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인물 및 리더십

평가가 상반되는 역사인물의 평가 : 바스코 다 가마의 경우

雲靜, 仰天 2020. 3. 18. 08:06

평가가 상반되는 역사인물의 평가 : 바스코 다 가마의 경우


통상 인간사에서 흔히 보는 현상이지만 역사에서도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 적지 않다. 누가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인물임에도 긍정과 부정, 호오가 완전히 갈린다. 충신과 간신, 애국자와 매국노, 걸출한 영웅과 용속한 필부, 선인과 악인, 功과 過, 공헌과 해악 등으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한국에선 국민적 역사의 영웅으로 존숭되고 있지만 일본에선 한낱 증오에 찬 테러리스트로 묘사되고 있는 도마 안중근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5천년 가난을 물리친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민주주의의 말살 내지 발전저해를 가져다준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동시에 존재하는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멀리 서구 역사로 눈을 돌리면, 그런 인물은 우리 보다 훨씬 더 많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으로 미국이라는 새로운 터전을 여는데 공로가 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절멸당하고 노예제의 시작으로 연결된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는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최초로 인도항로를 개척해서 동서양 교류의 물꼬를 튼 인물로 평가 되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는 어떨까? 평가가 상반될 때는 어떤 기준에서 봐야 할까?

노년의 바스코 다 가마. 포르투갈과 인도에서 평가가 상반되는 논란이 있지만, 포르투갈에게 엄청난 국부와 영화를 가져다 줘 한 시기 세계 최강의 열강국이 되게 해준 인물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바스코 다 가마를 두고 극히 상반된 의미를 지닌 행사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의 출발지인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Lisbon)과 종착지인 인도의 고아(Goa) 두 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포르투갈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를 기리기 위한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펼친 반면, 바스코 다 가마의 선단이 긴 항해 끝에 인도지역 중엔 처음으로 닿았던 인도의 말라바르(Malabar) 해안과 그 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고아에서는 그를 본뜬 형체를 만들어 화형시키고 포르투갈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검은 깃발을 들고 격렬한 시위행진을 벌였다.

유럽인의 기준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를 인류사에서 동서 회통의 물꼬를 튼 세계사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지만,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피침과 피착취의 고통, 폭력과 살상으로 얼룩진 식민지시대의 단초를 안겨준 침략자로 인식되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의 평가가 실제에 부합하는 것일까? 바스코 다 가마가 보인 행적을 뒤따라 가본 뒤에 결론을 도출해보기로 하자.

포르투갈이 대서양을 넘어 아프리카와 인도양으로 나아가게 된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 데는 정치적, 사회경제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여기에다 종교적 목적과 경제적 목적도 혼재돼 있었는데, 그것들은 포르투갈이 국가 차원에서 대양과 미지의 개척을 국가전략으로 삼은 성취동기였었다.

첫째, 종교적 동기 혹은 목적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했지만 국가생존과도 직결된 중대한 과제였다. 교황 주도의 십자군전쟁이 실패한 이후, 이슬람 세력의 유럽 팽창에 직면해서 크게 위축되어 있던 유럽사회에는 이슬람 세력 너머 어딘가에 예수를 믿는 “프레스터 존”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전설(Legend of Prester John)이 널리 퍼졌다.

프레스터 존은 유럽 사회에 아시아와 동방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세계 경이의 서』(이태리어 원어의 의미로 Book of the Marvels of the World and Il Milione, 영어로는 The Travels of Marco Polo로 알려져 있고, 우리에겐 통칭『동방견문록』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나와 있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라고 믿었던 곳은 당시 그들은 몰랐었지만 현재의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지역이었다. 포르투갈은 바다 너머 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찾아서 그 기독교도들과 힘을 합쳐 이슬람 세력들을 협공해서 이베리아 반도로까지 쳐들어와 있던 무슬림들을 쫓아낼 생각이었다.

