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인물 및 리더십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와 知行合一

雲靜, 仰天 2020. 5. 9. 08:59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와 知行合一

      

어제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향후 삼성의 경영 관련 자기의지를 피력했지만 삼성의 여러 계열사 기업들로부터 입은 각종 피해자들에겐 사과 한 마디 없이 국민들에게만 사과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런데 삼성의 고충만 얘기했지 가장 본질적인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도대체 돈을 얼마 만큼 가져야 만족할까?

더군다나 그는 삼성의 각종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주겠다는 언급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보상해줄 것이 있으면 보상을 해주는 게 상식이다.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사과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이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염치가 없는 것이고,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이 없는 짓이다. 이 글 아래 부분에 설명이 돼 있지만 양지와 양능은 맹자와 명대의 왕양명이 언급한 것이다.

 

한 해 250조에 육박하는 매출액을 내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한 역할은 분명 훗날 긍정적인 역사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균형감 있는 역사가라면 동시에 이재용의 불법 경영권의 승계, 선대의 ‘전통’인지 아니면 ‘유지’를 받든 것인진 몰라도 세기가 바뀐 지금도 “무노조 경영”을 고집해서 직원들의 노조결성 및 활동을 갖가지 비겁한 수단들을 동원해 음해, 탄압, 해고한 짓도 평가에 반영시킬 것이다.

 

이번 이재용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가 곧 있을 자신에 대한 뇌물혐의의 이른바 ‘삼바’ 항소심 재판에서 유리하게 판결나도록 영향을 미치고자 한 의도가 짙어 보이는 또 한 번의 대국민기만이라고 느끼는 건 필자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https://m.nocutnews.co.kr/news/5339780

 

https://m.nocutnews.co.kr/news/5339801

 

이재용은 정말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그들을 찾아가서 사과하지 않았을까? 피해자들에게 사과 없이 국민들에게만 사과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미리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해주는 것이 기업 전체 운영이나 그룹 전체의 재산에 그 무슨 해가 될 수 있기에 그렇게 했을까? 내가 보기에 다 알고도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옳음을 알고도 그 옳음을 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에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성인과 선지자들이 남긴 수천, 수만 가지 金科玉條와 良言, 즉 훌륭한 가르침과 좋은 말들이 넘쳐 난다. 그런데 왜 세상은 여전히 이다지도 험악하고, 이다지도 시끄럽고, 이다지도 도의에 맞지 않는 일들이 끊이지 않을까? 또 이재용처럼 사람들은 알고도 왜 행하지 않을까? 이 의문이 필자가 ‘지행합일’을 끄집어 낸 이유다.
 
세상이 좋은 말처럼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알아도 도리에 맞게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 따로 몸 따로 놀듯이 마땅히 행해야 할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입만 살아 있고 말 뿐인 것이다. 그곳엔 알고 있어도 그것과 별개로 탐욕과 살아온 방식, 즉 行이 앎이라는 識을 제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오랜 習과 業(karma)이 작동한다. 이재용은 이미 부친에게서 삼성을 물려받을 때 각종 편법인 분식회계와 꼼수 같은 상속세 포탈로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수 십 조의 막대한 재산으로 불렸지 않는가?

 

이재용도 설마 지행합일이라는 말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이재용이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나, 더 이상 법을 어기지 않겠다며 “준법을 거듭 다짐”한 것이나, 또 “우리 사회가 보다 더 윤택해지도록 하고 싶”고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라고 한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을 포함한 3남매의 과거 재산형성과정과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모두 정당하지 못한 불법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기업의 사회성, 도덕성 및 사회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기업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역시 도덕적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리다. 

    

‘知行合一’이란 16세기 초 중국 명대의 주관적 관념론자였던 王陽明(1472~1528, 본명은 王守仁) 철학의 핵심체계로서 그의 철학적 이상과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중국철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철학이 어떤 체계로 구성돼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지행합일이라는 말은 들어봤거나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알면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말일까? 왕양명이 말한 知와 行은 주로 도덕 관련 지식과 행위를 가리킨다.
 

