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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타이주는 왜 유명한 술이 됐을까? 오해와 진실

雲靜, 仰天 2018. 11. 22. 12:28

마오타이주는 왜 유명한 술이 됐을까? 오해와 진실

      

중국은 땅이 넓다. 인구도 많다. 물산도 풍부하다. 나는 지금까지 중국을 약 100여 차례 이상 돌아다녔는데, 특히 광동, 광서, 귀주, 운남, 사천, 청해, 신강 등지로 가보면 우리가 평생 보도 듣도 못한 진귀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연경을 방문한 조선의 천재형 선비 박지원이 조선에선 볼 수 없었던 별의별 신기한 물건들을 보고선 자신의 저서 『熱河日記』에서 찬사를 연발한 게 조금도 과장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중국을 가리켜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고 하는 이유다.
 
중국에는 술도 가지각색이다. 각 지방 마다 술을 생산하지 않는 곳이 없어 술 종류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겁나게 다양하다. 이 가운데에는 중국이 자랑하는 유명한 명주들이 많다. 한국인들 중에 술 깨나 하는 주당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쉐이징팡’(水井坊), ‘마오타이’(茅台), ‘우량예’(五粮液)도 그 중 한 가지다. 대략 마오타이는 그렇지 않지만 쉐이징팡이나 우량예는 한국의 어느 중국식당이나 대부분 다 팔고 있어 그 만큼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친숙한 술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 술들 외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명주가 엄청나게 많다.

 

오늘은 갑자기 한양 인근에까지 놀러온 친구들에게 마오타이술을 한 병 선물하면서 술이 당기는데다 절기가 첫눈이 내린다는 小雪이어서 그런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마오타이주와 그에 얽힌 한시 두 편(이 두 수의 시에는 추운 겨울날과 눈이 내린다는 내용이 나온다)을 소개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마오타이주에 관해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사실도 없지 않고, 또 가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특별히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마오타이주는 중국 귀주성(貴州省) 인회(仁懷)시 모태진(茅台鎭)에서 질 좋은 수수(高粱)를 원료로 장기간 여러 번에 걸쳐 발효해서 만든 술이다. 두 차례 生糧(=生沙, 즉 익히지 않는 생 곡식재료)을 가하고 여덟 차례의 발효와 아홉 차례의 증류를 거치기 때문에 생산 주기가 자그마치 8~9개월이나 된다.
 
이렇게 한 것을 3년 이상 묵혀놓았다가 다시 1년을 저장한 뒤 술이 부드럽고 순한 향기가 나올 때쯤에야 출고한다고 한다. 따라서 출고까지 걸리는 전체 생산과정은 최소 약 5년 이상이 된다. 도수는 53도이며, 종류로는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된 왜취장병(矮嘴醬甁) 마오타이주, 1990년대에 생산된 비천(飛天) 마오타이주 등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오타이주는 종류가 수없이 많다. 값이 싼 것은 우리돈으로 4~5만원 짜리에서부터 비싼 것은 수십 억원에 달하는 고가품도 있다. 사진 속 마오타이주는 중국 곳곳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위 마오타이는 중국 위앤화로 1070만이나 나간다. 한화로 환산하면 약 20억 원 가까이 되는 가격이다.

 

그런데 마오타이주는 지금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최고의 명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선 처음부터 유명한 술은 아니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옛날부터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부동의 명주였다는 설도 있다. 과연 어느 말이 진실일까?

 

전자를 입증하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마오타이주의 역사는 기원전 135년 한 무제(武帝)가 이 술을 마셔보고는 감미롭다고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됐지만, 원대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술은 아니었다. 명대에 들어와서도 술에 관한 문헌에 다른 술이 많이 거명됐지만 마오타이주는 기록돼 있지 않았다. 마오타이주가 본격적으로 문헌에 오른 것은 청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직접 술에 관한 중국 측 문헌을 찾아보고 하는 소리다.

