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김신 부자와 장개석, 장경국 부자의 2대에 걸친 우의
김구, 김신 부자와 장개석, 장경국 부자의 2대에 걸친 우의
서상문(경희대학교 중국학연구소 연구원)
현대 세계사에서 국가 지도자들 사이에 우의가 돈독한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 2대에 걸쳐 우의가 지속된 경우는 흔치 않다. 白凡 김구-김신, 中正 장개석-장경국 부자가 흔하지 않은 좋은 예다. 어떤 연유에서 그렇게 됐으며, 그 의의는 무엇일까?
공동의 운명, 김구와 장개석의 만남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과 청국은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본격화 되자 한 나라는 식민지가 되었고, 다른 한 나라는 반식민지의 나락에 떨어졌다. 침략과 착취를 당하고 질곡과 압박에 시달린 것은 공동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두 나라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침략과 패도(悖道)에 함께 저항했다.
금수강산이 일본제국주의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한민족 전체가 유린당하자 분기탱천한 많은 조선의 지사들이 개인과 일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중국인 지사들이나 유력인사들과 연이 닿아 서로 알고 지냈다. 청조 전복을 위해 손중산(孫中山)과 함께 혁명거사를 일으켰던 진기미(陳其美)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1916년 6월에 암살된 진기미는 생전에 장개석(蔣介石)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진기미의 조카 진과부(陳果夫), 진립부(陳立夫) 형제가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던 장개석을 옹립하고 보좌했다.
그러나 김구와 장개석이 직접 만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진과부가 한국독립운동 지사들과 교류를 계속하라는 장개석의 지시를 받고 관계를 지속했을 뿐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1919년 4월 한인 지사들이 상해 프랑스조계 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함)를 세우자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많은 중국 조야 인사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동정과 지지는 계속됐다.
그 시절 김구와 장개석은 서로 면식을 틀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한 사람은 상해에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상해에도, 광주에도 있었으니까. 사실 중국 대륙의 광활함을 생각하면 지척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 시기는 김구와 장개석이 모두 국가 지도자급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시절이었다. 김구는 임정의 치안, 경호와 정찰임무를 책임진 경무국장에 불과했다. 중국 전역에 장개석의 이름 석 자가 알려지게 된 것은 대략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개시한 뒤 1926년 3월 자신이 주도한 ‘중산함사건’ 이후부터였다. 이어서 이듬해 4월 북벌 도중 국민당 북벌군을 이끌고 상해로 들어간 장개석이 국공합작의 파트너인 중국공산당원들을 대거 소탕한 ‘4·12정변’(淸黨)은 그를 일약 권력의 중추로 진입게 하고 전국적인 인물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장개석은 김구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컸지만, 김구는 장개석의 명성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의 만남에는 역사의 동인이 필요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일제 요인들을 폭살시킨 홍구(虹口)공원 의거가 계기가 됐다.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세계 각지로 전파를 타고 보도됐다. 김구는 배후 주모자로 알려짐에 따라 이번에는 그가 일약 중국 조야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됐다. 이 사건의 배후 주모자가 김구임을 파악하게 된 일제 측에서 김구의 목에 건 대양(大洋) 60만원의 현상금이 이를 말해준다. 1대양은 동전 300개와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즘의 금전가치로 치면 한화로 최소 수십 억대에서 100억대가 넘는 거금이었다.
일확천금을 거머쥘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현상금에 눈이 먼 일제와 일본인 그리고 일부 조선인과 중국인들도 김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조야의 지사들이 김구를 숨겨주고 금전까지 보태줘 일제의 추적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김구가 무사히 상해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벽안의 미국인 조지 피치(George A. Fitch) 부부와 은주부(殷鑄夫), 제보성(褚輔成), 사량쇠(査良釗), 사량감(査良鑑) 형제 등의 중국인들이 김구의 피신과 탈출을 적극 도왔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이익 보다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운동이라는 의를 먼저 생각한 그들에게는 인의(仁義)와 공의(公義)의 실천이 더 값진 것이었다. 이 보다 약 사반세기 전, 동양평화를 파괴한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도 한중 양국의 의사들에게 귀감이 됐을 것이다.
