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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위한 자세 : 진실 혹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전제

雲靜, 仰天 2023. 1. 8. 06:26

학문을 위한 자세 : 진실 혹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전제

현재 한국사회는 엄청난 혼돈의 늪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다. 사물과 사안에 대해 진리와 진실을 사유하는 힘이 부족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몰라서 본질은 멀리서 우리를 비웃고 있고, 허위와 억지와 정치 논리만 판을 치고 있다. 진리와 진실이 가려지거나 실종된 결과 위선과 거짓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간취할 사유능력이 약하니까 언저리나 일부의 사실만 가지고 설왕설래, 이전투구의 권력싸움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른 사유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진리 혹은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진리, 진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모든 면에서 관통 되어야 할 가치나 덕목이지만 그것은 특히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 분야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학문 함에 어떤 자세와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관해 포커스를 좁혀서 평소 생각의 일단을 정리해보겠다.

특정 학문에 국한하지 않고 진실과 진리를 검증하거나 파악하는데 의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그것을 명제화 한 프랑스 출신의 물리학자,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였다. 그 이전엔 사람들이 교권은 물론, 세속권력까지 양손에 움켜쥐고 혹세무민한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걸 의심 없이, 아니 의심해선 안 되듯이 무조건 믿어왔을 뿐이다. 그러한 사회 풍조에 데카르트가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한 셈이다.

인간의 사유방법에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다준 데카르트


진실, 진리를 파악하려면 반드시 데카르트가 던진 명제 "고기토 에르고 섬"(g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명심해야 한다. 세계의 일체가 허구와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신이 존재한다는 건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이나 진리를 확실하게 인식하기 위해선 명증적 직관과 필연적 연역 이외에는 없다고 주장한 데카르트는 모든 명제를 자명한 공리(théorème, 公理)로부터 연역해 내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 도입했다. 그는 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고 스스로 명백한 명제, 즉 모든 철학의 원초적인 명제인 동시에 토대가 되는 것을 '제1원리'(Le premier principe)라 부르고,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해 '방법적 회의'라는 걸 제시했다.

방법적 회의란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거나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상식, 지식, 진리를 모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분절적으로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의도였는데, 새로운 원리 위에서 학문을 통일적으로 재건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 의학, 역학, 도덕 등을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보편학'으로 정립하고자 했고, 공리로부터 연역해 내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중세 철학에서 탈피할 수 있었기에 비로소 근세 철학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통상 서양철학사에서 데카르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평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진리탐구나 학문방법의 원칙으로 소위 합리주의 철학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영국의 근대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가 말한 것처럼 유럽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다.” (레젝 콜라콥스키)

프랑스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철학적 사유를 펼친 데카르트와 거의 같은 동시대의 영국엔 경험론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존재했는데, 베이컨 역시 진실 혹은 진리에 도달하는 데는 기존의 지식과 모든 권위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실,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상과 편견의 파괴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모든 우상과 편견은 종족, 동굴, 시장, 극장에서 형성되는 네 가지 범주 안에 있다고 했다. 가히 인류의 사상사에 일대 변혁이랄 수 있는 획기적인 사고였다.

인간들은 베이컨의 이러한 사상사적 방법론에 힘 입어 비로소 종래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신학관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적 세계관이 크게 부각된 바 있는데, 그의 사상은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에 의해 입증되기도 했다.

2,000년이 넘는 방대한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Plato, B.C. 427 ~ B.C. 347)의 이데아(Idea)론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고 갈파한 화이트헤드에 이은 20세기 영국의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경도 유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문제의식을 쉽게 풀어서 통속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만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시 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고!

인류 지성사에서 인간의 진리 인식에 중대한 공헌을 한 프란시스 베이컨
버드란트 러셀은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상가로서도 다양하고 폭 넓게 활동한 지성이었다. 사회주의를 신봉한 그는 노벨문학상도 수상했다.(1950년)


현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후스(胡適, 1891~1962) 역시 학문함의 자세를 강조한 바 있다.

