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 전쟁비용으로 얼마를 썼을까?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 전쟁비용으로 얼마를 썼을까?
전쟁비용은 전쟁수행 뿐만 아니라 전쟁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3년 1개월여 동안 치러진 한국전쟁에서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남·북한, 미국, 중국이 쏟아 부은 전쟁비용은 얼마나 됐을까? 또한 멀찌감치 막후에서 북한을 지원한 소련이 사용한 전쟁비용은 어땠을까?
이 국가들 외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투병을 보내 참전한 여타 영국, 프랑스 등을 포함해 자유진영 국가들의 전쟁비용까지 모두 더하면 전체 한국전쟁의 비용은 천문학적인 규모가 될 것이어서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참전 각국 혹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진영별 전체 전쟁비용으로 얼마가 쓰였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도 세세하게 연구된 바가 없는데다 학자들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중공군의 전쟁비용 자료는 전모를 파악하기엔 불충분하다.
북한군의 전쟁비용에 대해선 이 보다 훨씬 더 파악하기 어렵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김일성 침실에 소장돼 있었다고 알려진 대량의 한국전쟁 관련 극비문서들이 공개되지 않으면 북한군의 전쟁비용은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공개된다 한들 그러한 극비 문서들 중에 전쟁비용을 산출해놓은 문서가 꼭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몇 년 전, 필자는 한국전쟁 저서에서 한국군과 중공군이 사용한 전쟁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적인 액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본 수치를 밝혀낸 바 있다. 결론부터 앞당겨 얘기하면, 한국의 전비는 전쟁 기간 매년 평균 약 3,000만 달러 정도였고, 중공군의 전비는 1951년의 경우 인민폐 58조 위안이었다. 그 근거는 무엇이었으며, 1951년만이 아니라 중공군의 전체 전쟁비용은 얼마였을까? 과거 한국에 미국의 군사원조를 나타낸 아래 표를 보고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연도 | 전체 원조액 (USD) | 미 국방부 원조액 (USD) |
1950 | 8억 429만 3,137 | 3,527만 6,015 |
1951 | 6억 9,853만 7,829 | 4,693만 6,138 |
1952 | 11억 4,293만 4,354 | 1,206만 6,878 |
1953 | 12억 9,338만 3,053 | 2,656만 1,757 |
출처 : 서상문, 『6·25전쟁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년), 상권, 267쪽 ; USAID 웹사이트 (https://explorer.usaid.gov/aid-trends.html)
한국군 측 전비는 유엔군 작전상 국내에서 드는 경비 일체를 한국 원화로 지불해준 이른바 “유엔군 대여금”(“유엔군 貸上金”이라고도 함)으로 충당됐다. 이는 1950년 7월 26일자로 한미 간에 체결된 “유엔군 경비지출에 관한 한·미협정”(일명 “대구협정”)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비군사적이고 인도적 원조를 집행한 주무부처인 ‘USAID’가 대한국 군사원조비를 집행했다. 이 표에서 미국이 USAID를 통해 한국에 지원한 “전체 원조액”이란 국방비, 군사원조비, 산업원조비 등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쟁물자 제공을 포함한 전쟁비용은 위 표의 오른쪽 국방비용으로 충당됐을 것이다.
전쟁 초기 10만 명도 채 안된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선 한국군은 전쟁 전체 기간 동안 병력이 가장 많았을 때가 휴전조약 체결 시 대략 55만 명을 조금 웃돈 정도였다. 이 정도 규모의 한국군에 소요된 전쟁비용이 전쟁이 반년 밖에 되지 않았던 전쟁 첫해인 1950년은 제외하고 1951년과 52년 이태 동안 평균 약 3,000만(2,950만) 달러 정도였다면,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순 없지만 병력이 최대 330여만 명까지 팽창된 바 있는 중공군의 전비는 한국군 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은 최초 25만 748명이 북한에 들어온 뒤 무기 장비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미군에게 병력수로 맞섰다. 이른바 인구에 자주 회자되는 ‘인해전술’이었다. 마오쩌둥은 1951년 중반기부터 1953년 7월 말에 이르기까지 중국본토와 북한 지역 사이를 번갈아 전장에 투입시킨 소위 “윤번작전”을 실행시켰다. 이 윤번작전에는 보통 중공군만 100만 명이 투입됐고, 최고로 많았을 때는 지상군만 27개 군단, 1개 사단, 3개 연대에 총 병력이 300여만 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중공군에게 병력 수에 비례해 공급해야 할 식량과 부식 등의 병참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군량미의 경우 1950년 10월부터 1952년 초까지 트럭 192대분 6,000여 톤이 소요됐다. 이러한 군량미는 병력 수의 증감에 따라 규모가 조금씩 달랐지만 공급은 휴전이 될 때까지 지속됐다.