장개석과 국민당의 김구 및 임정 지원
1932년 말경 피신 중에 있던 김구가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났다. 이 회합에서 항일투쟁에 대한 두 사람의 방략이 다르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구는 일제 요인들에 대한 암살 및 무장 테러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면, 장개석은 자강과 외교를 통해 장기전으로 대항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김구가 요청한 일본천황의 암살 및 무장폭동에 대한 지원은 완곡하게 거절됐다. 그 대신 김구가 정말 바랐던 한인들의 중국군관학교 입학이 승낙됐다. 한인들이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게 된 것은 당시 임정이 중국정부와 외교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했으며, 임정 측이 군사인재도 보유할 수 있게 됐음을 뜻한다.
장개석 부자. 왼쪽이 장경국, 오른쪽이 장개석. 사진 속의 얼굴로 보아 이 시기는 대략 장경국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장개석, 그의 부인 송미령, 장경국. 이 시기는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오고 난 뒤 장개석의 말년에 가까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임정에 대한 지원이 중국국민당의 정책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중화민국정부는 비정기적으로, 또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부터는 정기적으로 매월 일정한 금전을 임정에 제공했다. 중국측은 일제의 침략을 받아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경제가 피폐돼 재정사정도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지지에 그치지 않고 군사인재 양성의 지원, 경제적, 물질적 지원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측이 임정에 경제적으로 지원한 금액의 규모는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지원금만 중국 화폐로 총 3,158만원이었다. 중국 조야에서 공개, 비공개로 제공해준 경제지원을 금전으로 환산하면 이 보다 수백 배는 더 많았을 것이다.
대일 전면전을 선포한 이상, 장개석으로선 모든 피압박민족과의 대일 공동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정부는 수도 남경을 버리고 중경까지 후퇴를 하게 되면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잊지 않았다. 장개석은 심지어 1938년 5월 7일 장사(長沙) 남목청(楠木廳)에서 피격된 김구 주석의 치료비까지 지원했다. 임정이 중경으로 이동해 안착하기까지 인도적으로 피난중의 임정 한인들에게 차량제공과 여비에다 생활비까지 제공해준 국민당 인사들은 부지기수였다. 임정도 중화민국정부를 믿고 일제가 항복하기까지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1938년 5월 7일 임정 내 독립운동 세력의 3당 합당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호남성 장사의 ‘남목청’이라는 곳에서 열린 연회에서 김구는 일제에게 매수된 밀정 이운환이 권총으로 난사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른바 ‘남목청사건’인데, 조선혁명당원 김구가 크게 다치고 현익철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구는 급히 장사 시내의 상아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상처가 워낙 커서 의사들이 가망 없다고 포기했지만 김구는 4시간이 지나도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자 의사들이 부랴부랴 수술을 해 가까스로 살아나 구사일생 됐다. 수술 후 김구가 외국인 의료진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사진은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이 시기 김구와 장개석의 관계는 양측의 현실 상황이 반영돼 비대칭적으로 김구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던 사이였다. 당시 중국 조야에는 과거 역사적 유산으로서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대한 이들이 많았다. 수십 세기 동안 형성돼온 중국 중심주의, 즉 중화주의 관념에서 사대를 당연한 듯이 본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시대의 한계가 존재했다. 마치 19세기 말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고자 했을 때 중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듯이 일본의 침략을 받은 한국은 중국이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관점에서 장개석 역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선 중국본토는 물론, 만주와 한반도까지 연계가 돼야 하고 이를 위해선 중국이 도와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의 생각이 달라지게 됐지만, 초기 1910~30년대엔 그런 맥락에서 김구를 약소민족의 지도자로만 봤을 뿐이다.
