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일의 출발선, 일본정치의 중핵 천황을 알자! : 우리가 “천황제” 폐지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
지일의 출발선, 일본정치의 중핵 천황을 알자! :
우리가 “천황제” 폐지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
어제 나는 최근 동아시아 정세 변화를 거론하면서 일본에 대한 대항책의 하나로서 세세대대(천황가의 주장으론 “萬世一系”)이어질 “천황제”의 폐지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오늘 이 글에서는 내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주제가 주제인만큼 조금 긴 글이 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국체와 정체에 대해 가타부타 얘기하는 건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배치되는 행위다. 예컨대 태국인들에게 국왕을 없애고 공화정체제로 바꾸라고 한다거나, 네덜란드인들에게 국왕을 없애라든가 혹은 영국인들에게 국왕이 왜 필요하냐는 비난이 해당 국가들에겐 그야말로 상식 밖의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천황제를 폐지하라고 하는 주장은 여타 왕정국가 국민들에게 국왕제도를 없애라고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요컨대 천황이라는 존재가 과거에 한민족의 운명을 농락한 바 있고, 현재에도 많은 문제들이 그로 인해 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가능성이 내재돼 있는 이상, 결코 내정간섭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일본사회가 천황을 정점으로 그 아래 神道계열의 神社조직들, 경찰과 자위대라는 합법적 공권력 및 천황제도 옹호의 최전사 야쿠자 등의 극우(“우익”이란 말은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세력이기에 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세력을 지칭하는 경우 이 용어는 잘못 정의된 단어임) 세력 등 비합법적 폭력 및 공포의 연동된 힘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들에겐 천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천황제 자체를 없애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행위라는 것쯤은 알고도 남는다.
천황이 과거 일본제국의 침략역사에 대해 진심 어린 마음으로 반성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을 두고 현재의 천황은 다르다는 식으로 천황을 옹호하는 옹호론자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실, 지난 4월 왕세자 나루히또(德仁)에게 천황의 황위를 물려준 아키히또(明仁)는 과거 문제의 여러 전쟁들을 일으킨 당사자는 아니다.
1935년생인 아키히토는 부친 히로히또(裕仁)가 “玉音”이라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종전조서”를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고 제2차 세계대전 항복문서에 서명했을 때 겨우 11세의 아동이었다. 실제 대만과 조선을 침략해 강압적으로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과 미국 등 세계를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은 아키히또 가 아니라 다이쇼(大正) 천황으로 알려진 요시히또(嘉仁) 천황 그리고 쇼와(昭和)라는 연호로 1926년에서 1989년까지 재위한 그의 아들 히로히또(裕仁) 천황이었다.
자신의 선친과 달리 아끼히토는 중국 등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그 어떤 정치인보다 진솔하게 과거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또 그는 일본패전일이나 각종 행사의 기념사를 행할 때마다 정치인들과 언론을 향해 과거사를 잊지 말 것과 반성을 강조하고 평화를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이뤄지는 전범들이 합사 된 야스꾸니신사 참배행사에도 단 한 번 참석한 바 없다. 진정성이 엿보이는 바람직한 행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간의 일부 시민단체와 지식인들 사이엔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 내에선 이른바 “反天皇制運動連絡会”(反天連)가 대표적인 단체다.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 소수지만 약 30년 전부터 줄곧 “천황제 폐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들은 지난 4월 아키히또 천황의 양위와 함께 나루히또가 제126대 천황으로 새로 즉위함에 따라 “改元”이라는 시대가 시작되던 날에도 모여 천황과 천황제 반대를 외쳤다.
나 역시 천황제 폐지에 전적으로 찬동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천황에게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인간 존재의 평등, 민주, 인권의 가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존재라는 점이다. 셋째, 일본사회 내 중대한 제반 문제들은 대부분 천황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넷째, 향후 아베 총리와 아소 타로우(麻生太郞) 부총리 등 일본 극우 세력들이 추진해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도발의 구심점으로 이용될 미래 위험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자는 이유에서다.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좀 더 촘촘히 짚어보자.
