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의 초상화와 민비 살해범 미우라 고로의 한시
민비의 초상화와 민비 살해범 미우라 고로의 한시
민비! 1890년대 비극적 최후를 맞은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1851~1895)다. '명성황후'는 그의 사거 후 고종이 내린 시호다. 그런데 민비가 죽고나서 지금까지 약 130년이 지났음에도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려 진 바가 없다. 제대로 된 초상화나 사진 한 장 발견 된 게 없어서 그렇다. 지금까지는 국내에서 대략 3명의 여인이 각기 민비일 것이라고 추정돼 오고 있다.
첫째가 1910년에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이라는 책에 나온 명성황후 사진이다. 즉 아래의 사진 속 인물이다. 근거는 현재 ‘한미사진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의 얼굴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한미사진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명성황후로 추정 되는 사진은 그 아래 두 번째에 있다. (출처 : 다보성 갤러리 편, 『대한제국 120주년, 광복 72주년 기념 구한말/일제강점기 특별전』, 편자 간행, 2017년, 24쪽)
두 번째 여인은 지금까지 민비로 알려진 당시 궁녀인데 아래 사진 속 인물이다. 소장자와 소장처를 알 수 없는 사진인 것이 유감이다.
위 사진만으로는 과연 궁녀인지 민비 본인인지는 알 수 없고, 여전히 결정적인 단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사진 속 여인이 입고 있는 의상과 머리에 올린 관과 비녀를 보면 왕비의 옷차림과 왕비용으로 보인다. 만약 민비가 아니라 궁녀였다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즉 이 사진은 민비시해 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찍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렇다면 목숨이 오락가락한 경각지추의 난 때가 아니라 평시 때에 찍은 것이라면 과연 민비가 일개 궁녀에게 왕비 차림을 하도록 윤허를 했을까, 했다면 언제, 왜 무엇 때문에 했을까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고 있다.
당시 다보성 측에서는 이 작품이 민비의 초상화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추정의 근거로 다섯 가지가 제시돼 있다. 그것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출처 : 다보성 갤러리 편, 『대한제국 120주년, 광복 72주년 기념 구한말/일제강점기 특별전』, 編者 간행, 2017년, 24쪽)
1. “같은 일본식 표구 족자로서 명성황후 살해범으로 알려진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글씨 작품과 한 세트로 같이 전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2. “족자 뒷면에 ‘閔氏 婦人’으로 추정되는 글씨(墨書)에서, (초대 주한—필자 삽입) 러시아 공사인 웨베르(韋貝)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 1895. 9. 27 ‘민왕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왕의 법령(勅書)’을 내렸다고 적고 있어(명성황후추모사업회 이영숙 편, 『명성황후 시해사건 러시아 비밀문서』, 서림재, 2005년 10월, 65쪽, 386쪽 참고), 이러한 평상복 차림의 초상화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웨베르”는 베베르(K. I. Veber)를 잘못 명기한 것임—필자 주.
3. “평상복이지만 저고리는 모란문, 치마는 부평초(浮萍草) 꼴의 삼엽(三葉)문 등의 무늬가 나타나 있어 평민복을 넘어서는 고급 복식과 당초문천의 고급 양식 소파인 점”이다.
4. “신이 고급 가죽신(唐鞋)인데다 신코를 드러내고 그렸다는 점”이다.
5. “이승만 대통령이 쓴 『독립정신』 (1910)에 실린 명성황후 추정 사진과 ‘한미사진미술관’ 소장의 명성황후 추정 사진 못지않은 분위기와 품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상기 5개 항 중 1번의 미우라 고로의 서예 작품은 아래와 같다. (출처 : 다보성 갤러리 편, 『대한제국 120주년, 광복 72주년 기념 구한말/일제강점기 특별전』, 編者 간행, 2017년, 24쪽, 184쪽)
상기 1번의 주장과 관련해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기왕에 설명을 하는 김에 문제의 초상화가 ‘미우라 고로의 서예 작품’과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한 세트로 같이 전해오고 있는”지 밝혀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2번 주장과 관련해 족자 뒷면에 나와 있다는 “閔氏 婦人” 글씨는 다보성 갤러리의 주장에 의하면 그 아래 사진처럼 “○○婦人肖像”의 앞 훼손된 ○○부분을 적외선으로 촬영한 결과 그것이 “閔氏”로 나타났다고 한다.
나는 다보성에서 주장하는 “민비설”의 진위여부 그리고 상기 5개항의 근거에 대해 판단을 내릴 입장이 아니다. 그럴만한 전문가로서의 식견도 없다. 최종적인 판단은 보는 이들에게 맡길 뿐이다. 다만, 향후에도 민비 관련 역사연구에 도움이 되는 이런 식의 노력을 지속해주기를 바라며, 끝으로 미우라 고로에 관해 한 두 가지 사족을 달고 싶을 뿐이다.
미우라 고로(1846~1926)라는 자는 47명의 일본 낭인(주군 잃은 떠돌이 사무라이, 즉 다른 말로 폭력배나 다를 바 없음)들을 모아 ‘을미사변’(고종 32년)을 막후에서 총괄 지휘한 천하의 둘도 없는 깡패이자 불한당이다. 그는 민비를 시해한 사건의 주범이자 교사범이었다. 위 족자 속 미우라 고로가 무지하게 휘갈긴 초서에 대해 다보성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해 놨다.