왕양명의 초상화. 그는 참 지식, 참 앎은 아는 만큼 행해서 합일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지행합일 관념이 16세기에 나타나게 된 데는 철학사적 배경이 있다. 왕양명 자신이 살던 시대의 주류 철학, 즉 당시 유행하던 주자학의 대가 朱熹의 ‘知先行後’, 즉 ‘먼저 알고 난 뒤에 행하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아는 것 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하다며 실천을 강조하면서 나온 얘기였다.

 

주희의 이 주장에 대해 왕양명은 서한으로 문답을 펴오던 제자에게 자신의 생각은 “朱熹와 정반대가 된다”(與朱子正相反矣)고 편지를 적어 보낸 바 있다. 왕양명이 살던 당시나 그 이전에 학문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앎과 행동을 따로 떼어 별개인 것처럼 얘기하고, 어떤 이는 앎에만 치중하고, 다른 어떤 이는 행동에만 치중하는 것을 보고선 이 치우침을 제어하거나 혁파하기 위해 지행합일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그는 “앎과 행하는 것은 본래 분리시킬 수 없는 것”(“知行工夫, 本不可離”, 『傳習錄』 중 答顧東橋書에서)이라고 했다. 과연 이 말의 내적 함의는 어떤 것일까? 지행의 의미는 대략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앎과 행함의 본체는 같은 하나”(知行本體同一)라는 의미다. 왕양명은 “앎과 행함은 같은 본체라는 것이 양지양능”(“知行本體 卽是良知良能”,『傳習錄』중 答陸原靜에서)이라고 강조했다. 왕양명 철학의 핵심 열쇠말 중의 하나인 良知와 良能은 각기 배우지 않았지만 알게 되는 것(不學而知者)과 생각하지 않고도 능히 할 수 있는 상태(不慮而能者)를 말하는데, 근원은 본래 동일한 일체라고 한다. 이건 원래 맹자가 정립한 개념이다.
   사람은 누구나 양지와 양능을 타고나는데 양지는 갓난아기라도 엄마를 좋아하고 따를 줄 아는 것처럼 생각해본 적이 없어도 ‘알 줄 아는’ 것을 말하고, 양능은 태어나자마자 배고프면 우는 것처럼 배우지 않고서도 ‘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양지는 “훌륭한 앎” 혹은 “제대로 된 앎”, 양능은 “훌륭한 행” 혹은 “제대로 된 행”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앎과 행함을 병행하라”는 知行竝進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未有知而不行者, 知而不行, 只是未知”,『傳習錄』, 卷上). 이는 주자도 강조한 것인데(朱子語類, 第103卷 39條目), 지행합일과 함께 앎과 행에 관한 왕양명 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셋째, “앎이 바로 행함”이라는 知卽是行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앎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에 속한다.”(見好色屬知, 好好色屬行), “악취 냄새를 맡는 것은 앎에 속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聞惡臭屬知, 惡惡臭屬行”,『傳習錄』, 券上). 즉 지행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 “앎과 행함은 서로 함유하고 있다”는 知行互含이다. “앎은 행의 본의이며, 행은 앎의 공부이다. 앎이란 행의 시작이며, 행은 앎의 완성이다. 만약 무엇을 깨달을 때 오직 한 가지 앎만을 말한다는 건 이미 스스로 행이 그곳에 있음을 안다. 단지 한 가지 행만 말하지만 이미 저절로 앎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知是行的主意, 行是知的工夫, 知是行之始, 行是知之成. 若會得時, 只說一個知, 已自有行在, 只說一個行, 已自有知在.” 『傳習錄』, 卷上).

