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기행 : 杜牧의 詩 淸明
고전기행 : 杜牧의 詩 淸明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오만에 찬 강대국들이 죄다 휘청거리고 있다. 발원지는 중국이긴 했지만,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다. 이번 사태는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개발 위주의 비생태적, 반자연적 삶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생태론적 관점에서 근원적으로 준엄하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 청명절, 중화권의 인터넷상에선 인류공동의 위기의식 보다는 사는 게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중국인들의 상심과 푸념을 반영하는 시가 크게 공감을 얻고 있다. 올해는 전혀 예상치도 않게 “우한(武漢) 역병”으로 인해 청명절을 맞았어도 예년처럼 평소 같았으면 부산을 떨 조상에 대한 성묘와 상춘도 없고, 각종 행사들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떤 시이기에 중국인들의 공감을 사고 있을까? 그 많던 사람들의 왕래와 완전히 셧다운 된 경제의 침체상황에 들어맞는, 세차게 흩날리며 내리는 봄비에 비유한 그 옛날 당나라 시대 杜牧의 시 “淸明”에다, 이 시를 차운(실제 차운은 없음)하는 형식으로 요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전방위적 전염에 혼이 빠질 정도의 극한 혼란과 위기를 빗대는 무명시 한 수다.
往年:
清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今年:
清明時節疫紛紛
關門休業欲斷魂
借問歡樂何處有
政府遙指回家蹲
위 두 한시를 한글로 차례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왕년(에는)
집집마다 성묘하는 清明절에 비가 흩날리는데
지나가는 행인이 혼이 다 빠진 듯하구나
주막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목동이 손으로 저기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금년(에는)
清明절에 지구촌 곳곳에 역병이 흩날리는데
문 걸어 잠근 휴업에 혼이 나간 듯하구나
즐거움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정부가 집에나 돌아가 틀어박혀 있으라고 하네.
위 시들의 느낌이 어떤가? 아마도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함의를 지닌 것인지 바로 마음에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는 마음에 맺히는 바가 다를 것이다. 최근의 상황을 빗대는 두 번째 시에서 알 수 있듯이 큰 명절인 청명절임에도 코로나19 때문에 성묘도 못하는 등 아무 것도 못하고 지내는 자신들의 처지 그리고 맥 빠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잘 짚어낸 시다. 인터넷에서 널리 호응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 淸明이 소개된 김에 이 작품을 감상해보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 두목이 혼 빠진 것처럼, 지구촌 인류 전체가 혼이 빠진 상황에서 오늘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가치와 삶의 자세를 인류의 집단지성으로 지혜롭게 재정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
9세기 초, 京兆萬年(현 陝西성 西安)에서 漢族으로 태어난 杜牧(803~852)은 당대의 이름난 시인이다. 字는 牧之이고 號는 ‘樊川居士’라고 불렸다. 중국 시학사에서 두목은 흔히 같은 당나라 시대의 詩聖 두보(杜甫)와 구별해서 “小杜”라고 부르기도 하고, 李商隱과 함께 “小李杜”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가 만년에 長安(현 西安) 소재 南樊川의 별장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사실을 두고 후세인들은 그를 “杜樊川”이라고도 불렀다.
두목은 저서로『樊川文集』과 함께 530편의 시를 지었을 정도로 다작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 ‘淸明’은 南宋 초년 錦綉萬花谷의 注明에 唐詩로 나와 있으며, 청대에 들어와선 康熙 황제가 唐宋 시대의 명시를 골라 시선집을 엮을 때 직접 선택한 시라고 전해지고 있다.
시 ‘淸明’의 전체적인 의미를 풀면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길에 오가는 사람들이 봄비가 흩날리는 날씨를 만나 모두 마음이 침울하고 걱정거리나 객수가 가득한 채 총총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이런 날씨에는 쉴 곳을 찾아 술을 한 잔 하면 봄비에 젖어 추위를 느낀 몸의 한기를 가시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행인이 목동더러 물었다. 부근에 술파는 주점이 어디에 있냐고? 목동은 대답 대신 손으로 저쪽에 주점이 있다고 가리킨다.”
이 시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우선 양력 4월 5일 전후의 같은 날 동일한 청명절이지만 이 절일을 맞는 인식과 문화가 중국과 한국이 많이 다르다는 점부터 알아야 한다. 중국엔 전통사회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청명절은 명절의 하나로 쇠고 있다. 이 점은 명절로서의 의미가 다 사라지고 없는 오늘날 한국의 청명절과 완전히 다르다. 사실 한국에서도 옛적엔, 적어도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청명절은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났었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근대화, 도시화에 밀려 조상 성묘도 하고 상춘도 하던 옛날의 세시풍속은 거의 다 자취를 감추고 없다.