 

또 다른 예도 있다. 내가 과거 약 35년 전쯤 대학시절에 읽은 중국 현대사 관련 책에도 마오타이주가 처음부터 유명주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그 책의 저자는 외국의 중국역사 연구자였는데, 마오타이주가 유명하게 된 사연을 설명해 놨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마오타이주는 중국 서남지역의 변방인 귀주성의 茅台지역의 지방 명주에 불과했는데 모택동이 해외 국가원수에게 소개한 뒤로 유명하게 됐다고 한다. 그 얘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줄거리는 대략 이랬다.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의 홍군(紅軍)은 중국국민당군의 5차에 걸린 대규모 포위 공격인 소위 "초공"(剿共)에 쫓겨 중공군 근거지인 강서성(江西省)과 호남성(湖南省)의 경계에 걸쳐 있는 정강산(井岡山) 일대에서 전략적 후퇴를 시작했다. 1936년 섬서성(陝西省) 오기진(吳起鎭)이라는 외딴 곳에 안착해 근거지를 새로 건설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이나 중국인들이 모두 이 사건을 정강산을 출발해 서북으로 돌아 만주, 외몽고와 하북성(河北省) 일대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이른바 “대장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좋게 포장해서 부르는 명칭일 뿐이고, 사실은 공산당 군대를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는 장개석의 의지에 따른 국민당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었다. 즉 전략적 후퇴였다.

 

그런데 중공군이 후퇴하기 시작해 귀주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준의(遵義)회의 직후, 모택동 등 중공 지도부의 지휘로 1935년 3월 중순, 전투 없이 손쉽게 모태진을 점령한 중공 중앙의 홍군은 모태진과 그 부근 일대에서 네 번이나 적수(赤水)를 건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때는 대부분의 중공군이 오랜 전투와 후퇴에 쫓기고 해서 지칠 대로 지친데다 먹을 군량미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체력도 고갈되고 해서 사기가 떨어 질대로 떨어졌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후퇴할 힘이 없던 상황이었다. 이때 구세주 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지방 토산품인 마오타이주였다. 중국지도부는 이 술을 홍군 병사들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사기를 회복한 뒤 후퇴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위 말은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양식이 떨어져 굶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술을 먹고 사기를 회복했다니 말이다. 어쨌든 신화로 남을 수 있는 이 얘기를 모택동이 다시 끄집어냈다. 건국 후 국내정세가 안정되고 외국 국가원수가 중국을 방문하면 그는 환영연회장의 원탁엔 꼭 마오타이주를 내놓곤 했다.
 
앞서 내가 읽었다는 책 내용을 기억하는 바로는 모택동이 1960~70년대에 호주인가 뉴질랜드인가의 총리가 북경을 방문했을 때도 이 술을 만찬석상에 내놨다. 모택동은 이 술을 가리키면서 귀빈인 총리에게 대장정에 나선 중공 홍군 병사들이 지치고 허기진 채 귀주성에 도착했을 때 이 술을 마시고 사기를 회복해 대장정에서 승리했다고 자랑을 늘어놨다.

 

중공의 홍군병사들은 마오타이주를 마시기도 했지만, 이 술로 행군 중에 지친 다리에 문지르기도 하고 행군으로 부르트거나 다친 다리의 상처에 발라서 낫기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술로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는 소리나 다를 바 없는 자랑이었다. 마오타이주가 성가가 높지 않았던 지방 명주에서 일약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명주가 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마오타이주를 국제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한 광고주나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

 

중국국민당을 몰아낸 중국공산당이 1949년 10월 새로운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최초 8만 6,000여명의 대병력이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5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추격을 피해 하루 평균 71華里(35㎞)를 행군해 15개 성을 거치는 과정에서 10개 지방군벌의 포위망을 돌파했고, 기암절벽의 강, 험준한 고산, 만년설의 설산 수십 개를 넘는 2만5,000리를 걸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중공 당원과 홍군 병사들은 최소 8,000에서 많게는 3만 4,000명(크게 두 설이 존재함)에 불과했다.
 