군량미 한 가지만으로는 전쟁을 치를 순 없고, 여타 소요되는 전쟁물자들이 대단히 많았다. 전장에 주둔하는 병사들이 입고, 먹고, 자고, 전투를 치르는데 필요한 모든 병참비용은 물론, 여기에다 군량미 보다 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소련제 무기 장비의 구입비까지 더하면 전체 전쟁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근 5년간 국공내전을 치른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은 이처럼 수백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치를 수 있을 만큼 국가재정이 넉넉했을까? 답은 지극히 회의적이다.
압록강을 건너와서 전쟁을 수행하던 중공군이 사용한 전쟁경비가 얼마였는지 정확한 액수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은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의 檔案館(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이 문서들을 개방할 리가 없다. 그래서 현재로선 입수 가능한 자료로 중공군의 전쟁비용 규모를 추론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현재까지 사료상에 나타난 바로 마오쩌둥이 전쟁비용을 언급한 것은 1951년 2월 14일부터 18일까지 열린 중공 중앙정치국회의에서였다.
가오강(高岡),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시중쉰(習仲勛)을 포함한 총 24명의 당·정·군 고위 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국제정세 및 미국의 한반도정책 그리고 1951년도 재경예산 문제에 관해 중공 각 지역 중앙국의 보고를 청취했다.
이 회의에서 국가경제정책 차원에서 “3년 준비, 10년 경제건설계획”이 논의됐는데, 분명 중공군의 한국전쟁 수행에 필요한 경비문제도 논의됐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밝힌 바로는 1951년 중국정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쓴 전쟁비용은 당시 인민폐로 58조 위안이었다. 이는 중국정부가 그해 1년 동안 국내건설에 사용한 경비와 대략 같은 금액이었다. (출처 : 軍事科學出版社, 中央文獻出版社編, 『建國以來毛澤東軍事文稿』, 中卷).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부터 초기 자본가계급의 자산을 동결하고 통제해 나가는 과정에 있던 중공 중앙은 국가재정 면에서 상당한 부담과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당시 국가건설에 드는 비용은 정부 주도의 증산절약 운동으로 마련하고, 군사비는 국방비로 책정된 정부예산을 기본으로 하며, 일부일지라도 반부패, 반낭비 운동이 중심이 된 이른바 ‘3반’(反貪汚, 反浪費, 反官僚主義), ‘5반’(反行賄, 反偷稅漏税, 反偷工减料, 反盗騙國家財産, 反盗竊國家經濟情報)운동으로 절약시킬 생각이었다.
당시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이 북한 주둔 중공군을 대상으로 군내 부패를 청산하자는 반부패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이유도 전쟁비용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고위 지휘관들이 착복한 부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나아가 국가재정문제와도 깊이 관련돼 있었다.
1951년도 전쟁비용 58조 위안을 기준으로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한 약 33개월 동안 사용한 전체 중공군의 전쟁비용을 추산해보면 총 164조 3,332억 위안이 된다. 물론 이 수치는 정확한 액수는 아니고 대략적인 추정치일 뿐이다. 마오쩌둥이 구체적인 전쟁비용이라고 밝힌 1951년도분 58조 위안을 12개월로 나눠 1개월 평균치인 4조 8,333억 위안을 단순히 전체 중공군의 참전기간 33개월로 곱해서 나온 금액이다. 이는 또 1952년에도 동일하게 58조 위안을 썼으며, 1953년에도 58조 위안의 1개월 평균치를 썼을 것이라고 가정한 액수다.
상기 58조 위안은 1950년 3월 13일 당시 미화 1달러가 중국인민폐로 4만 2,000위안이던 환율로 계산하면 약 13억 8,000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13억 8,000만 달러는 같은 1951년에 미 국방부가 한국군에게 군사비로 지원한 약 4,693만 달러 보다 얼추 29.5배나 많은 금액이다. 이는 병력수가 최고로 많았던 시기 330만 명의 중공군이, 한국군의 병력이 가장 팽창됐을 때인 55만 여명 보다 6배가 많았던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히 많은 전쟁비용을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당시 막대한 군수물자의 소요에 따른 전쟁물자의 심각한 부족과 재정곤란을 겪었다. 이는 전쟁개입 첫해와 그 이듬해인 1951년 상반기만 해도 휴전을 극구 반대한 마오쩌둥이 그 뒤 휴전을 적극적으로 성사시키려고 했던 속사정 가운데 하나였다. 이처럼 전쟁비용은 한국전쟁의 전체 흐름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국정부의 재정능력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거액을 참전비용으로 썼지만 중국이 거둬들인 것은 많은 중공군 병사들의 부상과 사망을 대가로 붕괴 직전의 북한정권을 구원해줌으로써 남북한 통일을 가로 막은 것뿐이었다.
2019. 6. 23. 21:4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