그러나 중국에선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함께 조상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제사도 지내며, 모여서 踏青과 插柳 등등 여러 가지 놀이도 하면서 봄을 한껏 즐긴다. 궁궐에는 이날을 秋千節로 삼고, 坤寧宮의 황비 및 각 後宮의 후궁들은 모두 그네타기를 하며, 비빈들은 “그네놀이”를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청명절엔 보통 버들잎이 푸르고, 꽃이 붉게 만발하며, 봄빛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 날씨가 쉽게 변하는 절기여서 때때로 일기가 고르지 않을 때를 만나기도 한다. 내가 이 잡문을 쓰고 있는 오늘이 청명절이지만 한국에선 봄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옛날 두목은 청명절 날에 길 가다가 비를 만났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런 길손을 보게 됐을 수 있다. 시 속의 주인공이나 혹은 두목이 맞닥뜨린 건 바로 흩날리는 봄비를 맞으며 걸음을 재촉하는 길손의 처지와 그의 심경이었다. 행인의 마음은 바로 시인 두목 본인의 마음이나 심사임은 물론이다.
시의 구조를 분석해보자. “起”에 해당하는 첫째 구에서는 봄비 내리는 청명절의 길가 情景을 그렸다. 명절 거리의 정경 혹은 분위기를 다룬 셈이다. 첫구의 내용을 부연하거나 시의 분위기를 강조하거나 혹은 심화시키는 “承”의 둘째 구에서는 길 가는 행인이라는 인물을 넣어서 비 맞는 작중 인물의 처량하고 안타까운 심경(凄迷紛亂)을 독자들에게 상상하게 만든다.
반전이 일어나는 “轉”에 해당되는 셋째 구에서는 시 내용의 중점을 “凄迷紛亂”의 심경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는 점에 뒀다. 이어서 “結”의 마지막 넷째 구에 가서는 시의 주인공이자 두목 자신이랄 수 있는 행인에게 주막을 찾게 해서 안도하게 만든다. 이 시에는 “欲斷魂” 하나를 제외하고선 특별히 해석이 어렵거나 까다로운 한자는 없다. 또 옛날 고사나 전거가 인용된 것도 없다. 모두 평이하고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로 이뤄져 있다.
먼저, 봄비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紛紛”은 통상 중국어 어법상 눈이 흩날리는 것을 형용하는 단어다. 그런데 두목은 가는 빗방울이 어지러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한 겨울 눈이 흩날리는 것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紛紛”이 눈 내리는 것을 형용하는 단어임에도 두목은 이 단어를 봄비의 묘사에 사용했으니 말이다.
다만, “紛紛”은 큰 비가 아니라 작고 가늘지만 어지러이 흩날리는 비다. 비가 흩날린다는 의미의 雨紛紛의 비는 여름에 쏟아지는 폭우와는 다르고, 또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와도 맛이 다르다. 청명절에 쉼 없이 그치지 않고 내리는 이 같은 사나운 날씨에 길 가는 사람들은 기분이 가라앉게 마련이다.
“雨紛紛”은 바로 청명절에 쉼 없이 쏟아지는 비 그리고 그와 얽힌 사람들의 심경을 포착한 것으로서 바로 청명절에 빗속을 걷는 행인이나 시인 자신의 서글프고도 처량한 심정이나 처지를 암시해주고 있다. 시에서 행인이란 자기 고향에서 봄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지의 외로운 과객이다.
“路上行人欲斷魂” 구절 중 혼을 끊고 싶다는 의미의 “欲斷魂”은 상심이 극히 깊은 것을 형용하는 표현인데, 그 정도가 마치 혼백이 육과 분리될 만큼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 문맥상 혼이라는 글자는 ‘정신의 상태’와 관련이 있고, “斷魂”은 정신을 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 가다가 행인이 정신을 끊는다니 무슨 말일까? 이는 중국문학에 나타나는 한 표현으로서 빗길을 가는 사람이 서두르는 마음 상태가 넋 나간 듯이 절박하다는 것을 두고 “斷魂”이라는 단어로 형용하는 것이다. 비가 조금 내리는데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봄비이긴 하지만 눈처럼 휘날리듯이 사납게 오는 비를 맞다 보니 정신상태가 혼이 빠지거나 넋이 나간 것을 말한다.
특히 명절에 홀로 타향에서 길을 가다가 비를 흠씬 맞게 될 때 느끼는 심정과 연결 지어 보면 쉽게 마음에 다가올 것이다. 명절을 맞아 자신이 타관 땅을 홀로 돌아다니는 것도 서럽고 울적한데 봄비까지 사납게 흩날리는 빗길 속을 걷고 있는 심정은 어떻겠는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혼자서 길을 가다가 과객이 비를 맞고 지나가는 이 광경을 보거나 혹은 시인 본인이 직접 봄비에 적삼이 흥건하게 젖게 되면 어떤 심사가 될지 쉽게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서글프고 실의에 빠진 시인 자신의 마음을 길 가는 행인을 빌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가히 물아일치, 景心一如의 경지다.