둘째, 경제적 동기 혹은 목적이었다. 당시는 통상 터키 이동 지역을 일컫는 소위 “동방”이라는 중동지역에서 오스만 튀르크가 팽창하면서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까지 그 세력을 뻗어 무역을 독점하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시아로 통하는 육로의 무역로가 오스만 튀르크(Ottoman Turks, 또는 Turkish Empire라고 불리는데 영어식 표기임)세력에게 차단되고, 이슬람 상인들이 바닷길마저 장악해 북서 아프리카 상권까지 손에 넣고 있었다. 게다가 지중해의 반도 국가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과의 거리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살려 향료무역을 중개하면서 폭리를 취하게 됐다. 그러자 포르투갈에 들어오던 후추를 비롯한 각종 인도산이나 중국산 향신료의 수입량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유럽에서는 동물의 사료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겨울이 닥쳐오기 전에 가축을 모두 도살했지만 마땅한 냉장시설이 없어 보관이 제대로 안 돼 잡아놓은 고기가 자주 상하게 됐다. 그래서 후추는 이 상한 고기의 냄새를 없애거나 맛을 내는데 향신료로 요긴하게 사용됐으며, 또한 근대적인 숙성법이 없었던 당시 포도주를 발효시키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던 대단히 중요한 식자재였다. 그런데 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후추 등의 향료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육류 섭취를 많이 하는 유럽인들의 식생활에서 필수 불가결한 향료를 구하고자 한 간절한 열망은 이를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러한 움직임은 먼저 대서양 연안 국가 포르투갈에서 일어났다. 그것의 실행자는 15세기 초 포르투갈 국왕 후안 1세(Joan Ⅰ, 1357~1433)의 아들로서 포르투갈의 '항해왕'으로 불린 엔리케(Henrique O Navegador, 1394~1460) 왕자였다. 그는 먼저 대항해시대의 개막을 열게 된 뒤 포르투갈에서 남하하여 아프리카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면서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증대됐다.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항해왕 엔리케의 초상화. 리스본의 국립미술관(National Museum of Art, Lisbon)에 소장돼 있다.
북부의 항구 도시 포르투(Porto) 시내에 세워져 있는 후안 1세의 동상
말의 왼쪽 앞 발 하나를 들게 하고 고개도 아래로 숙이도록 표현함으로써 역동감을 느끼게 만든 점은 조형적 관점에서는 이채롭지만, 말 위에 탄 후안 1세의 움직임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포르투갈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동상. 수도 리스본과 포르투 시내 곳곳에는 국가의 상징적 인물처럼 그의 동상이 많이 보였다.

적도 이남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에서 마침내 1488년에 포르투갈 항해사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holomew Diaz, 1450~1500)라는 선장이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喜望蜂)을 발견하면서 미지 개척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는 듯했다.

그러나 1492년 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리고 어쩌면 ‘프레스터 존’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 시기 포르투갈 국왕 임마누엘 1세(Emanuel Ⅰ, 1469~1521)는 스페인에게 넘어간 신대륙 탐험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 국왕 자신의 숙원이던 인도항로 개척의 원정대를 꾸리고 그 책임자로 바스코 다 가마를 원정대장으로 임명했다.

1497년 7월 8일, 바스코 다 가마는 171명(168명, 170명이었다는 설도 있음)의 탐험대를 120톤급의 캐랙(carrack) 범선 2척, 50톤급 캐러벨(caravel) 범선 1척, 보급선 1척으로 된 총 4척에 분승시킨 선단을 이끌고 말로만 듣던 미답의 인도를 목적지로 리스본의 벨렘(Belém) 항구를 떠났다. 가마의 친동생 파울로(Paulo)도 4척 중 1척의 선장을 맡았다.

배가 50톤급이나 120톤급은 요즘 시대엔 큰 배는 아니지만, 그 시대엔 국민들의 탄성을 자아낼만큼 위용이 나올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배의 크기보다도 바스코 다 가마의 선단을 구성한 캐러벨과 캐랙이라는 배가 어떤 배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범선에 대해 이번 기회에 대략 한 번 훑어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다.

캐랙은 3개의 메인마스트와 6개의 돛을 지닌 대형 범선으로 15~16세기 경 스페인 등 유럽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배로서 그 후 등장하는 범선들의 기초가 된다. 삼각범과 사각범을 혼용하여 역풍과 순풍 모두 항해가 가능했으며,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했다. 캐랙은 점차 발전해 갤리온선으로 개량되는데, 이후 300년간 범선시대에 등장하는 모든 배들의 시초가 된 배였다.

캐랙 범선의 위용


캐러벨은 두 개의 마스트를 이용해 삼각돛으로 항해하는 범선으로 포르투갈에서 개발 된 삼각범만을 사용하는 배다. 삼각범은 역풍 항해에 유리하며 깊이가 작고 속력도 빨라 바람이 일정하지 않은 연안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캐러벨은 13세기에 어업용으로 사용하다가 점차적으로 연안 항해선으로 발전하게 되고, 15세기 경에는 항해왕 엔리케 왕자가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선으로 사용한 바 있다.

