗伋), 서종옥(徐宗玉), 서명빈(徐命彬), 서명응(徐命膺), 서호수(徐浩修), 서유린(徐有隣), 서유녕(徐有寧), 서유방(徐有防), 서유대(徐有大), 서경보(徐耕輔), 서희순(徐憙淳), 서좌보(徐左輔), 서헌순(徐憲淳), 서상우(徐相雨), 서정순(徐正淳) 등 17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49차례 재임하였다.

따라서 『한성판윤』의 분류상 대구서씨와 달성서씨 두 계통을 합산하면 33명이 90차례 한성부 최고책임자직을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이천서씨 2명의 4차례를 더하면 서신일계로 전승되는 이천·대구·달성 세 서씨 본관에서는 모두 35명이 94차례 재임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 숫자의 의미는 전체 규모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성판윤』이 초대부터 제2209대까지 역대 한성부 최고책임자를 연속적으로 번호를 매겨 정리한 체계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대구·달성서씨의 90회는 약 4.1%, 이천서씨까지 포함한 94회는 약 4.3%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전체 재임 기록 약 23~24회 가운데 한 차례꼴에 해당한다.

서신일계로 전승되는 세 서씨 본관의 합산 비율이 4%를 넘는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성씨와 문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비율이 아니다. 물론 각 성씨의 인구와 중앙관료 진출 기반이 동일하지 않았으므로 단순히 성씨 수로 나누어 평균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수도 행정 최고책임자의 전체 재임 기록 가운데 하나의 계보권으로 전승되는 세 서씨 본관이 4%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조선 관료사회에서 이 계통이 차지했던 위상을 보여주는 상당히 두드러진 수치라고 할 수 있다.

『한성판윤』의 이천·대구·달성서씨 성씨별 색인과 여타 한성판윤을 많이 배출한 주요 가문들

특히 주목할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차례씩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 여러 번 다시 기용되었다는 점이다. 서명빈·서유린·서헌순·서대순·서유훈 등은 각각 여섯 차례에 걸쳐 재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인사에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관직 순환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반복적으로 수도 행정의 책임자로 기용되었다는 것은 고위관료로서 경험과 신임을 축적했음을 보여주는 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대제학이 국가의 학문과 문장을 대표하는 자리였다면 한성부의 최고책임자는 수도 한양의 실제 행정과 질서를 담당하는 자리였다. 서씨 계통에서 정승·대제학뿐만 아니라 수도 행정의 책임자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수 배출되었다는 것은 이들의 조선 관료사회에서의 지속적인 진출을 보여준다.

서거정, 조선의 문운을 이끈 거목

조선 전기 대구서씨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먼저 꼽을 사람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다. 서거정은 세종에서 성종까지 여섯 왕을 섬기며 45년 동안 조정에서 활동했고 23년 동안 문형을 관장하였다. 또한 23차례 과거시험을 맡아 많은 인재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묘지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 등의 국가적 편찬사업에 참여했고, 『동인시화』·『필원잡기』 등도 남겼다. 조선 전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대표적인 관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서거정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높은 관직을 많이 지냈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조선 초기 국가가 자신의 역사와 문학, 지리와 제도를 정리하고 문화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인 관료의 전형이었다.

약봉 서성과 왕실의 혼인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약봉(藥峯) 서성(徐渻)이다. 약봉의 후손들은 조선 중·후기 대구·달성서씨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서성의 아들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하여 왕실의 부마가 되었다. 이로써 가문은 왕실과 직접적인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대구·달성서씨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을 왕실 혼인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조선에서 고위 문신이 되려면 과거, 관직 경험, 학문과 문장력, 정치적 신임 등이 필요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정승·대제학·판윤 등이 반복해서 배출됐다는 사실은 혼맥뿐만 아니라 가학(家學), 교육, 관료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가 세대를 거치며 축적되었음을 보여준다.

3대 정승과 학문의 계승

약봉 서성의 후손 가운데서는 3대에 걸쳐 정승이 이어졌다. 서종태가 영의정, 서명균이 좌의정, 서지수가 영의정을 지냈다.