그만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신산한 역경을 이겨내고 새 나라를 세웠으니 중공 당원이라면 누구나 긍지를 가지고 자랑할 만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중공당원들은 자주 마오타이주를 거론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가운데는 마오타이주를 예찬하는 시도 나타났다.

 

황염배(黃炎培)와 진의(陳毅)가  마오타이주를 소재로 한시를 지은 이들이다. 중국현대사에서 많지 않은 예다. 황염배는 1930~40년대 항일 시기 저명한 ‘민주인사’로 활동했고 자신이 비판했던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가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그래서 예우 차원에서 신 중국 정부 수립시 중공지도부로부터 국가부주석으로 위촉된 인물이다.
 

진의는 골수 공산주의자이자 중공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군사전략가로서 모택동이 총지휘한 1949국민당군 반격전에 공을 세운 유력한 정치가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혁명에 뛰어드느라 군인이고 중공 당원이고 간에 책이나 신문 잡지를 접할 일이 없어 인문학적 소양이 턱 없이 부족했던 지난 세기 중공 고위층 인물들 중엔 드물게 시문과 풍류를 알아서 모택동의 상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 뿐만 아니라 중공 고위층의 사망시에, 심지어 주은래(周恩來)가 죽어도 문상을 가지 않던 모택동이 유일하게 진의에게만은 직접 조문을 했다  

 

대장정 이후 어느 날, 중공군의 주력을 놓쳐버린 것이 분했던지 중국국민당에서 신문에다 홍군이 모태진에 들어갔을 때 마오타이술을 만드는 양조지(釀造池)에다 발을 씻었다는 글을 실었다. 장정에 성공해 새로운 근거지를 가지게 된 중공이 몰상식하고 반문명적이라고 선전하고자 그런 식으로 폄훼하고 모독한 것이다. 당시 이 글을 본 장개석 정권의 중화민국 정부 국민참의원으로 있던 黄炎培가 중공당원이 아니어서 대장정 경험이 없었음에도 중공 편에 서서 국민당의 오만과 무지를 비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茅台酒’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茅台酒

 

喧傳有客過茅台 
험담에 어떤 객이 마오타이 촌을 지나가면서
釀酒池裏洗脚来 
양조장에다 발을 씻었다고 하는구나
是眞是假吾不管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나야 신경 쓸 바 아니지
天寒且飮三兩杯 
날씨가 몹시 추우니 술이나 두세 잔 들이키련다.

 

1945년 몇 월인가, 아직 국공투쟁이 재연되기 전 모택동의 초청을 받아 황염배 등 민주인사 몇 명이 중국의 적도(赤都)이자 중공의 심장부인 연안(延安)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황염배는 위 시를 베껴서 모택동, 주은래와 진의에게 줘서 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황염배가 모택동, 주은래 등 중공의 최고 지도적인 인물에게 위 시를 필사해서 갖다 바쳤다는 것은 문학이, 지식인이 정치에 아부한 전형적인 예다. 함축, 상상, 여백의 전사인 시가 여백 없이 앞장선 경우다. 황염배는 국공 양당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 이른바 민주인사였다. 중국국민당의 비민주적 부패 및 전횡이나 장개석의 독재를 비판한 민주인사들 중의 유력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황염배는 이 시기 중공을 비판한 대국민당 선전전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국민당의 이러한 모략적인 발언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위 시에서 ‘객’은 중공군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중공군 병사들이 그렇게 무식하게 술 담그는 곳에다 발을 씻었다는 그 소문이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술만 마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양당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미였지만 국민당 측 민주인사가 국민당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중공을 편든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그 덕분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중공 건국 시 황염배는 중국 중앙인민정부 위원 겸 초대 정무원 부총리 명단에 올랐다. 물론 당시 부총리는 총 50여명이나 됐었기 때문에 실권이 있는 게 아니라 정치적 안배에 지나지 않았다.

 

1952년 겨울 언젠가 황염배가 남경(南京)에 오자 상해시장으로 있던 진의가 그를 초대해 환영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원탁에 올라온 마오타이주를 마시면서 진의는 옛날 얘기를 끄집어내 황염배가 당시 국민당에 바른 말(仗義執言)을 해준 것을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어렵사리 자리를 뜨면서 화답시 한 수를 지었다. 바로 아래 한시다.