캐러벨 범선
바스코 다 가마가 이용한 범선을 모방해서 만든 배. 마스트가 3개로 삼각범을 사용하는 배다.
포르투갈이 바스코 다 가마의 "위대한 발견"을 기념해서 벨렘의 테주강변에 세운 기념건축물


자 다시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 주제로 돌아가서 얘기를 이어가자.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일찌감치 아프리카 시에라리온(Sierra Leone) 앞바다에서 오늘날 ‘상아해안’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서해의 연안을 따라 가지 않고 대서양을 향해 서쪽으로 틀어서 약 6,400km라는 긴 거리를 우회한 획기적 항법으로 동년 11월 22일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연안을 따라 북상해서 모잠비크(Mozambique)와 몸바사(Mombasa)를 거쳐 이듬해 1498년 4월 케냐(Kenya)의 마린디(Malindi)에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바다에서 북부의 항구 도시 포르투 시내로 들어오는 하안 항구의 전경. 아마도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의 출발지였던 당시 수도 리스본의 벨렘 항구도 이와 엇비슷한 전경이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사진 우측의 하구에 걸쳐 있는 다리는 아래 사진 처럼 오늘날엔 새로운 현대식 철골 구조의 다리로 교체돼 있을 뿐, 강안을 끼고 형성돼 있는 도시의 구조는 수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과거 수 백년 전의 전통양식의 다리는 위 사진에서처럼 포르투의 명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현대식 교량으로 탈바꿈해 있다.
바스코 다 가마도 이런 종류의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돌아 인도에까지 항해해 갔을 것이다. 위 사진은 포르투갈 여행 당시 포르투의 박물관에서 찍은 것으로서 과거 포르투 항구와 범선들의 모습이다.


그 보다 얼마 전, 모잠비크에서 바스코 다 가마의 선단은 이슬람교도들의 무력공격을 받아 범선 1척을 잃었지만, 마린디에서는 아랍인 항해사로서 인도의 계절풍과 인도양의 항로 및 계절풍을 잘 아는 숙련된 뱃길(水路) 안내자 이븐 마지드(Ibn Mājid)를 고용해 그의 도움으로 동북쪽으로 기수를 틀어 인도양을 횡단했다.

마침내 리스본을 떠난 지 꼭 316일 째가 되던 날인 1498년 5월 20일,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서 15km 떨어졌고, 마드라스(Madras)에서 서남쪽으로 666km 떨어진 오늘날 케랄라(Kerala) 주의 말라바르라는 곳에다 닻을 내렸다. 운이 좋게도 몬순으로 그곳의 항구들이 출항과 입항이 금지되기 직전이었다. 그들이 열병 및 괴혈병과 폭풍에 시달리며 약 2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항해한 거리는 물경 42,000km나 됐다. 지구 둘레의 정확한 길이가 46,250km이니 그들은 거의 지구 한 바퀴를 돈 셈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한 인도까지의 해로. 지도에 나타나 있듯이 가마는 서부 아프리카의 브랑코 곶에서 그때까지 해오던 대로 연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근해로 항해하지 않고, 대서양으로 나가서 거의 아프리카 남단까지 직달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또 아프리카 동해안에서도 말린디까지는 연안을 따라 북상했지만 그곳에서는 바로 기수를 북동쪽으로 돌려 인도양을 가로 질러 인도 남부 해안으로 항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항해에는 필시 기존의 항해술 보다 진일보한 항해장비와 기술들이 활용됐을 것임을 시사해준다.
바스코 다 가마가 포루투갈-인도를 왕복한 항로


후추가 들어간 음식이 로마에서 인기를 끌자 로마의 항해사들이 후추와 생강이 나는 인도로 가는 항로와 몬순 계절풍을 발견했다고 한다. 기원 전 1세기에 이미 해마다 20척의 선박이 로마에서 후추와 여타 향신료를 구입하러 후추 생산지인 인도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뱃길이 바스코 다 가마가 밟은 항로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가마가 이끈 선단의 일원으로 인도 서해안의 모래사장에 첫 발을 내디딘 일행 중 한 명은 “우리는 기독교인과 향신료를 찾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개월 남짓 말라바르 해안에 머문 바스코 다 가마는 항해의 원래 목적 중의 하나였던 기독교국가를 찾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단지 유럽에서 값비싸게 팔려나가는 향료를 구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전체 유럽인들이 소비한 향신료의 소비량이 600만 파운드에 달했던 유럽사회에서 4,000년 동안이나 약재와 요리의 향신료로 쓰인 후추가 인도 지역에서만 났기 때문에 가격이 높은 고가품이어서 종종 화폐로도 사용됐으니 말이다. 유럽에서 후추는 인도에서 구입한 가격보다 100배나 더 받을 수 있는 고가품이었다. 베니스에서 팔린 향신료 중 최고의 인기품목이었던 후추는 가격이 비싸서 “검은 황금”으로 불렸으며, 심지어 각종 뇌물로도 사용됐을 정도였다.

