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마의 흰 매화(湯島の白梅)
유시마의 흰 매화(湯島の白梅)
먼저 아래의 노래부터 한 곡 들어 보자.
느낌이 어떤가? 위 노래는 작사가 사에끼 다까오(佐伯孝夫, 1902~1981)가 작사한 가사에다 작곡가 시미즈 야스오(清水保雄, 1910~1980)가 곡을 붙인 ‘유시마의 흰 매화’(湯島の白梅)라는 일본노래다. 원곡은 원래 오바따 미노루(小畑実, 1923~1979)라는 가수가 불렀지만 위 노래는 츠루따 고우지(鶴田浩二, 1924~1987)라는 가수가 부른 것이다. 오바따 미노루에 대해선 후반부에 가서 다시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할 것이다.
湯島の白梅는 애틋하게 서로 사랑하면서도 외부 사람들의 음모와 강압 그리고 고아인 자기를 데려와 기르고 가르쳐 준 은인이자 은사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남녀 간의 이별을 표현한 노래다.
湯島の白梅
湯島通れば思い出す
お蔦主税の心意気
知るや白梅玉垣に
のこる二人の影法師
忘れられよか筒井筒
岸の柳の縁むすび
かたい契りを義理ゆえに
水に流すも江戸育ち
青い瓦斯灯境内を
出れば本郷切通し
あかぬ別れの中空に
鐘は墨絵の上野山
위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유시마의 흰 매화
유시마를 지나면 생각난다.
오쯔따와 치까라의 마음을
흰 매화는 아는지 모르는지
돌담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
잊을 수 있을까 즈쯔이즈쯔를
벼랑 끝 버들가지에 맺은 인연이건만
굳게 맺은 맹서를 의리 때문에
물에 흘려보내도 찌까라는 동경내기
푸른 가스등이 있는 경내를 나오면
홍고우의 산을 깎아서 낸 길
열리지 않은 이별의 중천에
종은 수묵화처럼 우에노산에 울린다.
에도(江戸)시대에서부터 유시마신사에는 몬젠마찌(門前町, 절이나 신사 앞에 이뤄진 마을)가 생겨나 오까바쇼(岡場所)를 비롯한 환락가가 형성돼 있었는가 하면, 학문적인 분위기가 나는 남쪽의 오차노미즈(お茶の水) 보다 오히려 더 학문과 관련된 곳이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오까바쇼란 에도시대 바쿠후(幕府)에서 유일하게 공인해준 ‘유조야’(遊女屋, 女郎屋라고도 함)들이 모인 유곽인 요시하라(吉原)와 달리 공인받지 못한 私娼屋들이 모여 있던 유곽거리를 말한다.
오쯔따찌까라(お蔦主税)는 이즈미 쿄우까(泉鏡花 1873~1939)가 1907년에 발표한 온나께이즈(婦系図 おんなけいず)라는 장편소설의 남녀 주인공인 오쯔따(お蔦)와 하야세 치까라(早瀬主税)를 가리킨다.
시라우메(白梅)는 매년 이른 봄이 되면 우메마쯔리(梅祭り)가 열리는 湯島신사의 경내에 있는 약 400그루의 매화나무를 가리킨다. 이 신사의 흰 매화가 유명하게 된 것은 소설 온나께이즈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 치까라와 오쯔따가 이 신사의 흰 매화꽃이 폈을 때 비극적으로 헤어진 이별이야기가 펼쳐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즈쯔이즈쯔(筒井筒)는 원래 관우물의 안벽을 가리키는데, 이 가요에서는 유시마신사 부근에 있는 지명을 말한다. 本郷는 유시마신사에서 나가면 보이는 거리이름이며, 우에노야마(上野山)는 유시마 근처 우에노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노래의 동영상을 보면 노래 가사에 나오듯이 파란 가스등이 보이는데, 이것은 유시마신사의 경내에 있는 모양이다. 또 동영상 후반에는 청둥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물위에서 유유히 노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곳은 유시마신사 부근의 不忍池라는 연못이라고 한다.