하지만 1940년대에 들어와선 상황이 달라졌다. 김구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개석과 같은 지도자로서 동급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 점은 1941년 10월 말 중국공산당이 동아시아의 각 민족대표들과 공동으로 연안에서 개최한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1941년 10월 27일~11월 1일)에서 김구가 임정 주석자격으로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장개석, 모택동, 송경령 등 30여명의 세계 반파시스트 운동의 저명한 지도적 인물들과 함께 대회 명예주석단에 추대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장개석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선 공산주의자들의 발본색원과 함께 중국 국내 여러 정치세력의 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임정 내 한인들에게도 단결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당시 임정 내에는 중국국민당 내 군부와 정보계통의 간부들과의 관계를 자산으로 한 김원봉 등의 좌파계열과 김구 등 민족주의 계열이 서로 알력이 있었다. 중국 측의 임정 지원은 각기 조직이 다른 여러 갈래로 이뤄졌다. 이것이 한인 내 분파싸움의 한 원인이 됐다. 국민당 차원에서는 중앙조직부, 군부에서는 정치작전 및 정보계통의 부서들이 담당했다. 군부 중에서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 위주가 된 중국군사위원회와 대립(戴笠), 강택(康澤) 등 국민당 정보계통의 인사들이 이청천 등의 광복군과 내왕하기도 했고 김원봉과도 내왕했다.
혼선을 초래한 이러한 폐단을 알게 된 장개석은 그 뒤 1940년대에 들어가면 한국문제를 전담하는 기구로서 국민당 중앙비서처의 오철성(吳鐵城), 군사위원회의 하응흠(何應欽), 중앙조직부의 주가화(朱家驊) 3인으로 한국문제소조를 조직해 처리하게 했다. 그리고 장개석은 임정 내 한인파벌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김구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화합하고 단결하도록 경비지원을 조정하면서 유도했다.
중국국민당이 임정의 정규군인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소속시켜놓고 자기들이 만든 소위 ‘한국광복군행동준승9조’(韓國光復軍行動準繩九條) 규정으로 활동을 여러 가지로 제약을 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국민당이 이 규정을 없애고 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해 ‘원조한국광복군판법’(援助韓國光復軍辦法)이라는 새로운 규정으로 대체한 것은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1945년 2월이었다. 장개석 개인 비서실(侍從室)에 근무했던 소육린(邵毓麟)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최고 지도자인 장개석은 ‘행동준승’을 만들라는 지시를 한 바 없었다는 듯이 기록했다. 즉 지도자인 장개석은 영명했지만 그 아래 직원들의 업무처리가 “어리석고 졸렬해 양국의 우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장개석이 “행동준승을 바로 철저하게 취소해야 한다. 이름이 ‘준승’이라니 어리석고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고 소개했다. 즉 ‘행동준승’은 장개석이 지시해서 만든 게 아니라 아래의 실무진에서 만든 것이라는 얘기다.
장개석은 군사적, 경제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카이로 회담 같은 국제외교무대에서도 미국, 소련, 영국 등 열강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1942년 4월 6일, 중국국민정부 국방최고위원회 상무회의에서 임정 수립 제23주년 기념일에 맞춰 임정을 승인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2월 ‘부조한국복국운동지도방안’(扶助韓國復國運動指導方案’)을 제정해 “적당한 시기에 다른 나라에 앞서 임시정부를 승인”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또 광복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임정측에서도 장개석에게 다시 임정승인을 여러 연합국 동맹국들에게 제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이 끝끝내 임정을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뼈아픈 상처였다.
더군다나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던 중국정부가 미국과 영국의 협조 내지 동의 없이 단독으로 한국문제를 처리하기 어려웠던 관계로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사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나중엔 미국 주도의 신탁통치 방안까지 동조했다. 특히 중국이 임정을 승인해 대일 교전단체가 됐었더라면 미군정 당국이 김구 등 중국에서 귀국한 임정 계열 인사들을 그렇게까지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해방정국에서의 정치적 지형도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광복 후에도 지속된 김구, 장개석의 우호관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마침내 패망하고 한중 양국은 한날한시에 광복을 맞이했다. 두 나라 지도층은 완전한 독립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김구를 위시한 임정측 인사들은 미국의 저지로 일제와 싸운 교전국의 정부요원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게 됐다. 그 즈음 동년 11월 4일 장개석은 김구와 임정 인사들을 환송하는 환송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중국에 남아 있는 한인들의 수습, 귀국 후에 소요될 여러 가지 자금이 필요해 요청한 김구에게 흔쾌하게 미화 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금도 지원했다. 하지만 이 돈은 미군정청이 반입을 불허해 국내에 가지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구는 뉴욕 주재 중국대사관에 잠시 맡겨뒀다가 나중에 이승만이 이 돈을 쓰기 위해 장개석을 만나기까지 했다가 수령하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절반을 중국에 파견된 임정의 주중국 대표단(단장 박찬익)에게 중국에 머무르고 있던 한국교민들의 귀국과 연락 등의 사무를 위해 사용하도록 했다.