바스코 다 가마는 현지인을 매수해 후추무역의 중심지가 캘리컷이라는 사실을 탐지하고 그곳을 통치하던 힌두교도인 자모린 아흐마드 나갈플(Samoothiri, 영국식 Zamorin, 아랍어로는 Sāmuri, 포르투갈어로는 Samorim)이라는 군주를 찾아가 구리 대야, 산호 목걸이, 빨간 모자, 꿀병 등등 포르투갈에서 가져간 물건들을 선물로 주면서 교역관계를 틀자고 요청했다. 캘리컷을 찾던 모든 상인들에게 이슬람, 힌두교, 기독교 등이 혼재한 점을 감안해 종교적으로 중립 입장을 취하면서 캘리컷을 번성하는 무역항으로 키운 그곳의 군주 자모린은 처음 한 동안은 가마 일행에게도 호의를 보였다.

자모린. 실제 인물은 아니고 일본인 작가가 상상으로 그린 모습


그러나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 선단이 가져간 물건들이 자신의 물건 보다 볼품없고 조악한 것을 보고는 코웃음을 치면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슬람권 지역과 무역을 해오던 캘리컷 사람들에게 포르투갈 물건들은 전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중국 명나라의 대항해가 鄭和(1371?~1435)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발견한 말라바르 해안에다 인도발견을 기념하기 위한 대리석의 기념비를 세운 것도 자모린의 의심과 반감을 샀다. 자모린은 가마가 방문 기념비를 세운 뒤 향신료를 싣고 귀국을 준비하자 그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했다. 결국 통상조약은 맺지 못했다. 이유는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 그리고 무장한 가마 선단에 대한 지방 왕국 군주들의 경계심도 한몫했다.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그와 자모린의 사이가 우호적 관계에서 적대적 관계로 변하게 된 것은 중간에서 후추와 향료의 독점무역이 침해받을 것을 염려한 아랍상인들이 자모린에게 포르투갈 사람들은 도둑놈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쫓아낼 것을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자모린은 막강한 부에다 해외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한 아랍상인들을 무시하고 포르투갈인들과 무역을 할 수 없었고, 적대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바스코 다 가마는 자모린과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코친(Cochin) 왕국으로 건너갔다. 코친 왕국으로 건너간 바스코 다 가마는 캘리컷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코친왕국의 군주와 퀼론국의 여왕과 각기 무역협정을 맺고 그들로부터 말라바에서의 후추생산 및 무역의 독점권을 넘겨받았다.

어딜 가나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전선줄인데 리스본도 마찬가지! 조각상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은 물제는 전차를 움직이는 철제 와이어인 것 같다.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상들과 배흘림(엔타시스) 기둥이 새삼 돋보이는 리스본 시내의 개선문. 내가 실측해보니 여기서 항구의 부두까지는 불과 약 300m 정도의 거리다. 후안 1세든, 그의 아들 항해왕 엔리케 왕자든, 누구든지 해로 개척이나 미지의 탐험에서 성공하고 돌아오면 이 개선문을 통과해서 포르투갈 국왕을 알현했다. 인도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바스코 다 가마도 부두에서 내려 이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연도에 나온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조각이 마치 밀가루 반죽을 갖고 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표현돼 있다.
부두에서 개선문을 지나 과거의 왕궁으로 가는 길. 내가 현장을 답사해보니 지금은 리스본의 번화한 상가밀집 지대로 변해 있었다. 개선문 안쪽 도로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은 모두 각종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다.