첫째, 천황은 일본의 평화헌법과 정치체제상 전쟁도발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없고 내각의 총리대신이 책임을 지게 돼 있지만, 그래도 대외 침략전쟁을 일으킨 데에 대한 최종적 책임은 역시 천황에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청일전쟁에서부터 제2차 세계전쟁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천황”의 이름으로 일으킨 모든 전쟁은 천황의 재가가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천황의 존재는 사실 이름뿐인 虛君에 불과했고, 실제 통치권력은 막부(幕府) 수장인 쇼군(將軍)에게 있었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1860년대 말의 幕末에 이르러 서양문명에 경도되고 찬양한 일군의 서구론자들이 정변(메이지 明治유신)을 일으켜 이 이름뿐인 천황을 통치의 최고 주체로 등극시키면서 일본역사의 비극임과 동시에 동아시아역사의 지옥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서구 개화론자들의 근대화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이뤄짐에 따라 국가발전의 형태면에서 거의 레닌이 말한 제국주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일본은 국내의 제한된 노동력, 부족한 생산재와 좁은 시장으로는 지탱되지 않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고, 국가 통치권력을 장악한 군부 세력이 군국주의체제로 몰고 가 대외 침략전쟁을 일으켰는데 모두 자신들이 신격화시킨 천황의 신성 불가침적인 권위를 이용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천황은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실권이 없어서 그들에게 업혀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1920~40년대의『천황어록』을 중심으로 천황의 정치적 행위와 처지를 재검토해본 나로선 천황은 법리적으로도 최고의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호전적인 대외 침략론자들의 전쟁의지를 만류할 수 있었을 만큼의 권력은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만과 조선의 식민지화,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중국의 산동(山東) 지역을 침략하고 그 뒤 1920년대부터 시작한 만주침략, 나아가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중일전쟁, 1940년대에 들어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도발도 모두 천황의 이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부터 천황에게는 천황의 聖旨에 따라 전개된 聖戰을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권한이 주어졌고 위광이 형성돼 있던 상황이었다. 개전과 종전에 대한 선언을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 천황뿐이었다. 그럼에도 요시히토와 그의 아들 히로히토 두 천황이 각기 개전을 만류하거나 제어하지 못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섬약하거나 용약 했기 때문에 대본영 막하의 강성 장수들을 휘어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 책임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 마디로 나는 천황이 전쟁공범자였다고 본다. 그것도 주범이었다.
침략을 당한 조선인, 대만인들이나 중국인들과 여타 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천황의 이름 하에 일제가 1890년대에서부터 1940년대에 걸쳐 자행한 숱한 전쟁과정에서 국제법으로 금지돼 있는 반인권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우려면 가장 먼저 최고의 전범 수괴인 천황을 처단했어야 했다.
그런데 전후 일본에 대한 군정권을 손에 쥔 맥아더가 A급 전범 히로히또를 살려줬다. 이어서 공산화돼 가던 중국에 대한 봉쇄와 견제를 위함과 동시에 국내 일본인들에 대한 통치의 원활성이라는 미국의 국익을 고려해 천황을 존치시켜 버렸다. 한국과 중국이 처한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후 미국이 동아시아 정책에서 저지른 중대한 실수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대신 맥아더의 GHQ가 주도해 천황의 통수권이 명문화된 구 일본국헌법을 폐지하고 현행 일본국헌법(일명 “평화헌법”)을 제정했으며, 천황을 신적 존재에서 끌어내려 지상에 거하게 하면서 직접 통치는 하지 않는 권력자로 만들어 놨다.
천황의 권력 범위와 관련해 지금까지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상징”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조금 다르다. 여전히 천황은 헌법개정권에서부터 국회소집권, 중의원해산권, 비준서 및 외교문서의 인증, 외국대사의 아그레망 접수 등에 이르기까지 “국사행위”, “정치행위”를 행하고 있고, 일본국민들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베 신조, 아소 타로우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 극우세력이 한사코 침략의 과거사와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 천황의 시대착오적인 신성불가침적인 신성을 유지시켜 그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고 천황을 끝까지 받들기 위한 의도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천황이 있어야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이 유지되고, 천황이 없으면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의 원천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받들어 모시고자 하는 극우 세력들, 예컨대 모든 신들 가운데 천황을 정점에 둔 神道주의자들, 극우정치인 및 경찰의 치안권력과 큰 틀에서 공생관계에 있는 야꾸자들(대표적인 경우가 현 부총리 아소 타로우인데 그는 큐슈지방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한 거부로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야쿠자조직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고 공생관계에 있음) 그리고 과거 군국주의의 향수를 그리는 네오파시스트자들, 일본국수주의자들은 천황의 우산 아래 모여들고 천황이 있어야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아주 피동적이자 자기 가학적인 인간형들이다.