"학문함은 의심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의심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의심이 되는 곳에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做學問要在不疑處有疑, 待人要在有疑處不疑)--胡適. 후스는 학문이란 "대담한 가설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증명을 해가는 것"(大膽的假設, 小心的求證)이라고 했다. 가설과 증명을 전체 학문의 방법론으로 일반화한 그의 이 정의는 정치학이 중심이 되는 사회과학의 연구방법일 뿐이지 문사철 등 인문학의 연구방법론과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언급한 오류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학문의 영역에선 의심을 통해서 진실인지 증명해야 한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의 부름을 받아 학자에서 외교부장(장관)까지 역임한 바 있는 후스


선지식인은 중국에만 있었고 조선엔 없었는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멀대가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 중에 가장 선진적이고 열린 자세의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연암 박지원(1737~1805)도 학문을 정의한 바 있는데, 그는 진실과 진리를 위해선 어떤 일이든 성실한 자세와 사전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연암은 68세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가 죽던 해인 1805년(조선 순종 6년)에 한 말이다.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규모 있게 만들고, 물건을 하나 감식하더라도 식견을 갖추는 것, 이것이 모두 학문이다."--박지원(『연암집』)

고타마 시타르타(석가모니, B.C. 560~480추정)는 만물의 관계성과 한시성,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하는 연기성을 밝힌 바 있다. 金剛經에 나오는 말이 그것이다. 즉 "모든 相 있는 것은 전부가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相이 相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니라."(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여기에서 相의 허망함을 보라는 건 진실과 진리, 즉 본질을 보라는 말이고 그렇게 되면 눈에 들어오는 여래는 석가모니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실제는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본질을 바로 보는 지혜(明)를 증득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연기성을 깨치도록 하기 위해 석가가 제시한 여러 가지 비유와 팔정도 등의 방법론이 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그는 엄청난 논리학의 대가이고 불교 역시 종교라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논리학, 철학적 사유체계다.

석가모니를 이야기했는데 예수(Jesus Christ,
B.C. 4 추정 ~ A.D. 30)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를 포함해 기독교 이야기는 한국사회에선 마음 놓고 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객관적 진리를 증명하는 것과 관련해서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이야기하기는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성경 구절 하나를 인용하는 걸로 대신하고자 한다. ‘누군가에게 순종한다면 그의 종이 된다.’(로마서 6:16). 신분이나 진리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말의 성서적 의미나 철학적 함의는 심오한 것이지만 여기선 구체적 논의를 생략한다.

데카르트, 베이컨, 러셀, 후스, 박지원, 석가모니, 예수 등은 모두 인간의 지적 성장과 인간 인식의 과학성을 제고한 사상가들이거나 종교적 성인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인류의 이성과 지성은 극소수인 이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봐도 큰 잘못이 없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바와 같이 기존의 그 어떤 지식 혹은 진실이나 진리라 하는 것이라도 모두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된다. 절대권력자인 대통령도, 모든 과학적 진리, 사회적 명제와 인간의 허구적인 명망과 권위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일단 의심해야 올바른 진실,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는 자기 부모형제와 자신까지도, 그리고 진리의 담지자라는 모든 종교 창시자의 말씀들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거쳐야 건강한 상식과 믿음이 생긴다.

나의 이 생각을 적절하게 한 마디로 정리한 신학자가 있다. "확실히 믿으려면 먼저 의심해야 된다."(To believe with certainty we must begin with doubting.) 11세기의 폴란드 국립카톨릭 교회(Polish National Catholic Church)의 성 스타니스라오(St. Stanislaus, 1030~1079)가 한 말이다. 스타니스라오는 이 말에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이 너를 걷어차지 않도록, 예상한 것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는 어려움에 직면할 용기를 가져라." (Have the courage to face a difficulty lest it kick you harder than you bargain for.)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 세상의 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기존의 지식, 진리, 권위, 명성 심지어 정치적 술책이나 프로파겐다를 그대로 믿고 보는데서 비롯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동기 위주로 생각하는 특성이 있는 한국인들과 그 집합체인 한국사회가 유달리 그런 성향을 보인다.

모든 것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마라. 진실이라고 알려진 기존의 사실들도, 정치인이나 권력기관이 공표한 언술도, 언론의 보도도, 국가의 교육내용도 그대로 여과없이 받아들이지 마라. 철두철미하게 의심하고 끊임없이 사유하라. 실천과 행동은 그 다음 일이다. 더우기 변증법적 수정은 실천 후의 과제다. 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행동과 실천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맥을 잘못 짚고 좌표를 잘못 찍었기 때문에 오히려 또 다른 문제만 만들어낼 뿐 문제해결에 별반 소용이 없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사색하는 인간형이 돼야 할 소이연이다.

2018. 10. 24. 17:3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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