借問은 請問과 뜻이 같다. ‘여쭈다’라는 의미의 동사다. 그런데 이 시에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 것일까? 이 질의에 대한 답은 우중의 과객이 처한 처지와 연결 지어야만 가능해진다. 청명절에 홀로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걸음이 다급해진 행인은 어떤 생각이 들까?
특히 그 행인이 술을 좋아하고 감정이 풍부한 시인이라도 되면 말이다. 분명 어디 가서 주막이라도 찾아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술을 몇 잔 들이키면 사나운 봄비를 맞아 으슬으슬해진 몸을 녹이고 젖은 옷도 말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다음 행로를 물어서 가던 길도 계속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 길이 고향을 찾아 가는 길이라면 더욱 근심과 객수에 젖게 될 수 있다.
시인은 제3구에서 독자들에게 묻는 형식을 취한 뒤 답은 마지막 제4구에 가서 목동에게 하도록 했는데, “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게” 만들었다. 목동은 어법상 이 구문의 주어이지만 동시에 제3구에서 행인이 묻는 대상자다. 하마터면 무언으로 끝날 이 시가 이런 문의와 응답으로 비로소 대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대화라고 하지만 목동이 말을 한 건 아니다. 단지 손으로 답을 한 것인데, 어쩌면 말로 답하는 것 보다 더 선명한 비주얼이 떠오르게 한다. 아마도 소리로 답을 하게 했다면 오히려 시적인 맛은 반감됐을 것이다.
“遙”는 멀다는 뜻의 “遠”과 같은 뜻이다. 즉 행화촌은 作中의 행인이 묻던 그곳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행화촌이 정말 거리가 아주 먼 곳에 있었다면 이 시를 지은 시인이 목동으로 하여금 손으로 가리키도록 했을까? 또 동시에 거리가 아주 가까운 눈앞에 행화촌이 바로 보였다면 손이 아니라 말로 “저기”라고 답했을 것이다. 즉 不遠不近의 거리다.
살구꽃 피는 마을인 “杏花村”은 현실에 존재한 진짜의 마을이 아닐 수도 있고, 꼭 주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과연 두목의 이 시 속의 杏花村이란 어디였을까? 상상의 산물일까? 행화촌은 봄이 되면 중국에선 시골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두목도 실제의 행화촌을 보고 시어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江南通志』에 두목이 池州刺史 시절 그곳 부근에 옛날 杜湖, 東南湖 등의 명승지도 있었다는 행화촌에 가서 술을 마신 바 있는데, 그곳을 가리킨다고 기록돼 있다니 말이다. 행화촌은 오늘날 安徽성의 貴池秀山門 바깥이라고 한다. 후대 중국인들이 “杏花村”을 주막집 이름으로 많이 사용한 것도 이 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시인은 실재하는 곳이긴 해도 독자들에게 행화촌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선사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봄이면 흔히 접할 수 있는 살구꽃 핀 마을로 시인과 독자가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바로 중국시학이나 미술에서 말하는 예술에서의 여백미, 다 틀어 막지 않고 여지를 남긴다는 “有余不盡”(not completely)의 경계가 아닐까? 간단하게 말해서 상상할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시의 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중국시학에서 옛 부터 좋은 시란 “묘사하기 어려운 정경을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듯 묘사하고, 다함없는 뜻을 품는 것은 언외에 있다”(狀難寫之景, 如在目前;含不盡之意, 在於言外)고 한다. 두목의 시 “청명”이 바로 묘사하기 어려운 정경을 묘사하고 있으며,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곳에 깊은 뜻을 함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올해 들어 새해 벽두부터 지금까지 중화권에선 사람들이 모든 것이 “올 스톱”된, “혼이 빠졌을 만큼” 중대한 위기를 겪었다. 지금도 종결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즐거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 청명절, 도처에 흩날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즐거움을 찾아보려고 해도 국가가 집에 틀어 박혀 나오지 말라고 하니 이래저래 낙이 없는 삶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우리 모두의 일이다. 인류 전체가 자업자득으로 겪는 공전의 위기다. 지구촌 곳곳에 흩날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언제나 사라질까? 살맛이 나지 않지만, 이번 기회를 전화위복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들의 비생태적, 반자연적 삶의 방식과 가치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바꿀 수 있는 깊고 지혜로운 성찰이 전 인류에게 진지하게 반영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 4. 4. 16:17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