막대한 거금을 지원해준 장개석과 김구 간의 우의는 김구의 환국 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됐다. 1945년 9월, 중국 측은 임정의 조속한 귀국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으나 당시 임정의 환국문제로 임정, 미국, 중국이 벌인 오랜 협상에서 중국정부는 발언권이 미약했다. 장개석은 11월 4일 공개적으로 한국을 즉각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김구와 장개석은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환국, 한국독립 등등의 문제로 자주 통화를 하면서 각별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장개석은 광복 후 김구를 지원해 임정 계열의 인물들로 한국을 친중적인 위치에 두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장개석은 원래 권모술수를 모르고 우직한 성품의 김구와 함께 반공을 매개로 한 국제적인 협력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개석의 흉중에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고자 한 이승만 보다는 김구를 더 가까이, 그리고 더 믿음이 가는 지도자로 봤다. 이는 김구에게 제공한 20만 달러를 이승만이 쓰도록 해주라는 김구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장개석이 이승만에게 건네주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기 장개석에게는 임정세력과 김구를 중심으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기본적으로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 동지의 위치에서 함께 대일 항전을 전개했고, 오직 항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 김구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한국 거주 중국화교들도 김구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도왔다. 김구 역시 한국 거주 화교들을 전력 지지했다.
김구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 장개석
민족이 분열되고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구와 장개석에게는 공히 국가통일이 지상과제였다. 김구에게는 당장 남북분단을 막는 것이 시급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김규식, 엄항섭과 함께 육로로 38도선을 넘어 평양행을 결행했다. 김신도 수행비서와 함께 부친을 수행했다.
김구 주석이 평양을 찾은 것은 분단을 막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결행한 최후의 노력이었다. 김구는 평양의 개회식장에서 한 연설에서 남쪽이든 북쪽이든 3천만 민족이 똑같이 일본을 침략을 받았다가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민족이 잘 단합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말과 함께 남북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김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난 것에 대해서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말들이 분분하다. 부친을 직접 모시고 평양을 다녀온 김신은 훗날 이에 대해 일일이 논박하지 않고 단지 논어에 나오는 “지기불가위이위지”(知其不可爲而爲之)라는 구절로 대신했다. 이루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줄 알면서도 인(仁)과 예(禮)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들고자 분투한 공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김구는 당시 현실적으로 불리한 상황과 조건이라는 사실을 누구 보다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소 일의 성패를 이리저리 따져 보고 자신에게 유불리를 계산하며 진퇴를 가늠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김구로서는 민족의 분단과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기 위해 실천했다는 것이다. 마치 임정 선열들이 자신들의 투쟁이 꼭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기대해서 싸운 게 아니라 독립을 위해선 목숨 걸고 투쟁하는 항일 밖에 없었기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전진했듯이 김구도 깊은 강은 멀리 흐르는 것처럼 갈등에서 화해로, 분단에서 통일로 향하는 거대하고 깊은 역사의 흐름이 이어질 것임을 알고 행했다고 했다. 우리가 마치 유토피아에는 다다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듬해 김구는 그를 최대의 정적으로 여기며 남북통일운동을 가로 막고 단일정부를 세운 세력의 사주를 받은 젊은 초급 장교 안두희에게 불의의 흉탄을 맞고 유명을 달리 했다. 김구가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비보를 접한 장개석은 직접 김구의 서거를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지어 보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는 그가 어떻게 죽는가 그리고 죽은 뒤 남겨진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보면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장개석이 보낸 만사는 그가 김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진심이 엿보인다.
輓 白凡 金九 先生(만 백범 김구선생)
樞星一夜客江山(추성일야객강산) 북두의 맏 별이 하루밤새 강산에 떨어지니
天動地悲水自鳴(천동지비수자명)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해 물도 절로 우는구나!
