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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 군사인재의 산실 황포군관학교를 찾아서

雲靜, 仰天 2019. 7. 29. 22:08

중국혁명 군사인재의 산실 황포군관학교를 찾아서

 

황포군관학교를 아시나요? 지난 세기 중국국민당 인물이든, 중국공산당 인물이든 수많은 군사 인재들이 배출된, 중국 현대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군사교육기관이었죠.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16일 남방 광동성의 성도 廣州에 세워진 육군 장교 육성 사관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의 정식명칭은 육군군관학교였습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당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포함해 현대 중국의 군사발전에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친 중국현대사상 최초의 군사교육기관이었습니다. 

 

 

1924년 6월 16일에 거행된 황포군관학교 개교 기념식. 청천백일기 중간의 단상 위에 있는 중화민국 총리 손문, 그 오른쪽 여성은 손문의 부인 송경령이다.
개교 당시의 학교 전경. 학교 뒤편엔 산이 있고, 앞에는 황포강이 흐르는데, 학교의 위치는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중국인들은 음택이든 양택이든 중요한 인물이나 기관 혹은 심지어 도시까지도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터를 잡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중국의 여러 역사적 인물의 묘터나 사찰 등을 가본 바 있는데 대부분 도참설에 입각해 세워져 있었음을 확인한 게 많다. 북경시도 원대 때에 불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세워졌다. 황포군관학교의 배산임수를 보니 한 눈에도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이 학교가 들어 앉아 있는 지세를 자세히 분석적으로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여름의 녹음이 짙게 우거져 있어 이 터가 풍수지리의 어떤 형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퍽 아쉽다.
학교 전경. 연병장에 행사를 하고 있어 보인다.
제1차 국공합작은 막후에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이 구사한 당근과 채찍 정책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소련공산당원이었지만 코민테른 요원 신분으로 가장해 중국 남방 손문의 광동정부(중화민국)에 접근해 손문과 국민당 개조와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밀사역할을 한 두 주역. 왼쪽이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스니블리트 마링, 오른쪽은 소련정부의 전권대표 요페. 이외에 손문의 군사고문으로서 당시 광동정국에 깊게 개입된 소련공산당원 보로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군사고문들은 황포군관학교의 교육을 통해 소련식 군사제도와 전술교리를 중국에 전수했다. 심지어 그들은 중국 각지에 존재한 전근대적인 군벌세력을 군사적으로 제거하고자 한 국민당군을 지휘하거나 군사전술적으로 작전계획을 잡아주기도 했다. 사진 속 인물들은 1925년에 중국국민당군이 복건성 군벌 陳炯明군을 제압하기 위해 감행한 이른바 제2차 東征의 작전계획을 지도하고 실제로도 국민당군을 따라나서 전투를 지도한 소련군사고문들이다. 소련은 레닌 정권에서부터 스탈린 정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군사고문들을 동아시아 지역에 파견해 중국 뿐만 아니라 북한, 월맹, 몽골 등지에 소련군사교리와 전술 전략을 전파하고 이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소련군사고문단의 지속적인 지원을 통한 결과 특히 중국공산당과 북베트남 공산당에는 한 동안 소련식 군사제도와 전술이 골격을 이뤘다. 이 부분에 대해선 학계의 심층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황포군관학교의 지휘계통도. 운영의 지휘부로서는 최상부의 정점에 총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교장과 당대표가 보좌하는 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 8개 부서가 있고, 맨 아래 기층에 학생총대가 조직돼 있었다.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은 장개석이었고(장개석은 교장직 복이 있었던지 雲靜이 다닌, 1925년에 중국에서 설립된 뒤 나중에 대만으로 옮겨온 국립 정치대학도 초대 교장을 지냈음), 이 학교의 중국국민당 당대표는 료중개(廖仲愷)였습니다. 중국국민당은 소련의 당군 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당 대표제도를 운영했었고, 황포군관학교도 소련식 군사교육제도 하에서 교육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국민당의 여타 조직도 마찬가지였지만 황포군관학교의 국민당 당대표는 교장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손문이 료중개를 당 대표 자리에 앉힌 것은 료중개가 자신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국민당 개조 및 레닌정권과의 합작에 앞장서서 추진한 인물이었기에 신임이 두터워서 믿고 맡길 만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자리 중요한 직책이었던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주임은 주은래였죠. 즉 이 시기 주은래는 장개석의 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19278월 국공합작이 깨어져 국민당과 중공이 불구대천의 적이 되면서 주은래는 쫒기는 처지에서 장개석을 떠났지만 기이하게도 9년 뒤 193612월 서안사변시에는 위치가 뒤바뀌어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개석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장개석을 만나 사건의 해결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서안사변시 중공내 장개석의 처리 방침을 둘러싼 의견대립 및 스탈린과 주은래의 역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상문, 西安事變周恩來」 『軍事論壇, 통권 제882016년 겨울호를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본 블로그에도 이 논문을 올려놨습니다.)