一駭寒泉積雨晴
半容山月此心明
請誰話作玄玄妙
梅秘淸香雪飛聲
右山居漫吟書 敬呈 黙仙老禪師之淸前
七十二翁觀樹居士梧樓
한 번 찬 샘물에 놀라 궂은비가 개이고
반쪽 얼굴의 산달빛에 내 마음도 밝아지네
누구에게 청하여 깊은 묘리를 말하게 할까
매화는 맑은 향을 감추고 눈은 소리를 감추었네
이 글은 산에 지내며 부질없이 읊고 씀
묵선 노선사에게 72세의 노인 관수거사 오루
觀樹는 미우라 고로의 호다. 1847년 1월 1일생이니 나이 48세에 민비 시해사건을 일으켰고, 그 뒤 위 시를 쓴 것은 72세 때라고 했으니 민비시해 후 24년이 지난 시점인 1919년이었다. 그가 죽은 해는 1926년 1월 28일이었으니 죽기 7년 전에 쓴 한시인 셈이다. 미우라가 默仙이라 불린 나이 든 禪師에게 바친 글과 글씨다. 그런데 나는 위 다보성의 해석에 대해선 조금 다른 견해를 내볼까 한다. 아래처럼 해석을 조금 달리 해봤다.
一駭寒泉積雨晴
半容山月此心明
請誰話作玄玄妙
梅秘淸香雪飛聲
놀라서 보니 마른 샘에 장마 비가 개인다.
산에 가린 반쪽 달빛에도 이 마음은 밝구나.
뉘에게 깊고도 오묘한 이야기를 청할까?
매화가 청향을 몰래 품는데, 눈발 날리는 소리!
駭는 ‘놀라다’, ‘두려워하다’라는 것을 일차적 의미체로 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놀랄 만큼의 험악한 상황이나 파국적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一駭은 ‘놀라서 보다’로 옮겼다. 한자 一은 명사, 수사, 형용사로 쓰이고, 또 동사나 動量詞 앞에 쓰여 그 동작이 순간적으로 혹은 갑자기 발생한 후 그 결과가 그 뒤에 나타남을 설명하는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뒷부분의 용법에 따라 놀라는 행위 뒤에 그 놀란 결과가 뒤 따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寒泉은 冷泉이라고 하듯이 원 뜻은 차가운 샘이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고전 작품들을 보면 寒泉의 寒은 ‘차다’라는 뜻 외에 ‘마르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찬 샘물에 놀라서 궂은비가 개인다는 건 논리의 비약이 허락되는 시의 세계라고 해도 두 현상이 서로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해서, 마른 샘이라고 번역했다.
積雨는 장맛비를 가리킨다. 이 의미로는 唐나라 韓愈의 시 符讀書城南 중에 “時秋積雨霽, 新凉入郊墟”에 나온다. 寒泉積雨晴이라는 구는 내용상 마른 샘에 장맛비가 개이거나 그친다는 상황이 중첩돼 있는데, 물리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모순상황이다. 또 “뉘에게 깊고도 오묘한 이야기를 청할까?”하고 고심하다 보니 “매화가 청향을 몰래 품는데, 눈발 날리는 소리”만 들린다는 뜻으로 새겨진다. 이런 구절들은 미우라 고로가 뭔가를 암시하거나 비유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의미는 좀 더 考究해봐야 할 것 같다.
이 한시는 미우라 고로가 과거 자신이 획책하고 주도적으로 도발한 민비 시해사건을 의식하고 쓴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느낀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감회에 불과한 것일까? 이 시가 쓰인 때는 인간으로선 해선 안 될 만행을 저지르고 사반세기가 더 지난 시점이었지만, 그는 결코 쉽게 뇌리에서 자신이 행한 만행이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억은 무덤에까지, 아니 지옥에까지 가지고 갔을 것이다.
조선의 왕비가 남의 나라 깡패들에게 살해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민비를 두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남편이 할 일을 아내가 나서서 마음대로 처리하는 걸 폄하하는 의미)는 ‘牝鷄司晨’(『書經』의 「牧誓篇」에 나오는 말로 정확하게는 “암탉이 새벽에 우는 역할을 맡았다”는 뜻임)이니 하는 식의 좋지 않은 험담과 비아냥거림이 많았지만, 맞는 말도 있고, 사리에 맞지 않는 지나친 악평도 있다. 이 글에선 내가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처지는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면 설령 아녀자가 나서서 남편인 왕을 제쳐 두고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왜 외세가 들어와선 딴 나라 사람들이 죽이도록 했던가? 잘 나나 못 나나, 미우나 고우나 우리나라 왕비는 우리나라 백성이 심판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튼 당시 동아시아가, 아니 세계가 놀란 일국의 왕비를 수십 명의 조폭 같은 무사들(실제로 오늘날의 일본 야쿠자들은 여기에서 연원)이 예리한 일본도로 난도질해서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석유를 부어 불살라 태워버린 천인공노할 사건을 그 자신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매 구절에 함축돼 있어 무슨 선가의 오도송이나 열반송을 읽는 듯한 느낌이어서 이 시는 미우라 고로가 지난 과거사를 의식하고 쓴 한시인 것으로 판단된다. 정확한 뜻은 아무래도 미우라 고로, 흉중에 혼자만의 그 무엇을 품고 황천길로 간 그 놈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내겐 그럴 재간이 없다.
2020. 4. 24. 09:45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