別淚溱溱滄海濶(별루진진창해활) 이별의 눈물이 흘러흘러 창해에 넘치고
憤心疊疊泰山輕(분심첩첩태산경) 분한 마음 첩첩이 쌓여 태산도 가볍소
堂堂義氣生前事(당당의기생전사) 당당한 의기는 살아생전의 일이었구려
烈烈精神死後名(열렬정신사후명) 열렬한 정신은 사후에 이름이 남으리라
千秋寃恨憑誰問(천추원한빙수문) 천추에 맺힌 원통한 마음 뉘에게 묻겠는가?
寂寞皇陵白日明(적막황릉백일명) 적막한 황제의 무덤이 대낮처럼 밝구나!
위 만사의 보이지 않는 행간에는 당시 백범과 중정 두 사람이 처한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얽혀 있다. 김구에 대한 장개석의 진정어린 우의 그리고 반공진영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협력 대상으로서 장개석 자신이 기대한 김구가 서거한 것에 대해 크게 애석해 한 심사가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제1연에서 추성(樞星)은 북두의 첫 번째 별을 말하는데, 큰 별로 옮겨도 무방하다. 그냥 “큰 별”이라고 하기 보다는 장개석의 흉중의 심사를 헤아려 “맏 별”로 옮겨봤다. 장개석이 굳이 추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김구를 한국의 범위를 넘어서 아시아의 큰 지도자로 인정하는 의미가 들어가 있지 않을까? 제2연에서는 하룻밤(一夜)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김구의 시해 소식을 들으니 하늘도, 땅과 물도, 즉 천지가 슬피 운다고 했다.
그래서 제3연에서 김구의 서거에 슬퍼해 장개석 자신이 흘린 눈물이 넘쳐흘러 바다에 이를 정도라고 표현했다. 제4연의 ‘분심’(憤心)은 백범이 분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김구가 불의의 흉탄에 저격당해 비명에 간 사실이 너무 분하다는 장개석 자신의 얘기다.
제5연에서는 정치 지도자로서 백범의 인품과 품격을 그렸다. 살아생전에 삿됨이 없고 공명정대한 김구의 사람 됨됨이를 “당당한 의기”로 표현한 것이다. 김구가 당당한 의기와 결기를 가진 지도자였다고 한 것은 장개석이 실제로 겪은 체험에 근거를 둔 평가이다. 그는 1930년대부터 직접 김구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눠본 경험으로나 김구를 잘 아는 여타 국민당 지도자들의 전언으로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6연에서 장개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최후의 일각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 김구의 열렬한 애국애족정신은 사후에도 만고에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제7연에서는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항일투쟁의 동지로서 우의를 나눈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게 된 애석함과 원통함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마지막 제8연의 “적막한 황제의 무덤”은 김구가 충분히 일국의 최고 지도자의 보좌에 오를 수 있었음에 견주어 김구의 무덤을 국가지도자의 묘소로 격상시킨 표현이라는 점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한 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으로는 장개석이 이 만사에서 皇자를 썼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皇이라는 글자는 중국역사에서 황제 자신이나 황제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만 썼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장개석임에도 김구의 죽음을 “황제의 무덤”에 비견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예사롭지가 않다. 이에 관해선 앞으로 좀 더 자세한 의미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김구는 살아생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기 때문에 평소 목숨을 새의 날개 터럭(鴻毛) 같이 여겨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불의의 죽음은 너무나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타계는 친일파를 용인한 이승만의 독주를 막지 못하고 우파가 독재로 나아갈 가능성을 열어줬으며, 더욱이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견제할 구심점이 상실됐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과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듯이 김구와 장개석의 관계 역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지난 세기 한 시대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
애석하게도 김구가 불의에 가게 되자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이승만과 협력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장개석은 주한 중화민국 초대대사 소육린의 보고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이승만이 일본, 미국파를 등에 없고 득세하면서 중국 출신 인사들이 핍박을 받거나 수세에 처해 있었다.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도 실권이 없었으며, 전국 7개 사단장 중 겨우 두 명의 사단장만이 중국군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장개석을 훌륭한 아시아의 민족지도자로 시종 존경해오고 있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나쁜 인상을 갖고 있는데다 이해도 부족하다고 돼 있었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에 쫓겨 온 뒤로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기회를 엿봐온 장개석은 대륙수복을 위해 이승만 정부와의 반공을 위한 협력을 중시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김구와 장개석 간에 이뤄진 우의, 지원, 협조와 협력은 그 다음 세대인 김신과 장경국으로 이어졌다. 선대의 돈독한 우의와 각별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60년대 초 중화민국 주재 한국대사로 부임한 김신에게 각별한 신임을 보여준 장개석은 김신 대사를 외국의 대사로 취급하지 않고, 한 집안 사람으로 생각했다. 김신 대사에게 “장경국과는 형제 같은 사이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면 꼭 상의해라”고 일렀다. 현재로선 김신과 장경국 교류 관련 자료는 보이지 않아 차후의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다.