둘째, 천황제 폐지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천황의 존재 자체가 반인권적이고, 반문명적이고, 반생태적인 폭령성과 야만성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이다. 먼저 천황의 정체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역사적으로 천황은 인간이면서도 신성을 가진 ‘현인신’(現人神, 즉 사람의 모습을 한 신, 아라히또가미)으로 받들어진,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아주 독특한 존재다. 천황가는 전통적으로 자기 조상의 족보가 없거나 있어도 그것을 공개하지 않듯이 역사적으로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중세 시대엔 천황이 두 사람으로 갈려서 남북 두 나라(남조와 북조)로 병존한 적도 있었다.
일본 고대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역사서인 『古事記』와 『日本書記』의 암구호 같은 기록들이 시사하듯이 천황의 시조격인 아마떼라스 오오까미(天照大神)와 진구우(神功)황후는 사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무녀였다. 또한 제15대 천황으로서 사실상 천황의 시작이라고 얘기되고 있으면서도 실재성이 의심되고 있는 오우진(応神)천황 그리고 제26대 천황이라고 알려진 게이따이(継体) 천황도 모두 4세기 말~5세기 중반 한반도에서 건너간 소위 “渡來人”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선 이 글에선 자세히 거론하지 않겠다.
사람 모습을 한 신이라는 현인신은 주술과 미신, 神政 정치적 요소들이 혼재된 근대 이전 일본사회 내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 비과학적인 요인이나 동기들로 인간들이 움직여지던 근대 이전 은폐된 구중궁궐에 거한 천황은 신비적인 아우라가 더해져 어느덧 신적인 존재가 됐다. 백성들은 모두 그의 신민일뿐 그와 대등하거나 동등한 인간이 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주종의 신분관계가 먹혀들어서도 안 되고 통용되지도 않는 현대사회에선 천황은 시대착오적인 존재다.
나는 일본이 시민의 힘으로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半神半人의 천황이 번지수도 불투명한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개인의 진정한 자유, 민주, 평등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국가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일본이 안고 있는 잠재적인 인화성을 크게 우려하는 사람이다. 일본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고 시대에 걸 맞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민주주의 나라로 재탄생하려면 문제의 근원으로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천황제를 폐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일본이 폐기될 때까지 천황제는 존속할 것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셋째, 지금까지 천황이 일본사회의 각종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었고, 지금도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문제유발의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 오랫동안 일본사회에서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그들에게 숨 막히는 질곡이 됐던 이른바 “부라쿠민”(部落民)으로 상징되는 “차별문제”의 근원이 천황제도와 맞물려 있다는 게 좋은 예다. 일본사회는 겉으로 깔끔해 보여도 속으론 곪을 대로 곪아 있는 병든 사회다. 인간관계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속마음(혼네 本音)을 진솔하게 털어놓지 않는 불신의 사회다. 그렇게 된 문제의 깊숙한 근원에 천황이 皇居의 회랑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채 도사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일간 혹은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강제이주 및 강제징용 그리고 “일본군강제성피해여성” 문제 역시 천황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전자의 강제 이주 및 강제징용은 천황제 국가의 존속과 대외침략의 자본획득을 위해서 만든 것이고, 후자의 “일본군강제성피해여성”은 천황을 최고 군사통수권자로 받든 일본 군국주의의자들이 천황제 및 皇軍의 존속과 위안을 위해 강제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선 일본이 자랑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오에 켄자부로우(大江健三郞)도 주장했는데, “일본군강제성피해여성” 문제가 천황제와 깊이 연관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천황제까지 그 뿌리가 이어진 일본사회의 남성 중심주의가 부른 여성차별의 결과다. 범죄행위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충분히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여성을 경시하는 것이다.”
넷째, 향후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일본의 대외침략에 구심점으로 천황이 또 다시 이용될 것이라면 그것은 일본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일 공동의 과제이지 않는가! 일본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미래의 모든 문제, 모든 악의 근본을 도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때 일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키따 켄이찌(木田獻一) 전 릿쿄대(立敎大) 교수도 생전에 일본인들의 맹목적인 천황 숭배가 일본민족의 배타적 국수주의의 중핵이 될 것이라는 점을 직감한 듯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우리는 우상으로서의 천황, 그리고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미화시키는 야스쿠니의 사상,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싸워야 합니다. 우상화된 권력에 대한 투쟁 없이는 우리의 인권도, 자유도 참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스쿠니 반대투쟁을 벌이는 근거입니다.”
