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넘어, 현해탄을 넘어, 60년 만에 다시 만난 스승과 제자들
서상문(시인, 화가, 역사학자)
지난 10월 8일, 차윤 선생으로부터 한 편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60여 년 전의 은사를 찾아 나섰던 세 제자의 이야기였다. 그 제자들은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일본인 스승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사람의 얼굴에 주름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희게 물들였지만, 어린 가슴에 심어 놓은 존경과 사랑의 씨앗만은 시들게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제자들은 드넓은 일본 땅에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옛 스승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그 기나긴 그리움의 끝에서 스승을 다시 만났다.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린 것은 비 내리는 나가사끼(長崎)역에서 우산 세 개를 안고 제자들을 기다리던 노스승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흘러 제자들은 늙었어도 스승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열 살 어린아이들로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날 밤, 늙은 제자들이 잠든 줄 알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고쳐 덮어 주었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스승에게 제자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사랑으로 품어야 할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깊은 울림이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일본인 스승이 일흔이 넘은 한국인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일제 식민지 시절 자신이 행할 수밖에 없었던 일제의 교육을 용서해 달라고 거듭 사죄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데 국경이 무슨 장애가 되겠는가? 60년 전, 어린 제자들 앞에서 칠판에 ‘眞心(마고꼬로)’이라는 두 글자를 써 놓고 진실한 마음의 소중함을 가르쳤던 스승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자신이 가르친 그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세월은 그의 머리카락을 희게 물들였지만, 그가 가르쳤던 진심만은 조금도 빛바래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한일관계의 미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진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 과오를 외면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사죄할 것은 사죄하며,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 가는 것 말이다. 정치적 수사나 외교적 계산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역사의 응어리도 인간의 진실한 마음과 눈물 앞에서는 조금씩 녹아내릴 수 있음을 이 이야기는 과장 없이 진실되게 보여 주고 있다.
차윤 선생께서 내게 주신 저서 『세계 속의 한국, 한국인』(서울: 북랩, 2020년)에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더욱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세 제자와의 재회가 노스승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삶의 활력을 안겨 주었는지, 그리고 이듬해 그 은사가 다시 한국 땅을 밟아 옛 제자들과 모교를 찾게 된 사연까지 읽고 나니, 인간의 따뜻한 정이 때로는 세월과 국경마저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을 잊고, 은혜를 잊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마저 잊고 살아간다. 경쟁과 이해관계에 떠밀려 인간다운 온기가 점점 메말라 가는 시대이기에 이 이야기는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 스승을 잊지 않은 제자들의 마음도 숭고하지만, 제자들을 사랑하고 자신의 과오 앞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일 줄 알았던 스승의 마음 역시 그에 못지않게 숭고하다.
나는 이 이야기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미움보다 이해가, 오만보다 겸허함이, 냉혹한 정치적 계산보다 인간의 양심과 진심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함께 되새겼으면 한다.
세월은 흘러가도 그리움과 진심은 늙지 않는다. 사람은 떠나도 그가 남긴 사랑은 누군가의 가슴에서 오래도록 살아 숨 쉰다. 좋은 스승이란 바로 그런 사람이며, 아름다운 인간관계란 그렇게 세월을 넘어 다시 꽃피는 것이 아닐까?
적지 않은 고전과 문학작품에서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감동을 읽어 왔지만, 나는 이 실화가 그 어느 작품 못지않게 아름답고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문득 그 후 노스승과 세 제자는 어떻게 살아가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마음 한구석에 피어올랐다. 세월의 저편으로 멀어져 간 그분들의 삶이 못내 궁금하고, 그 아름다운 인연의 마지막 이야기가 몹시도 듣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 혼자 가슴에 묻어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이야기여서 여기에 소개한다. 더 이상의 설명은 오히려 감동을 덜어 낼 것 같으니 이제 차윤 선생의 이야기 자체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란다.ㅡ편자 주

잊지 못할 은사를 찾아서 1
‘독도’니 ‘야스쿠니 신사참배’니 해서 온 나라가 반일 감정으로 들끓고 있는 시기에 이런 이야기해서 본전이나 찾을 수 있을까 싶지만,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교육자다운 교육자를 만나기가 너무 어렵기에, 이러한 황폐화된 교육 환경 속에서 앞으로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 학생들,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진다. 여기서 비록 일본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참 ‘교육자다운 교육자’ 한 분을 소개함으로써 참다운 교육이란 때로는 시간과 공간, 국경을 초월하는 놀라운 힘을 창출해 낸다는 사실을 증거하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일제시대였고 당시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란 기치하에 한반도의 일본화(日本化)에 몰입하고 있을 때였다. 강제로 일본식 이름으로 성씨 개명을 해야 했었고 물론 학교에서 한국말 사용은 일체 허락되지 않았었다. 조회 시간에는 일본 천황이 있는 동방을 향하여 절을 했으며 국경일이나 국가적인 대사가 있을 때에는 일본의 건국 신을 모셨다는 신사에 가서 세 번 손뼉 치고 세 번 절하는 참배를 어김없이 해야 했었다.