 

 

당시 이 학교 교장 장개석의 집무실. 한편, 당대표로서 손문의 신임이 두터웠던 료중개는 국민당 내 좌파 세력중에 두각을 나타낸 입지에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듬해 손문 사망 뒤인 1925년 8월 20일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에 반대하고 불만을 가진 우파의 괴한으로부터 아침 출근길에 총을 맞고 살해되고 만다. 범인은 국민당 우파중 왕정위(汪精衛)와 함께 국민당내 3거두로 불린 또 다른 실력자 호한민(胡漢民)의 사촌 동생 후이성과 몇몇 사람이 지목돼 처단됐지만 사건의 배후는 10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군대도 없어 중국국민당에 대적할 수 없던 약체의 중국공산당은 제 1차 국공합작을 통해 합법적인 신분으로 국민당과 광동지역에 세력을 넓혀가고자 하는 전략을 세워 실천했다. 위 사진은 국공합작 전 비밀조직이었던 중공이 광동지역에도 비밀리에 조직한 당 지부와 黨團이다 . 물론 이 두 조직은 상급기관인 중공 廣東區委의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았다. 이 건물은 현 광주시 文明路194~200호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중공이 군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28년 8월 1일 南昌 추수봉기를 기해서 조직한 것이 최초였다. 오늘날 중공은 이날을 인민해방군의 창군기념일로 삼아 매년 기념식을 거행해오고 있다.
당시 이 학교 생도들의 내무반과 관물을 재현한 모습. 장교후보생들의 관물이 어쩐지 육군 병장 서병장의 군대 시절 날렵했던 한국군 병사들의 관물에 비하면 각이 덜 나온다.

 

중국 현대사상 국공 양당을 통틀어 최고의 군사적 귀재로 불렸던 林彪도 이 학교의 제4기 졸업생이었습니다임표에 대해선 1940년대부터 모택동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장개석 역시 이미 교장시절 임표 생도의 출중한 능력을 눈여겨보고 대단히 총애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장개석은 1940년대 후반 국공투쟁 말엽에 임표가 지휘한 중공군에 밀려 장개석의 중국국민당군이 패해 남방으로 후퇴해내려 오게 되자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것이 임표 때문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훗날 1950년대 스탈린도 모택동에게 임표를 좀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그는 아주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습니다.

 

20세기, 걸출한 군사전략가로서 소련 적군에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가 있었다면, 중국국민당에는 독일유학출신의 독일군사통으로 장개석이 아낀 蔣百理가 있었고, 중국공산당에는 임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포군관학교에는 한국인들도 대거 참여해 상당히 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 내가 소장하고 있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 명부엔 초기 6개월 과정의 제1기부터 20여기에 이르는 전체 졸업생 약 7~8000명중 한국인들이 상당히 많았다고만 돼 있는데, 이번에 직접 와서 이곳에 전시된 자료를 보니 23명이었다고 소개돼 있네요.

 

나중에 더 확인해볼 일이지만, 이 보다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 학교 제4기생들이었고, 졸업 후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공산혁명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1949~50년 사이 여타 중국혁명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대거 북한으로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 김일성과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 그리고 무정 및 박일우가 중심이 된 중공의 연안파가 합작해 일으킨 남침전쟁의 주역이 됩니다.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의 국가별 출신지 및 학과별 학생수. 한국인은 23명이 배출된 것으로 돼 있다.

 

이곳에 전시된 많은 자료들은 중국현대사 중 특히 육군과 해군(나중에 생겨남)의 장교 배출상황과 그 뒤의 중국 국공 내전시의 군사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군요. 이 가운데에 나의 주의를 끈 것은 1936년 서안사변 결과 전격적으로 이뤄진 제2차 국공합작에서 중공군으로서 중국국민당군으로 새로 편제된 팔로군의 참모장까지 지낸 한국인 左權(아래 사진 중 국민당군 군모를 쓴 남성)을 중국인으로 소개해놓은 실수(혹은 왜곡)였습니다.

 

 

좌권과 부인 劉志蘭 부부와 그들의 갓난 딸 左太北(1940년 8월 山西省 武鄕縣 塼壁村의 팔로군 총사령부에서)

 

또 이 학교 한국인 졸업생 23명 중 보병과, 포병과, 공병과, 경리과, 정치과 총 5개 병과 중 보병 16명, 공병 1명, 정치과 6명으로 중국 각지의 다른 성 출신 보다 사람 수에 비례해 정치과를 많이 지망한 사실입니다. 당시 정치과는 군내 커미사르(Commisar)라고 불린 정치위원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위원의 연원은 프랑스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것이 레닌의 러시아 적군에 들어와 정착된 제도로서 중국국민당도 이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정치위원제도는 중공군, 월맹군과 북한군에도 있었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보통 연대급 부대부터 배치된 정치위원의 역할은 군사, 전쟁 및 전투와 관련해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 해당 부대가 정확한 노선을 밟을 수 있도록 최고 지휘관과 협의하거나 조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위원의 계급은 지휘관과 동일하거나 한 단계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는 지휘관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높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황포군관학교의 정치과는 군관 후보들 중에 가장 우수한 생도들이 지망하고 선발됐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인 생도들이 전반적으로 우수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로 봐도 될 듯하군요.

 

여행 일정상 황포군관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더 계속할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제대로 소개하려면 아마도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여의치 않게 일단 여기서 맺고 봅니다. 훗날 재론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우선 약간의 황포군관학교 관련 사진자료로 대신합니다. 지금 한일 간에 한창 무역전쟁이 불붙고 있지만, 막간에 재미 삼아 봐도 좋겠군요.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위 사진 속 멀대의 왼쪽은 광동성의 명문 광주(광저우) 中山대학의 엽용호 교수. 내가 2002년 홍콩 중문대학의 방문학자로 가 있을 때 같은 기숙사의 룸메이트였던 그는 이번 나의 두번째 광주 방문 기간 중 전일정을 같이 동행해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년부터 그는 미국의 UCLA대학의 교환교수로 1년간 가 있게 돼 내년 2월 내가 미국을 방문할 때에 다시 조우하기로 약속했다. 그의 미국 체류가 원만히 끝나고 수확도 풍성하기를 기원한다.

 

2019. 7. 23. 16:56

중국 광주 황포군관학교 舊址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