이 뿐만 아니라 장개석은 심지어 대만 상황에 대해서까지 김신 대사에게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조언을 해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또한 장개석은 김신 대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화민국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어떤지 의중을 타진해주기를 요청했고, 실제로 김신 대사의 알선으로 장개석은 미국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대를 이은 우의가 가능했던 이유
이처럼 2대에 걸쳐 상호 협력과 신의의 지속이 가능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개인 가치관의 일치, 정치사상적 유사성, 반공이라는 시대적 배경 세 가지로 수렴된다. 김구와 장개석이 가졌던 충효사상, 애국애족 정신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 반제 저항의 독립구국정신과 반공의지에 뿌리를 둔 두 지도자의 정치사상의 일치 내지 유사성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구와 장개석이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함께 보여준 전제제도 청산, 반제식민지 침략투쟁, 자강부국, 독립, 민주주의, 반공 그리고 민족분단을 막고 하나의 한국, 하나의 중국을 지향한 역사적 사명 및 의지와 비전이 견고하게 결합된 결과이다.
한중 양국은 고대로부터 정치사상적으로 공통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동사상, 민본, 민주사상, 인의와 공의, 애국애족, 선공후사 등의 뛰어난 사상적 전통이 있다. 맹자가 말했듯이 하늘은 백성들이 듣는 것을 듣는다.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것을 본다. 나로부터 나온 것이 틀리거나 부당하다면 하늘은 그것을 나무랄 것이며, 백성들은 그것을 저버릴 것이다. 또한 순자(荀子)가 말했듯이 “임금은 배요, 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子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하늘의 대리자인 천자(天子), 즉 군주가 군주답지 않을 땐 민이 그 왕조를 뒤엎어도 된다는 역성혁명 사상이 민본주의, 민주사상, 인의와 공의의 정신을 표상한다. 이러한 정치사상과 정신이 있었기에 신해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상은 조선조로 넘어와선 정도전 등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로 전승됐고,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는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라고 역설한 손병희, 최시형이 주창한 동학사상으로 표출된 바 있다. 서양의 민주주의사상을 능가하는 민본주의의 그 수승한 정치사상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대동사상, 민본, 민주사상, 인의와 공의 정신이 있었기에 손중산이 국민당원들에게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실천하라는 유훈을 남길 수 있었다. 일제에 국권이 피탈되고 피압박 약소민족의 처지에 놓인 한국 임정과 한국민을 도와 준 것도 바로 동일한 인식의 소산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 즉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상을 중핵으로 한다. 주권재민은 중화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손중산이 중화민국을 수립한 첫날에 세운 원대하고 영원불변의 목표였다. 주권재민, 민주주의는 인의와 공의의 외피다. 안중근 의사가 동아시아 평화의 교란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도 인의와 공의의 발로였다. 장개석, 장경국 두 총통도 이러한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았다.