이야기가 좀 곁으로 빠져 버렸지만, 이 당시 우리 반에 가와구치 사도시(川口恵)라는 담임 선생님이 부임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어깨가 조금 앞으로 굽었고 얼굴은 창백했으나 독수리 같은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2학년 때까지 여자 담임 밑에 있었던 우리는 이 차디찬 눈을 가진 남자 선생님 앞에서 움짝달싹 못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거나 보여 준 교육의 내용을 여기서 다 말할 순 없다. 또 그렇게 많은 말이나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거짓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엄함이 있었으며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깊은 관심과 표정에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랑이 있었으며, 상과 벌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체벌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급장(지금의 반장 또는 회장)이었던 필자도 내 개인의 잘못보다는 반 전체의 게으름이나 통솔 부족으로 수없이 매를 맞았다. 그러나 한 번도 매맞고 원망을 하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매맞고 눈물을 흘린 때가 있었다. 당시 기독교 목사였던 아버지께서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계셨을 때였다. 일본 역사 시간에 일본의 성전(聖典)에 해당하는 책 고지기(古事記)에 대해서 선생님이 엄숙하게 말하고 있는데 ‘고지기’가 우리 말의 ‘거지’에 해당하므로 이것이 못 견디게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그 때문에 눈에서 불이 나올 듯 세차게 뺨을 몇 대 맞았다. 그때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선생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사의 아들’인 내가 미워서 더 때린 게 아닌가 싶어서 울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많은 시간을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 일본이 펼치고 있는 전쟁에 대한 합리화 등에 교육의 초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가와구치 선생님은 늘 흑판에 ‘마고코로(真心)’란 두 글자를 크게 써 놓고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며, 무슨 일이든 정직하고, 성실하며, 정도를 걸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선생님이 왜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일본의 전쟁과 ‘황국신민(皇國臣民)’에 대한 이야기하기를 꺼려 했는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우리 담임으로 오기 직전까지 군인으로 만주 지역에서 복무했었으며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고 군대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폐병까지 얻어 결국 제대하게 되었고 그 후 교사 자격을 얻어 김해 제일공립소학교에 부임하게 된 경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선생님다운 모습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한결같이 준엄한 표정과 몸가짐을 우리에게 보이다가 음악 시간만 되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감성적이고 부드러워졌던 점이었다. 매력적인 바리톤 음성에 비브라토는 없으나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가르쳤다. 때로는 노래를 부르던 중 목소리가 떨리면서 뭔가를 그리워하며 꿈을 꾸듯 노래 속에 스스로 파묻혀 버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어린 우리의 가슴에도 그 느낌이 전달됐다. 황홀한 정서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가르친 노래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가 우리를 담임했던 1년 동안에 일어났던 교육자 상(像)이고 그 영향력이었으며, 또한 이것들이 10세밖에 안 된 초등학교 3학년 생이 받은 감상이고 그로 인해 남은 기억이라는 점에 내 자신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와구치 선생님 밑에서 교육받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서울에만 둘이 있어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한다. 한방병원장을 하는 임 군과 음악 선교를 위해 일본이나 오키나와에 자주 드나드는 유 군이다. 모두 지금 칠십이 훨씬 넘은 나이다. 이날도 셋이 모여 앉아 옛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 가와구치 선생님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때가 때라서 그런지 이날 따라 모두들 그 선생님이 몹시 보고 싶다고 했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 몰라도 선생님께서 살아만 계시다면 한 번 찾아가 볼 만하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주소도 모르는데 일본 천지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나 다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일본의 북부인지 중부인지 또는 남부인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토론 끝에 그 선생님의 어법상 남쪽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마침 유 군이 동경에 간다기에 가서 틈나는 대로 여기저기 힘껏 알아보기로 했다. 효과적으로 찾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것이 현이 있는데 현마다 교육위원회가 있을 것이라는 것에 착안했다. 가와구치 선생님의 인격이나 인품이면 일본 교육계에서도 틀림없이 존경받는 교육자가 되었을 것이므로 50여 개 되는 현의 교육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보면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생존 여부부터 알아야 할 것이기에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우리가 10살 때 28살 정도 되어 보였으니 지금 살아 계시다면 86세가량 되셨을 것이고 일본인의 평균 수명으로 봐선 틀림없이 살아계실 것으로 결론 지었다.