이 가요가 생겨나게 된 원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고아였던 자신을 거둬서 대학까지 공부시켜준 스승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남자 주인공 하야세 치까라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애인 오쯔따와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의리와 애정 사이에 선 치까라는 오쯔따를 유시마의 경내로 데려가서 자기와 헤어져주라고 부탁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오쯔따도 그것이 치까라의 스승 사까이의 엄명이란 것을 직감했다. 치까라는 오쯔타와 참으로 헤어지기 싫었지만 스승의 분부 때문에 속마음과 달리 헤어지자고 해서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매몰차게 결별을 고한 뒤 일을 구실로 고향인 시즈오까(靜岡)로 이사를 가버렸다. 이별과 함께 혼자 남겨진 오쯔따는 밤낮으로 헤어진 치까라를 생각한 나머지 병을 얻어 결국 자리에 드러눕게 됐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사까이는 과거 게이샤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았으면서도 학문을 위해 여자를 버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오쯔따의 심정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중태에 빠진 오쯔따의 병상을 찾아간 사까이는 “오쯔따, 하야세가 왔다. 여기 있어”라며 힘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영혼을 치까라에게 보내 치까라를 없애려고 약에 독을 탄 잔을 마시지 못하도록 제지해 애인을 살려놓았다. 이윽고 시즈오까의 치까라가 고열로 가노 가문의 병원에 실려 가자 오쯔따의 위독을 알리는 급전이 날아들었고, 치까라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오쯔따는 미소를 지으면서 사까이의 팔 안에서 막 숨을 거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 온나께이즈는 위 얘기 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도로 전개된다. 하지만 여기선 가요 ‘유시마의 흰 매화’를 소개하는 게 주된 목적이어서 소설의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복수극에 대한 복잡한 얘기는 생략했다. 전체적으로 여자 주인공 오쯔따가 동거한 애인 치까라와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별하게 된 뒤 병으로 몸져누웠다가 이내 운명적으로 죽고 마는 스토리가 너무나 애련하다. 그러한 애처로움이 이 노래에 배어 있기 때문에 감상시에도 이 스토리를 생각하면서 듣는 게 좋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노래에 얽힌 특이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가요 ‘유시마의 흰 매화’를 불러 크게 히트 친 오바따 미노루라는 가수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살면서 친일 행위를 한 재일교포 출신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바따 미노루의 본명은 강영철(康永喆)이었다. 이 노래는 1942년 10월, 그가 일본인 여가수 후지와라 료꼬(藤原亮子, 1917~1974)와 함께 영화 온나께이즈(婦系図)의 주제가로 부른 ‘온나께이즈의 노래’(婦系図の歌)의 다른 이름이다.
1923년 4월 30일 평양에서 태어난 강영철은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1937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죠센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데에서 오는 따돌림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오바따 미노루'라는 일본이름을 쓰면서 아키따(秋田)출신이라 자칭했다.
그는 고학으로 음악학교를 다니면서 오쿠따 료조(奥田良三, 1903~1993), 요쯔야 후미꼬(四家文子, 1906~1981) 등에게 발성지도를 받는 등 성악을 공부했다. 강영철은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대중음악 작곡가 에구찌 요시(江口夜詩, 1903~1978)의 지도와 소개로 음악회사와 계약을 맺고 대중가요 가수가 되었다.
1941년 2월, 강영철은 포리들 레코드사에서 징기스칸(成吉思汗)을 취입해 데뷔했고, 이어서 박차 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부른 ‘유시마의 흰 매화’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어서 그 이듬해 2월에 역시 후지와라 료꼬와 함께 부른 영화 이나노 간따로(伊那の勘太郎)의 주제가인 ‘간따로 달밤의 노래’(勘太郎月夜唄)로 또 다시 인기를 얻어 정상급 가수가 되었다.
강영철은 울산 출신으로 일본에서 큰돈을 번 재일교포 재력가였던 徐甲虎의 사위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지만 서갑호는 오사까에서 사까모또 에이이치(阪本栄一)라는 자신의 일본 성을 따서 阪本紡績을 세워 방적사업에 크게 성공한 기업가였다. 강영철의 처 사까모또 후미꼬(阪本文子)는 서갑호와 朴外得 사이에 난 딸로서 1955년 여름 13선의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낸 오노 반보꾸(大野伴睦, 1890~1964)의 중매로 강영철과 결혼했다. 서갑호는 그 뒤 현재의 주일 한국대사관의 부지를 한국정부에 기부했고 그의 회사 사까모또 방적은 1974년에 도산했다.