안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국가권력을 탈취하려고 국민당에 저항하고, 밖으로 일제의 침략이 전 중국으로 옥조여 들어오던 내우외환의 시기에 장개석은 전술한 맹자의 말을 적으면서 “결단코 나는 나의 개인적 허영을 위하여 나라가 진정 손실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 바 있는 사실(1932년 2월 16일자 장개석일기)이 이를 표증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 훗날 1972년 7월 6일 “장렬천추”(壯烈千秋”라는 글을 남긴 점도 장개석이 인의와 공의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는 예다. 장경국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날인 1979년 9월 2일에 “벽혈단심”(碧血丹心)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역시 선친과 동일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구 김신 부자 역시 동일한 사상적 전통 속에서 그러한 사상을 현실에 체현하고자 노력하면서 살았다. 이는 두 사람이 실제 독립, 부강, 하나의 민족, 애국애족 정신과 사익을 버리고 대의와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무사적(無私的) 삶이 말해주고 있다. 1940년대 중반 중경 시절, 김구는 장남 김인이 폐병에 걸려 사망할 지경에 이르자 김인의 배우자, 즉 며느리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보고자 한 절박한 심정에서 구하기 힘든 페니실린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정색을 하면서 “여기 와 있는 동지들 중에 그 병을 앓다 죽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내 아들만 살릴 수 있단 말인가?”라며 거절해 결국 큰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이 있다. 김구는 철저하게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고자 한 공명정대한 삶을 산 것이다.
김구 선생 3부자. 왼쪽부터 장남 김인, 김구, 차남 김신. 김인은 광복 전 중경에서 사망했다.
이를 지켜 본 아들 김신이 무엇을 배웠겠는가? 김신 역시 그런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았다. 훗날 1970년대 중반, 그가 여당 국회의원이었음에도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선 철저히 따지고 개선을 요구한 일이 말해준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은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한 김구 김신 부자의 공명정대한 無私정신과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또한 중국에서 태어난 김신이 조국의 국익을 우선시 한 애국심도 오랜 중국생활에 이어 인도,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나라 없는 슬픔을 뼈저리게 느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개인 차원의 인격적 측면에서도 두 부자들 사이엔 충효를 몸으로 직접 실천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장개석이 충효를 강조했듯이 장경국 총통 역시 평생을 대충(大忠), 대용(大勇), 대효(大孝)를 직접 몸으로 실천한 삶을 살았다. 국가에 충성함은 물론, 시대를 내다보고 대만의 민주화를 위해 큰 용기를 내 권력을 대만출신 정치인에게 이양했다. 대효는 맹자 만장 장구 상(萬章 章句上)에 나오는 구절인데(大孝終身慕父母), 큰 효도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따르고 사모하는 것처럼 장경국 역시 부친 장개석과 계모 송미령에게도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 장경국에게 애국, 애민은 타고난 천성이었으며, 자라면서 부모의 훈도를 받아 그 관념과 의지가 강화됐다.
김구 부자도 마찬가지였다. 김구는 나이가 쉰이 넘어도 노모로부터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이 일화는 그가 얼마만큼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김구가 평생을 재물과 권력에 사욕 없이 나라와 민족을 우선시했던 것처럼, 김신도 어릴 적부터 가난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다. 김신은 자라면서 자연스레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검소와 분수를 배워 몸소 실천하면서 살았다. 1948년 12월 결혼식을 앞둔 김신에게 김구는 결혼식을 검소해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신부의 드레스도 비단이 아닌 광목으로 만들었다. 또 김구의 지시대로 결혼식 부조금 전액을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머물던 수용소에 갖다 주기도 했다.
지난 20세기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침략에 김구를 지도자로 한 한국 임정과 장개석을 지도자로 한 중화민국이 공동으로 침략자에 대항한 역사가 오늘날 어떤 교훈과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한중 양국이 걸어온 역사의 면면을 복원함과 동시에 인의와 공의에 바탕을 둔 김구, 김신 부자와 장개석, 장경국 부자의 2대에 걸쳐 보여준 우의와 협력정신을 새로이 조명하고 되살려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재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격변하고 있다. 올해 들어 남북한이 기존의 무력 대결을 지양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출발선에 섰다. 이러한 변화는 구시대의 종언, 냉전청산, 군사대결 종식, 종전선언, 평화체제 구축, 민족통일이라는 새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서광을 의미한다. 이는 70년 전 김구가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했던 남북분단 방지와 민족통일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실천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고 김구 김신 부자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희원(希願)이자 시대정신이다. 이러한 희원이 오늘 우리가 쫓아야 할 시대정신이 아닌가 한다.
2018. 12. 13, 09:36
북한산 淸勝齊에서
雲靜
위 글은『백범회보』, 제59호(2018년 12월 20일)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