유 군이 일본에 도착해서 1개월쯤 되는 날 저녁 해가 떨어질 무렵 유 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흥분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찾았냐고 물었더니 우리의 접근 방법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현 교육위원회마다 전화를 걸어 선생님의 이름과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에 경상남도 김해 제일공립소학교에서 근무한 경력, 또 우리가 그의 제자이며 그 선생님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화받는 직원에게 공히 전달하고 연락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결국 전화를 받은 공무원이 그 내용으로 그 현에 속한 시, 군, 면 교육위원회에 일일이 전화를 했고 한 달 만에 나가사키현 나가사키 교육위원회로부터 가와구치 선생님이 지금 나가사키시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했노라고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찾아주었다는 것이다. 그 공무원의 말에 의하면 가와구치 선생님은,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한 이래 20여 개의 초, 중, 고등학교의 교감, 교장을 역임하면서 일본 교육계에서 크게 존경받는 고명한 교육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은퇴 당시에는 고위 장학사로 추대되어 혁혁한 업적을 남겼고, 국가 최고의 포상을 여러 번 받은 뒤 명예롭게 은퇴한 분이라고 했다. 그 공무원은 찾을 수 있게 되어 자기들도 더없이 기쁘고 그 선생님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노력에 크게 감명을 받았노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셋 중에 일본어 실력이 제일 낮다는 이유로 내가 대표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나의 다소 긴 소개와 전화하게 된 동기, 그간의 경과를 들은 선생님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시더니 점점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놀라움과 기쁨과 감사의 말을 하고 또 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거의 하루 건너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개개인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 우리 셋이 선생님을 찾아가기 위해 스케줄을 맞췄다. 60여 년 전 우리의 담임이셨던 선생님을 만나러 당시 10세였던 초등학생 3명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그것도 국경을 넘어 그리워하던 선생님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된다.
2006년 8월 18일
잊지 못할 은사를 찾아 2
1997년 11월 28일 나와 임 원장은 동경에서 오는 유 선교사와 후쿠오카에서 만나 하카다센 기차를 타고 나가사키로 향했다. 나가사키까지는 약 두 시간이 걸렸다. 그 두 시간은 우리에겐 꿈 같은 시간이었다. 드디어 나가사키역에 도착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원자탄이 떨어진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근자에 와서는 「비오는 나가사키」라는 일본 유행가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비가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우산 파는 곳이 어디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들뜬 마음과 사람들 흐름에 밀려 그냥 역 출구로 나왔다.
선생님을 제일 먼저 본 것은 나였다. 역 출구 바로 왼쪽 처마 끝에 종이 우산 세 개를 안고 꾸부정한 허리의 노인이 서 있는데 옛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쪽을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눈은 옛날 그 독수리 같은 눈빛이 틀림이 없었다. 우산 세 개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아도 우리를 마중 나온 가와구치 선생님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우리들이 한국에서 찾아온 60여 년 전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인지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가와구치 선생님이시죠?” 그는 깍듯한 일본어 경어로 “나가사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며 우리 셋을 향하여 깊은 절을 했다. 우리는 일시 당황했다. 비록 우리도 나이는 들었지만 옛날에는 제자였으니 말씀도 편하게 하시고 이러지 말아 달라고 선생님의 몸을 일으키면서 간청했다.
처음엔 서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좀 서먹서먹했지만 택시를 타고 선생님 댁으로 가면서 말문이 열리고, 선생님과 우리 셋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따뜻한 사제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요구해 온 것은 우리가 미리 해 둔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자기 집에 방이 많으니 집에 와서 묵어 달라는 것이었다. 선생님께 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지만 선생님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집은 크고 넓었다. 10명이라도 충분히 잘 수 있을 만큼 2층 넓은 방(일본말로는 ‘야시키’라고 한다)에 짐을 풀고 목욕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놀란 것은 일본 각지에서 아들, 딸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우리를 만나 보려고 다 모였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부엌에서 부산히 음식을 장만하는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식 대연회가 열렸다. 호기심에 가득 찬 가족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의 쏟아지는 눈빛을 받으면서 선생님의 환영사, 그리고 우리의 답사, 각자의 소개를 한 후 선생님에 대한 우리의 추억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와구치 선생님은 자기가 뭘 했다고 이렇게 이국만리에서 찾아와주어서 이렇게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 모르겠다 하시면서 시종 눈물을 닦았다.