 

다섯째, “앎과 행함이 서로 같아야 한다”는 知行互等이다. “앎이 진실하고 독실한 곳이 바로 행이며, 행이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살피는 곳이 바로 앎이다. 앎과 행의 공부는 본래 떨어질 수 없다. 단지 후세의 학자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하여 앎과 행의 본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합일병진의 학설이 생겨났다.”(“知之眞切篤實處卽行, 行之明覺精察處卽是知, 知行工夫,本不可離, 只爲後世學者分作兩截用功,先卻知, 行本體,故有合一並進之說”, 『傳習錄』 중 答顧東橋書에서) 즉 앎은 행함이고, 행함 역시 앎인 것이다. 제대로 알면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왕양명이 지행합일설을 강조한 또 다른 배경과 동기가 있다. 내게는 그것이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기득권층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안된 전통적 윤리와 도덕을 단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양과 궁행의 중요성을 전통 윤리도덕에다 결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왕양명을 좋아하고, 그의 지행합일 의지를 좋아하는 이유다.

 

일반인들에겐 몰라서 행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알고도 행하지 못하거나, 알아도 행하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다. 역사에서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알고도 행하지 못해 낭패를 본 예들은 부지기수다. 욕망은 자신을 망치고 남을 해치고 결국 모두를 망친다. 그래서 욕망은 절제돼야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몰라서 절제하지 않는 이는 없다.
 
절제해야 함을 알고도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절제하지 않도록 만드는 게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習이요, 業의 작용이다. 왕양명은 자신이 젊은 시절 한 때 불교를 섭렵한 탓인지 理란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했고, 지행합일 사상을 펼치면서 불교의 唯識學에 닿는 인식을 보인 것으로 이해된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아는가가 중요하고, 제대로 알아도 행함이 없다면 안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음속의 탐욕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으면 알아도 모두 헛것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구한말 집권층 노론 계열 사대부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과 일족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조선이라는 공동선의 가치 보다 더 높게 두고 친일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드넓은 유학사상 체계에서 주희의 주자학과 함께 주된 두 사상적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왕양명 사상의 양명학은 배척하고 주자학만 죽자 살자 쫓았다.

  

지난 세기 蔣介石이 저 넓은 중국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 간 것도 여러 가지 패배 원인들 중에 상층부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는 건 중국현대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왕양명을 특히 숭모해 그의 가르침인 실천궁행을 통해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蔣介石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 갔을 때 臺北의 草山이라는 산을 자신이 거할 터로 잡고선 왕수인의 호를 따서 ‘陽明山’이라고 이름 지은 것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

 

또 나랏돈으로 흥청망청 쓰던, 毛澤東 시대 가장 고질적인 유산 중의 하나인, 나라를 거덜 낼 정도로 썩은 중공탐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를 제거하기 위해 鄧小平이 강조한 “진리는 실천에 의해 검증된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금언이었다.
 

필자도 앎을 아는 만큼 행하는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다. 어차피 인간이란 신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게 알 수 없다. 행하다가 생겨나는 시행착오와 부족과 결함은 또 다른 앎과 행을 통해 개선하고 완정성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건전한 기득권이라고 해도 그것이 썩지 않도록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검증을 반복해서 받도록 해야 하고 결함과 부족은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데 그것은 행이 아니고선 앎의 선순환이 어렵다.
 
이 점에서 나는 주희 보다 왕양명의 주장에 점수를 더 주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옳은 일이거나 사회가 필요한 일이라면 그것을 직접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알고도 행하지 않아서 나중에 더 큰 데미지를 입게 될 경우가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아닐까 싶다.
 
왕양명의 지행합일설은 마음의 지극한 상태를 전제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양명학이 마음을 바탕이나 근본으로 삼아 학문을 전개시키는 것이어서 心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마음수행이나 마음공부는 특별한 일인 듯이 꼭 종교인들이나 학인들만 하는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해당이 된다.
 
이재용에게는 마음에 탐욕이 크게 자리하고 있어 보인다. 양지와 양능이 있는 것도 아니요, 知行竝進도, 知卽是行도, 知行互含도, 知行互等도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 사법부도 지행합일이라는 말을 알고 있을 터, 과연 이재용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자못 궁금하다. 

 
2020. 5. 8. 14:05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