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요 엔까는 듣거나 불러선 안 되는 것인가?
일본 가요 엔까는 듣거나 불러선 안 되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 아직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일본어 용어들을 쓰지 말자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우리사회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제거하자는 취지에서란다. 그래서 당연히 일본 노래도 불러선 안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왜 그럴까?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내 입장을 이야기하면, 나는 일제의 과거 침략사를 옹호하지도 않거니와 친일파들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보면서도 일본의 장단점은 제대로 알고, 배울 게 있다면 배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장점과 강점을 국익과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충분히 배우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 방법이라든가 내용에서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방법과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감정에 치우쳐 근거 박약하게 일본을 비난하거나,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의도에서 일본과 관계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두 맹목적으로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닐뿐더러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본에 관광도 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일본 배척론자로 볼 수 있다. 그런 논리라면 한국에 오는 일본인들의 관광도 막아야 할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도 다 일본으로 내보내야 되지 않겠는가? 또 일본식당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가 다른 나라에 더 많이 수출하기 위해 일본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부속품이나 원자재와 기자재들의 수입까지 금지해야 되고,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산 수산물은 하나도 먹지 말아야 된다. 물론 후쿠시마 피폭으로 오염된 수산물은 배일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수입을 전면 금지해야 하는 건 맞다.
동일한 논리로, 일본에 수출되고 있는 한류 풍의 영화, 드라마, 가요, 각종 문화 공연 등도 일본에는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일본 것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 것은 일본에 소비하도록 하겠다면 그것은 얌체 같은 생각이 아닌가? 문화든, 경제든, 인적 교류든 모두 대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한다.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이어선 바람직한 현상도 아닐 뿐만 아니라 좋지 못한 종속의 결과를 남길 수 있다.
과연 요즘 같이 구조적으로나 혹은 비교우위에 따라 각국이 서로 불가피하게 相依相存할 수밖에 없는 지구촌시대에, 그런 식으로 내왕이 일반화된 지 오래돼 그 필요성과 실효성이 입증된 국가 간의 국제무역, 인적 교류 및 문화교류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 혼자만 담을 쌓고 지낼 수 있을까? 이러한 21세기 현대판 쇄국은 불가능하다는 게 답이다. 아니 중학교 학생들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만약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일본배척론자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는 수많은 한자어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 중엔 일본어에서 들어온 것들이 부지기수다. 그것들은 모두 과거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어들이다. 가령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정부(政府), 납세(納稅), 은행(銀行), 가로등(街路燈), 신작로(新作路), 수은등(水銀燈), 전기(電氣), 전선(電線), 전신(電信), 전신주(電信柱), 전보(電報), 철도(鐵道), 기차(汽車), 대합실(待合室), 하수도(下水道), 자동차(自動車), 경기(景氣), 경기(競技), 관점(觀點), 낭만(浪漫), 방송(放送), 영화(映畵), 영사기(映寫機), 각본(脚本), 우편(郵便), 우표(郵票), 주식(株式), 회사(會社), 인기(人氣), 고장(故障), 광고(廣告), 입장(立場), 광장(廣場), 경제(經濟), 우익(右翼), 좌익(左翼), 수속(手續), 상식(常識), 보험(保險), 권리(權利), 생물(生物), 과학(科學), 화학(化學), 철학(哲學), 미술(美術), 역사(歷史),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하학(形而下學), 수하물(手荷物) 등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상당히 많다.
이 가운데는 동일한 한자어 단어가 조선시대에도 사용되고는 있었지만 뜻은 완전히 다른 것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科學이라는 단어가 그것인데, 조선시대에도 이 단어가 있었지만 과거시험과 관련된 공부라는 의미로 쓰였지 서양의 science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立場도 조선에서는 말 그대로 입장의 의미로만 쓰였음에 반해 일본인들은 이 의미 외에도 어떤 처지, 상황에 서는 뜻도 포함돼 있었다. 또 다른 예로 조선에선 廣告라는 말은 없었고, 구한말 광고가 생겨난 뒤에는 告白이라는 말을 광고의 의미로 썼다.
사실, 이외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단어들이 과거 일본인들이 만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 중에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의 이기와 제도, 종교, 학문, 사상과 관련된 것은 일부 중국에서 들어온 단어를 빼고는 거의 다가 일본인들이 조어한 것을 그대로 받아서 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많은 용어들이 일본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해서 그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어생활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당장 일본과 일본잔재를 논하고 있는 지금 “일본”이라는 용어도 일본인이 만든 국명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써선 안 된다면 대체 무슨 용어로 “일본”을 가리킬 수 있을까가 문제다. ‘왜국’? ‘쪽바리나라’? ‘재팬’? 아니면 고대 일본의 명칭인 日向國(日向の國) 또는 7~8세기 때 일본국명으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불려온 ‘후소’(扶桑)라고 부를까? 이런 용어들도 사용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후소라는 국명도 일본인들이 만들어 자국을 일컫던 용어이니 이 또한 써선 안 된다.
이처럼 일본식 조어의 한자어들을 하나도 쓰지 않으려면 이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전부 하나하나씩 새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광복 후 70여년 간 그런 대체어들을 만들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무조건 일본어 잔재를 없애자고만 소리쳐왔다.