동네 아주머니 5명과 선생님의 사모님(옥쌍)이 정장을 하고 나와 우리를 환영하는 일본 전통 춤을 추었다. 밥상이 들어오는데, 내 일평생 이런 화려한 일본식 진수성찬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생각하다가 유 군의 아이디어로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 배웠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곡, 두 곡 부르는 가운데 자꾸만 어릴 때의 기억이 아련히 되살아나서 여러 곡을 신나게 불렀고 나중에는 선생님도, 선생님의 가족들도, 아주머니들도 따라 불렀다. 60여 년 전에 배운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모두들 놀랐다. 우리는 선생님의 가르침과 영향력이 그만큼 컸었다고 답했다.
밤이 늦도록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선생님의 사모님과 동경에서 온 가족들은 물러가고 선생님과 우리 셋만 남아서 선생님이 간직하고 있던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옛날을 추억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기가 담임으로 있을 때 일제 식민지 교육 체제하에서 불가피하게 행할 수밖에 없었던 교육 방법이나 내용이 있었다면서 용서해 달라고 몇 번씩이나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정중한 모습에 당황하는 한편 우리 앞에서 무릎을 꿇는 그 진지함에 또 한 번 놀랐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때 우리에게 가르쳤던 그 마고코로(真心)로 이 선생님은 자기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밤이 늦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우리 셋 다 너무 흥분했던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 사다리같이 가파른 계단을 누가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했더니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깨어 있는 걸 알면 혹 우리가 잠자리가 불편해서 못 자는 줄 알고 걱정하실까 봐 모두가 자는 척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우리가 깰까 조심조심 엉금엉금 다가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이불을 다시 고쳐 덮어 주고는 다시 조용히 나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그 밤의 선생님의 그 모습, 그 마음을 생전 잊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가사키 시내 관광을 나섰다. 우리끼리 시내 관광버스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선생님은 굳이 자기가 안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셨다. 허리가 15도쯤 앞으로 굽은 선생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망설였지만 선생님의 확고한 결단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 우리 모두에게 나가사키시는 처음 오는 곳이라서 시간적 여유가 많거나 우리끼리라면 이곳저곳 다 다니면서 구경도 하겠지만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유명한 곳 몇 군데만 보고 돌아가자고 의견을 모은 뒤 선생님을 설득하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우리의 의도와 정반대로 하루 종일 선생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철두철미한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 했고 결국에는 우리 셋 다 모두 지쳐서 아직도 쌩쌩하게 다니시는 선생님의 걸음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질 정도가 됐다. 90세가 다 되어가는 노인인데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 웬만한 곳은 모두 구경했다. 언덕길도 왜 그리 많은지···. 더구나 보슬비를 계속 맞으면서 걷다 보니 구경이 구경이 아니라 나중엔 강행군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앞장서서 속보로 걸어가시는 노선생님을 보면서 우리는 옛 그 시절의 선생님의 그 활기차고 꿋꿋한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를 타면 선생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60여 년 전 내가 담임했던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 국경을 넘어 왔으니 내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하시며 자랑하시고 좋아하시는데 우리도 얼마나 보람되고 기뻤던지···.
택시 기사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거푸 감탄사를 발한다. 목적지에 도달해서 우리를 내려준 뒤 그 운전 기사가 갑자기 우리를 향해서 차렷자세를 취하더니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존경하는 뜻에서 절을 하니 받아주세요” 하고는 깊은 절을 한 다음 자기의 성의 표시라면서 상당한 액수였던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질 않는가···. 세상에.