15세기 당시 포르투갈이 거느린 해외의 식민지들(붉은 색)


1500년 3월, 포르투갈 국왕의 관심과 지원 속에 알바레스 카브랄(Alvares Cabral)이 포르투갈의 제2차 인도여행의 일환으로 인도에 13척으로 된 무장선단을 끌고 갔다. 그곳에서 그는 기득권을 빼앗길 지도 모를 캘리컷-포르투갈 간의 교역을 반대한, 캘리컷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럽에 대한 중개무역을 해오던 아랍 상인들을 죽이고 불태우는 등 무역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아랍 상인들 편에 섰던 자모린이 거주한 캘리컷에도 공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로써 그때까지 평화롭게 자유무역과 교역을 해오던 캘리컷 일대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향신료 무역은 포르투갈이 독점하게 됐다. 포르투갈은 단순한 무역의 차원을 떠나 크리스트교의 포교라는 신념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등의 이교도들과의 종교적 마찰도 잦았다. 이로 인해 카브랄이 인도에 남겨두고 온 포르투갈인들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1501년 6월, 리스본으로 돌아온 카브랄의 배에는 100톤의 후추와 적잖은 분량의 정향과 생강이 실려 있었다. 그 배에는 도자기와 향목, 진주, 다이아몬드와 루비도 있었다. 이 물건으로 남긴 순이익은 100배 이상이었다. 포르투갈 왕은 또 한 번 국가적 수준의 추수감사제를 열고 축하행사를 여러 주 동안 계속했다.

1502년 2월, 이번엔 바스코 다 가마가 자신의 생애 두 번째이자 포르투갈 국가로서는 세 번째 인도 항해를 개시했다. 이번 항해는 그 이전의 미지 개척을 위한 탐험과 기독교 국가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평화적인 항해가 아니었다. 그는 20척의 선단에 총과 칼로 무장한 병사들을 실어 인도로 갔다. 그는 먼저 인도 북부에서 380명의 순례자들을 태우고 귀국 중에 있던 이슬람 상선이 눈에 띄자 즉각 그들을 잡아서 재물을 빼앗고 배까지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까지 수장시켰다. 그의 함대는 비무장으로 평화롭게 자유무역을 해오던 아랍인과 인도인의 상선들에게 해적질도 벌였다.

캘리컷에서 다 가마는 코친군과 연합해서 자모린군을 공격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포르투갈식의 성도 축조했다. 인도양의 교역은 총과 대포를 실은 포르투갈 무장선과 요새화된 영토에 근거하게 됐다. 포르투갈은 해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로 모든 해상무역에 대해 통행세를 징수했다. 인도양에서 자유무역의 전통이 사라지고 무장 선박에 의한 교역이 시작됐다.

캘리컷에서 승리한 바스코 다가마는 엄청난 재물을 갈취하고 코친, 카나놀 등지에 포르투갈 무역소를 설치한 뒤 인도양에다 배 5척을 남기고 1503년 9월 후추와 생강 등 인도산 향신료를 배에 가득 싣고 귀국했다. 임마누엘 1세는 또 한 번 가마의 성공적인 인도양 개척과 부의 획득을 기념하기 위한 추수감사절을 전국에 선포하고 여러 날 동안 축하행사를 벌였다.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바스코 다 가마는 아랍의 이슬람 상인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자신들이 후추 향신료를 수입해 와서 포르투갈의 국가경제에 이바지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후추 무역의 중심으로서 유럽의 부유한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한 배경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 서북부 지역의 국가들과의 독점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바스코 다 가마는 백작에 봉해졌으며, 국왕 임마누엘 1세의 인도정책 고문으로도 위촉됐다.

리스본 시내 전경. 트램이라 불리는 전차가 시가지 곳곳을 다니고 있어 고풍스럽게 느껴진다. 트램을 타고 리스본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그 옛날 한 때 16세기 세계 최고의 강국이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흔적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나는 밤이면 리스본의 골목골목에서 흘러나오는 애잔한 가락의 전통곡 "파두"를 들으며 바스코 다 가마의 개선을 환영한 포르투갈인들의 인파와 갈채 소리를 상상하면서 리스본 거리를 유령처럼 배회했다.