내 경험에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신문사에 들어가 보니 신문에는 극일하자는 기사를 연재하면서도 신문사 내부에선 기자들과 조판공들이 “사쯔마와리”(경찰 출입기자), “도비라”(잡지의 표지), “보까시”(미술 편집시 화면 중 일부를 점차 흐릇하게 처리하는 기법), “마루뗀뗀”(기사 송고시 전화로 마침표, 點點을 찍어라는 의사표시), “와리쯔케”(편집 판짜기), “미다시”(표제어), “간지”(感じ, 느낌), 特種(이 한자어의 일본어 발음인 '토꾸다네'라고는 하지 않고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특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음. 이 말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 이미 언론계에선 고착화 된 상태임) 등등 적지 않은 일본식 언론용어와 인쇄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모순을 보고 놀라 씁쓰레 한 기분이 든 일이 있다.
여론을 선도하는 언론사들이 그랬는데 일반인들이야 여북했겠는가? 지금은 언론계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 토목업, 미용 및 이발업, 양복업, 건설업, 인쇄업, 수산업, 요식업, 법률, 행정, 의학, 해부학 등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대체어들이 많이 만들어졌거나 원래의 우리말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 결과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는 일본어 단어들이 적지 않다. 퍼뜩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 봐도 다다미, 곳케이(滑稽의 일본어음인데, 우스꽝스런 웃음, 해학, 익살 등을 뜻함), 자부동(座布団, 방석), 히야시, 고시바리, 사분(비누를 가리키는 불어 사봉savon의 일본식 발음), 와리바시, 곤조(根性), 오야지, 꼬붕, 도마리(泊, 묵음, 숙박이라는 말에서 파생돼 막차로 들어온 버스가 그날 밤을 그곳에서 지내고 다음날 첫차로 나가는 것을 말함), 시마이, 장껨뽀, 니게야, 혼방, 기스, 스리, 수곤포 혹은 수콧푸(삽을 가리키는 영어 셔블shovel의 일본식 발음) 등등이 있다. 또 ‘가득’(만땅), ‘단무지’(다꾸앙), ‘도시락’(벤또), ‘막노동’(일본어 ‘도까따’의 잘못된 표기인 ‘노가다’) 등등 한글로 대체된 단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서 쓰이고 있는 일본어 단어들을 완전히 우리말로 국어화 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무뎃뽀, 시다(바리), 나라시, 아다리, 와꾸, 우동, 고로케, 뗑깡(간질, 지랄병을 일컫는 癲癇의 일본어음), 와리깡(割り勘, 割り前勘定의 준말로서 각추렴, 각자 부담이라는 뜻도 되고 어음할인교환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음), 스레빠(スリッパ, 영어 slippers의 일본식 발음) 등등과 같이 아직도 뿌리 뽑히지 않는 일본말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쓰이고 있고, 심지어는 멘붕, 쿨비즈(cool-biz), 진검승부(眞檢勝負, 신켄쇼부)처럼 일본어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일본어를 변형해서 만든 일본어식 단어들이 쓰이거나 계속적으로 새로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실상이 이러하니 과연 일본어조어로 만들어진 단어들 중에 우리말로 대체가 가능하거나 새로 만들 수 있는 단어들은 전면 교체해야 하겠지만, ‘정부’니, ‘은행’이니, ‘상식’이니, ‘기분’이니, ‘농담’이니 하는 한자어 단어들만큼은 그에 해당하는 새로운 단어들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쓰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일본 가요 엔카(演歌)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전제된 게 있다. 만일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군국주의적 침략을 고무시키는 일본 군가라든가, 외설적이고 퇴폐적인 불건전 노래들은 불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땅에 이미 일찍부터 영어의 팝송이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일본 문학작품들이 한국에 들어와 많이 읽히고 있듯이 건전한 일본 가요들은 불러도 무방하다고 본다.
엔카를 듣거나 불러도 그다지 이질감이 들지 않고 친숙함을 느끼는 까닭은 음악의 장르가 같아서 곡의 유형도 엇비슷하고, 가사의 내용도 닮은꼴이기 때문이리라. 사실 일본 엔카의 원조가 한국의 경기 민요이다보니 가요의 멜로디나 정서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기회 되면 이 얘기를 자세하게 소개할 생각이지만 우선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일제강점기 때 경성에서 음악 교사로 있던 한 일본인이 경기민요를 듣고 나중에 그것을 일본식으로 변형한 게 엔카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또 현대 일본 음악계에서 엔카의 시조로 다 인정하고 있는 故 코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도 한국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우리사회엔 이른바 ‘왜색문화’라는 단어와 그 개념과 공유된 인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일본가요라고 해서 전부 도매금으로 왜색문화라고 몰아 부쳐선 안 된다. ‘왜색문화’라는 이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이고 비정상적이며, 불건전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한 예로 누가 부르든 간에 ‘키타쿠니의 하루’(北國の春), ‘야와라’(柔), ‘아이 산산’(愛燦燦), ‘오자시키코우타’(お座敷小唄), ‘고이비토요’(戀人よ) 등등의 노래들에 퇴폐적인 가사와 분위기가 있는가? 오히려 이런 노래들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 연인들 사이의 감정 등 서양인들과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서정적 정감이나 정서가 우리 한국인들과도 공유하는 게 있어 친숙한 느낌이 든다.
사실, 지금 잠시 언급한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의 언어와 역사 및 문화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이중성, 비논리성 등 심리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해야 할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중에 별도로 시간을 내야 될 것 같다. 오늘은 여기서 그냥 일본노래나 한 곡 부르고 ‘장광설’을 끝낼까 싶다.
2019. 4. 19. 07:08
고향에서
雲靜
https://www.youtube.com/watch?v=mTDvgB3_O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