똑같은 일이 우리가 갔던 레스토랑에서도 벌어졌다. 관광객이 많이 들른다는 큰 식당이었는데 여기서는 선생님이 같은 내용으로 아예 공개적으로 연설을 해 버렸다. 거기서 우리는 감동을 받은 식당 주인의 호의로 공짜로 식사 대접을 받고 관광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모두들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고 축하해 주었다. 선생님께서 식당에서 하신 공개 연설 중에, 자기가 일본에 귀국해서 그동안 20여 개 되는 학교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일본 학생들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가르쳐 왔지만, 오늘날까지 자기를 찾아온 졸업생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일본제국주의하에서 강제적인 교육을 했었던 자기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대신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그 멀리서 찾아준 이 ‘훌륭한 어르신들’을 여러분들께 소개한다고 하시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일본의 장래에 대해서 새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하셨다.
은사와의 환상적인 2박 3일, 그걸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유 군은 동경으로 돌아갔고 임 군과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노선생님 부부를 한국으로 초대하자고 마음먹었다.
가와구치 선생님 내외의 한국 방문은 이듬해인 1998년 봄에 이루어졌다. 조금 무리가 될 것 같아서 사모님께 타진했더니 우리가 선생님을 방문한 후 선생님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으며 신기하게도 15도쯤 앞으로 굽어 있던 선생님의 허리가 약 5도 가량 퍼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기쁨과 보람이 넘치면 병도, 늙는 것도 겁이 나서 비켜간다는 어느 성현의 말씀이 진실임을 우리 가와구치 선생님의 경우에서 보는 것 같다.
서울에 오신 선생님 내외분은 나의 여식이 근무하는 고급 호텔에 묵으셨고 내 가족의 안내를 받으면서 서울의 명소를 두루두루 구경도 하셨다. 마지막 날에는 경주를 거쳐 50여 년 전 우리들을 담임했던 모교(지금의 김해 동광초등학교)를 방문하여 교장의 환영을 받은 후 아직도 시골에 살아 남아 있는 필자의 동창생들과 반가이 만나셨다. 이젠 거의 다 잊어버린 일본말로 떠듬떠듬하면서도 그 옛날의 스승과 제자의 따뜻한 정과 그리움의 회포를 풀었다. 그다음 날 선생님 내외는 못내 아쉬워하는 우리들을 향해 몇 번씩이나 절을 하며 나가사키로 되돌아가셨다.
생각하면 참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첫째로, 우리의 가슴속(실상은 초등학교 3학년 어린 학생의 가슴속)에 6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이었다. 참다운 교육자의 이미지이다. 그 다음엔 아마도 우리 셋의 부단한 노력도 한몫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보다는 유 군의 전화를 받고 우리의 애절함을 공감하면서 근 한 달 동안 선생님을 찾기 위해 산하기관에 몇십 번, 몇백 번 전화했을 지 모를 현(縣) 교육위원회 공무원의 정성 덕이 크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 일이 가능했으랴. 돈 되는 일도 아니고, 특별히 출세하는 길도 아닐 텐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나라의 한 늙은이의 밑도 끝도 없는 부탁을 받아들여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꿈을 이루게 해준 그 나가사키현의 교육위원회(다른 현도 마찬가지다)의 젊은 일본 공무원을 생각할 때 지금도 나의 가슴은 뭉클해진다. 그리고 이런 공무원과 가와구치 선생님이 있는 일본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와구치 선생님은 올해로 95세가 되나 보다. 최근에는 후쿠오카에 있는 딸네 집으로 이사를 했으며 자유롭게 바깥출입은 못하시지만 아직도 비교적 건강하시다는 소식이다. 사모님(옥쌍) 말씀이 재미있다. 담당 의사는 선생님의 건강 상태로 보아 90세를 넘기지 못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90세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때문이라고 사모님은 확신한단다. 편지 한 통, 전화 한 통이 선생님의 건강과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 같다고도 했다. 감사의 뜻으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믿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나라의 국력은 그 나라의 교육으로부터 우러난다고 한다. 진짜 교육자의 이미지는 10세의 어린 가슴에 60년이 지나도록, 아니 영원히 남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존경스러운 스승과 그 스승을 그리워하고 찾아다니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난 김에 가와구치 선생님께 전화 한 통 넣어 볼까!
2006년 8월 22일
차윤










'더불어 사는 삶 > 나를 감동시킨 순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친구 東浪이 안겨준 동해바다! (0) | 2026.06.26 |
|---|---|
| 뉴질랜드에서 온 보름달 (0) | 2025.11.08 |
| 단순한 기쁨, 생의 원동력! (0) | 2025.11.08 |
| Fantastic! (0) | 2025.11.07 |
|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나의 시집 소개글 (4) | 2025.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