실제로 아베 정권이 극우세력과 함께 일본을 메이지 시대의 헌법체제로 복귀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아베 정권이 극우화에 필수적인 사상의 전범인 헌법개정안에서 통치는 국민이 뽑은 다수당에서 선임한 총리가 하고 제한된 권력뿐인 천황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승격시키는가 하면, 메이지유신 이래 군국주의로 치닫게 하는데 정신적, 사상적 토대가 됨으로써 악명을 날린 ‘교육칙어’까지 부활시키려고 획책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 세기 군국주의 도정에서 황국주의자들이 천황의 신성불가침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벌인 이른바 “국체명징운동”을 연상시키는 “국체사상”을 고취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國體란 곧 천황제를 가리킴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처럼 지난 세기, 일본이 걸은 군국주의자들의 행보와 현재 아베의 행보를 종합해보면 천황이 대외전쟁의 명분과 결집의 구심점으로 또 다시 이용될 것이라는 나의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길게 논한 바대로 천황제를 비판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현재적 정당성이 확보돼 있다 하더라도 실제 천황제의 폐지를 주장하기란 정말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일본 국내에는 천황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 하고 있는 분위기가 여전히 압도적이다. 따라서 천황을 비판하면 일본 국내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거의 오차 없이 내다볼 수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일본국내 문제를 넘어서 한일 간에 혹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외교문제가 될 수 있어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는 관성이 붙어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천황제는 외부적인 충격을 받지 않고선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현대사에서 천황제가 존폐의 기로에 서서 내외의 도전으로 천황제가 사라질 뻔한 두 번의 기회가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은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맥아더가 없애려고 검토한 바 있었고,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1910년대에서 20년대에 걸쳐 레닌과 스탈린 시대 어간에 소련공산당이 배후조정을 한 코민테른 내 지노비에프(Grigorii Evseevich Zinov'ev, 1883~1936)를 비롯해 일군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일본의 천황제를 없애야 일본의 공산화가 용이하다고 강력하게 역설했을 때였다.
이 주장에 따라 일본공산당 내에서 천황제 존폐 여부를 당의 노선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결국 일본공산당 기본방침(1927년 테제, 1932년 테제)에서 일본의 국체를 “절대주의적 천황제”로 규정하고 천황을 “혁명으로 타도할” 대상으로 삼았다가 치안유지법에 따라 단속에 쫓기면서 탄압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패전 후에도 천황제가 존속됨에 따라 일본공산당은 “천황제 타도”를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당시 일본공산당 당수 미야모또 켄지(宮本顕治) 위원장이 “헌법 제9조 등의 평화조항만이 아니라 상징천황에 관한 조항을 포함해 현행 헌법을 전면적으로 옹호한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도 일본공산당은 천황제 폐지는 절대 입 밖에도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 강령으로 삼는 순간부터 일본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황제가 사라지거나 일본인들이 없애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기대하는 것은 태평양의 바닷물이 다 마르기를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제 폐지는 일본시민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시민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것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집요하게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듯이 우리라고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근래 강대국들 사이에 실행되고 있는 “선제공격” 보다 한 단계 더 빠른 “예방공격”이 통용되고 있듯이 우리는 논리적, 법리적 근거도 갖고 있는데 말이다.
이와 관련해 사회일각에선 일본사회에는 시민사회가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천황제 국가의 군국주의 노선은 시민사회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도 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즉 그들은 평화 시기인 지금은 이런저런 생각과 말들을 자유롭게 쏟아내고는 있지만 상황변화에 따라 지속성이 의심될만큼 견고하지 못하다.
시민세력의 힘이란 게 과거에는 더 취약했고 특히 전시엔 정부에 대항할 만큼 강하게 뿌리 내릴 수 없었는데 그 토대는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지난 세기 군부, 즉 천황주의로 무장한 군국주의자들이 벌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도발을 당시 일본 시민들이 처음엔 반대하는 기류가 있었지만 사회와 국가 전체가 폭력적 파시스트체제로 나아가자 하나 같이 그 서슬이 무서워서 막지 못하기는커녕 오히려 광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전쟁이라는 비상시, 위기시에 총칼을 들이대는 폭력 앞에선 개인이나 시민사회는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교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민주주의의 싹이 꺾인 “大正데모크라시”가 유의미한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바로 극우파들의 테러라는 무력 앞에 개인은 파편화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작금 일본이 과거의 그러한 사회로 치닫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사정들이 바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힘을 합쳐 연대하고 또 합심해서 일본의 극우화를 저지해야 할 이유다. 아키히토 천황 퇴위 후 아베정권의 극우화 행보를 주시해야 할 소이연도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의 시민사회가 주도적으로 천황제 폐지 주장에 앞장 설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과거사나 현재 이념적 상황 및 도덕성 측면에서 봤을 때 한국이 이 주장을 앞장서서 자신 있게 개진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2019. 8. 29. 09:32
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硏究室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