인도 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남길 수 있음을 알게 된 임마누엘 1세는 2년 뒤인 1505년 아시아-유럽 간 향신료 무역을 왕실의 독점사업이라고 선언했다. 포르투갈은 1580년대에 가선 유럽에 수입된 후추의 75%를 차지함에 따라 향료무역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옮겨갔다. 당시 포르투갈은 세계 무역의 강대국이었다. 예컨대 조총의 수출도 포르투갈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인도와의 독점사업을 위해 포르투갈의 임마누엘 왕은 인도 서해안의 고아를 포르투갈령으로 만들어 그곳에 자국의 총독을 임명했으며, 대인도 향료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 밖에도 포르투갈은 홍해의 소코트라,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와 동인도제도를 손에 넣어 아랍상인과 베니스상인들의 향신료 무역에 대한 독점시대를 종식시켜 한동안 인도양의 패권을 장악했다. 나중엔 16세기에 들어오면서 포르투갈은 말래카와 필리핀을 점령하고 최종적인 목적지로 상정한 중국의 마카오로까지 들어가 이 지역들을 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포르투갈의 국부를 괄목할 만큼 신장시키고 나아가 유럽의 산업혁명이나 제국을 등장시킨 유럽의 변화에 기여한 바스코 다 가마는 거부가 됐고, 결혼 후 슬하에 6명의 아들을 얻는 등 인생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1524년 인도 총독(viceroy) 신분으로 인도 현지 포르투갈 식민정부의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코친에 다시 보내진 가마는 8개월 만에 노령과 과로가 겹친 데다 말라리아에 걸려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망했다. 64세의 일기였다.

유럽세력이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아서 정식으로 인도에 진출하게 된 서막을 연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의 부를 유럽으로 가져다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인도여행은 인도가 서구의 식민지가 된 불운한 역사의 시발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1612년 식민지 경쟁에서 포르투갈이 영국에게 밀려 인도에서 축출 당한 것은 그가 죽고 한 참 뒤의 일이었다. 이로써 정식으로 인도에 진출한 영국은 18세기에 들어가 인도경영의 경쟁자였던 프랑스까지 물리치고 인도에서의 독점적인 패권을 장악한 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 인도의 자원과 부를 유럽으로 실어다 날랐다. 인도는 그로 인해 상업자본의 본원적 축적 단계를 넘어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축에 편입돼 착취를 강요받음으로써 줄곧 빈곤국에서 헤어나질 못했으며, 이 상황을 지속시킨 영국의 인도식민지 통치는 20세기 중반 1947년까지 이어졌다.

지금까지 논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바스코 다 가마가 인류 최초는 아니었지만 국가의 국책 차원에서 동서양 항로를 개척해서 확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그 항로를 개척하지 않았더라도 그 뱃길은 이미 기원전부터 존재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기가 얼마간 뒤로 미뤄졌을 순 있어도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튼 공은 그다지 높게 평가할 필요가 없다. 그 보다는 그가 평화적인 인도양의 자유무역 제체가 위협 받고 현지의 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침략자였다는 점, 그리고 서구 국가들 사이에 인도와 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식민지 쟁탈의 경쟁시대를 연 사실이 더 크게 부각돼야 할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에 들어가선 원래의 여행목적이었던 기독교 국가의 발견과 기독교 전파 등의 종교적인 목적은 등한시 하고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과 힘을 쏟았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조국 포르투갈에는 국부를 크게 증대시켜줄 수 있었고, 16세기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작은 포르투갈을 일약 “유럽의 선두 주자”(foremost powers of Europe)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식민지 약소국 민중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들의 재산 착취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에 반해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사회적 발전을 견인할 서구의 선진적이고 유용한 이기나 혹은 무형의 사상 및 제도 등을 이식해서 근대화를 앞당기게 만드는데 일조한 것이 있었는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2020. 3. 18. 08:11
북한산 淸勝齋에서

2010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6박 7일 간 "나폴레옹시대의 전쟁 : 선행전투, 전투 그리고 지속적 충격"을 주제로 포르투갈 북부의 항구 도시 포르투에서 열린 제35차 세계 군사사학회(ICBM : International Commission of Military History, 1972년 창립)에 참가한 필자.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 이 학회에 같이 참석한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의 민항기 전쟁사 부장과 함께
대회 개막식에서 개회사 겸 축사를 하는 세계군사사학회 회장. 해마다 연례적으로 회원국들이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이번 대회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한국 등 세계 각지의 40여 개국에서 400여 명의 학자들이 참여해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대회 기간 동안 같은 참가자로 만나 자주 대화를 나눈 오스트리아의 대학 교수 부부
주최측 포르투갈 군사사학회가 준비한 다양한 식전 행사들 가운데 하나의 합창
중국대표단으로 참여한 중국군사과학원 연구원 일행 그리고 민항기 부장(가운데 베지색 양복)과 함께 어벙하게 선 멀대(맨 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