강영철은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계속 일본에 남아서 가수로 활동하면서 일제 때 유명세를 탄 데이치구 레코드사, 킹 레코드사, 콜롬비아 레코드사 등으로 소속을 옮겨 다녔다. 1951년 그는 다시 빅타 레코드사 소속으로 돌아가 ‘런던의 길모퉁이에서’, ‘고원의 역이여 안녕’을 비롯해 1953년 7월 ‘꽃의 삿갓’(花の笠), 1954년 6월 ‘산들바람의 비긴’(そよ風のビギン, ビギンBEGIN은 오끼나와 출신의 유명한 3인조 아코디언 밴드를 말함) 등등 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강영철은 1953~57년까지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가요 방송 프로그램인 NHK방송의 가요 홍백전(紅白歌合戦)에도 출연했다.
은퇴 직전인 1957년 가을, 오바따 미노루는 다른 재일교포 대중음악가들과 함께 모국방문 공연을 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무슨 연유였던지 1957년 돌연 연말방송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에서의 가수활동을 중단했다.
그런데 1965년 강영철은 다시 한국에 귀국해서 본명인 강영철(불사조)로 ‘유시마의 흰 매화’를 부르면서 잠시 체류하는 동안 공연활동과 함께 노래로 취입했지만, 레코드는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이유는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일본군가를 많이 부른 사실이 알려져 친일파로 밝혀진 게 결정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바따 미노루’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강영철도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다른 인기가수들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일본군가를 취입했다. 그가 불렀던 것으로 확인되는 군가는 상당히 많다. 1941년에 부른 ‘남진의 노래’(南進の唄), 1942년의 ‘일억총사BB군’(一億総士BB軍), ‘해군지원병’(海軍志願兵), ‘세기의 결전’(世紀の決戦), ‘빛나는 해상봉쇄’(輝く海上封鎖), ‘싱가포르 함락의 노래’(シンガポール陥落の歌), ‘만세! 함락’(万歳! 陥落), 1943년에 부른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海の荒鷲, 즉 해군 비행사를 가리킴), ‘해군혼’(海軍魂), ‘항공결전의 노래’(航空決戦の歌), ‘새벽의 교환선’(暁の交換船), 1944년 ‘응진사의 노래’, ‘인도궐기의 노래’(印度蹶起の歌) 등등이 있었으니 한 두 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1969년 강영철은 일본에서 다시 가수로 복귀했고, 1976년에 발표한 ‘온천 거리의 가을비’(湯の町しぐれ)로 재차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3년 뒤인 1979년 4월 24일 돌연 급성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지천명을 갓 넘긴 53살이었다.
이제 이 노래에 얽힌 일화를 알게 됐으니 친일파 오바따 미노루가 아닌 모두에서 소개한 츠루따 고우지 등 일본 가수가 부른 ‘湯島の白梅’를 다시 들어보자. 느낌이 새로울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비록 음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내가 용감하게 불러 본 곡을 갸륵하게 들어 봐주면 좋겠다. 직업 가수가 부른 노래부터 들으면 너무나 비교가 되니 말이다. (내가 부른 노래는 나중에 붙여놓겠다.)
혹시 유시마신사나 이곳의 우메마쯔리를 보고자 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을 위해 간단한 길 찾기 안내를 하면 다음과 같다.
주소는 文京区湯島 3-30-1이며, JR선으로는 御徒町역에서 내려 도보로 7분, 전철로는 치요타(千代田)線을 타고 湯島역에서 내려 도보로 2분이 걸리고, 긴자(銀座)線의 경우 上野広小路역에서 도보로 5분, 오에도(大江戸)線은 上野御徒町역에서 도보로 5분, 마루노우찌(丸の内)線은 홍고우(本郷)3丁目역에서 걸으면 7분이 걸린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다른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 03-3836-0753으로 문의하거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http://www.yushimatenjin.or.jp/main.htm
2019. 2. 23. 11:23
臺北 寓居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