또 다른 계통에서는 대제학과 학자가 이어졌다. 서종옥 계통에서는 서명응(徐命膺), 서호수(徐浩修), 서유구(徐有榘)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조선 후기 농학과 실용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방대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집대성되었다. 농업뿐만 아니라 음식·주거·원예·의학·공예·문화생활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과 경제를 폭넓게 다룬 백과전서적 저술이다.
정식 서명은 『임원경제지』이며,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또는 『임원경제십육지』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임원경제십육지’가 잘못된 명칭인 것은 아니며, 『임원경제지』의 이칭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면 된다.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와 서종제

대구·달성 계통에서는 왕비도 나왔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이다. 본관은 대구이며 아버지는 서종제(徐宗悌, 1656~1719)였다.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의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이 되었고, 1721년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면서 세제빈이 되었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소생은 없었다.

여기서 정성왕후의 아버지 서종제의 생애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1656년에 태어나 1719년에 사망했으며 사릉참봉과 신천군수 등을 지냈다. 영조 즉위 뒤 우의정에 추증되고 달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따라서 흔히 전해지는 “연잉군이 경종에게 죽임을 당할지 몰라 권문세가들이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고, 배경이 없던 서종제가 딸을 시집보냈다”는 식의 설명은 시간 순서상 맞지 않는다. 두 사람의 혼인은 1704년 숙종 때 이루어졌고 경종의 즉위는 1720년이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왕비의 친정이라고 해서 곧바로 막강한 외척권력을 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종제 자신은 사위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우의정과 달성부원군의 지위도 사후에 추증된 것이었다. 이는 정성왕후를 배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대구·달성서씨의 번영 전체를 외척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영조와 정성왕후의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후대의 해석이 있기 때문에 “사이가 나빴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정치적·가정적으로 일정한 긴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표현하는 편이 신중하다. 정성왕후에게 친자식은 없었지만 사도세자를 보살피는 위치에 있었고, 영조와 세자 사이의 극심한 갈등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는 점도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가문의 명예와 역사적 책임

경기도 이천에서 시작된 서신일계 서씨는 고려에서는 서필·서희·서눌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대구·달성으로 이어지는 계통에서는 조선시대 수많은 정승·대제학·판서·관찰사·한성부 부윤 등 수도의 최고책임자와 왕비가 배출되었다.

특히 『한성판윤』에서 확인되는 35명, 94차례라는 기록은 서신일계로 전승되는 이천·대구·달성 세 본관의 관료적 지속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두 명의 걸출한 인물이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인물이 중앙의 핵심 관직으로 진출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을 “우리 집안의 피가 다른 집안보다 뛰어나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도 맞지 않는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씨 남성들만이 서씨 가문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과 혼인한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그 여성들은 김씨·이씨·박씨·최씨·정씨·윤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가문에서 왔다. 그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서씨 후손도 존재할 수 없다.

더욱이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 사람의 혈연적 조상은 급격히 늘어난다. 실제 역사에서는 동일한 조상이 여러 갈래에서 반복해 나타나는 이른바 계보 중복 때문에 단순히 2의 배수로 무한정 늘어나지는 않지만, 어느 한 사람의 유전적·혈연적 뿌리가 단일한 성씨에 한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씨의 피’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고립된 순수혈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문과 수많은 남녀 조상들의 만남 위에 하나의 성씨와 본관을 중심으로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전통이 계승되어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생각하면 족보와 가문의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도 달라진다. 조상이 높은 벼슬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고 무엇을 남겼으며 그 삶에서 오늘의 후손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조상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서희에게서는 전쟁을 피하면서도 국익을 지켜낸 외교적 지혜를, 서거정에게서는 학문과 문화에 대한 헌신을, 수많은 수도 행정 책임자들에게서는 국가행정을 담당했던 책임을, 서유구에게서는 백성들의 실제 생활을 개선하려 했던 실용적 학문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로운 완전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조상의 공적은 공적대로 기억하고 잘못과 한계가 있다면 그것 역시 사실대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가문의 역사가 신화나 자기자랑이 아니라 역사가 된다. 나 역시 역사학자로서 서신일계 서씨 문중을 무조건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자료에 근거하여 한 가문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이 글을 썼다.

자고이래 날 때부터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샘 없는 물이 없다. 조상의 뿌리를 아는 것은 자긍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긍심은 다른 성씨와 가문을 낮추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의 명예나 가문에 누를 끼쳐선 안 된다는 식으로 자신에게 더 엄격한 책임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명문가는 높은 벼슬을 많이 지낸 조상을 둔 집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조상이 남긴 이름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삶을 후손들이 계속 살아갈 때 비로소 명문가의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다.

2026. 9. 14. 00:38.
고향 포항집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