 

金陵重逢飮茅台 
금릉(남경)에서 다시 만나 마오타이를 마시니
萬里長征洗脚來 
만리 장정의 고달픔이 발아래에 씻기는구려
深謝詩章傳韵事 
시와 글로 운을 전해준 것에 깊이 감사하오
雪壓江南飮幾杯 
눈발이 온 강남을 덮고 있는데 몇 잔을 마셔오리까?

 

황염배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니 진의도 정치적으로 화답했던 것이다. "시와 글로 운"을 전한 것이란 중공을 지지한 메시지였다는 말이다. 황염배에게 국공 내전 중에 장개석 편을 들지 않고 중공을 지지해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눈발이 내려 강남 천지를 뒤덮고 있는 이곳 남경, 지난 혁명의 대장정을 회상하면서 또 한 번 마오타이주로 거하게 축배를 들자는 소리였다.

 

중국에서 1960년대는 어떤 시대였던가? 모택동의 말이라면 황제 이상의 신과 같은 권위와 鐵山의 무게를 가진 것이나 같았을 때였으니 모택동이 찬양한 이상, 공산당 간부들이 그 뒤로 마오타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처신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마오타이주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현재 중국의 대표적인 최고의 명주가 된 것은 그 뒤부터였다는 얘기다.

 

무명주였었다가 대장정과 마오타이주가 얽힌 고사를 소개한 모택동 덕분에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명주의 반열에 들었다는 주장에 반해 처음부터 마오타이주는 명주였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예는 전자 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두룩하다. 예를 들어 마오타이주는 이미 800여년의 오랜 역사가 있는데, 전통적으로 역대 중국황실에 진상품으로 들어가는 10대 명주, 8대 명주, 4대 명주에 들어갔다는 게 현재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믿음이다.
 
게다가 이미 지난 세기인 1915년에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영예의 금상을 받았으며, 1940년대에 10대 명주, 그 뒤 중국정부에서 매긴 등급에서 4대 명주, 8대 명주에 들어간 바 있으며, 현재는 중국정부가 나서서 세계 3대 명주 가운에 하나라고 광고하고 있다. 즉 마오타이주를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프랑스의 꼬냑 브랜디와 함께 세계 3대 증류주에 넣고, 白酒(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빼갈’ 계통의 증류주)의 비조(鼻祖)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정부가 마오타이주를 10대 명주인 것처럼 선전하고 광고해오고 있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평가에 따른 게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들어온 뒤 새로 결정한 일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평가에선 어떠했는지 전거를 확인해봐야 한다.
 
중국정부 차원에서 白酒를 대상으로 5회에 걸친 품평회를 거쳐 10대 명주로 정한 술로는 茅台, 五粮液, 剑南春, 泸州老窖特曲, 西凤酒, 汾酒, 古井贡酒, 董酒, 洋河大曲, 郎酒다. (중국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이 중국에서 술병에 붙은 상표에 쓰인 글자와 헛갈리지 말고 술을 살 수 있도록 중국어 정자로 고치지 않고 간체자 그대로 써 놨다.) 이 가운데 마오타이주는 중국정부가 주관한 제1계 전국술품평회(全國評酒會)에서 汾酒, 泸州老窖, 西凤酒와 함께 백주 계통의 중국 4대 명주 안에 넣어놓고 있다.

 

나중에 더 많은 마오타이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때까지는 어느 설이 옳다고 단정 짓지는 않겠다. 아직 마오타이주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현재로선 지금까지 소개한 상반된 내용들로 봐선 내가 과거 대학 시절에 읽은 책에 소개된 게 내용이 잘못됐거나 내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 학인의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은 선택되거나 짜깁기가 된다고 본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 있듯이 인간의 기억력이란 완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많고 한계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동안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대서 그럴까? 주량을 조금 줄여볼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한다. 그래도 아직은 술을 완전히 끊을 생각은 없다. 내게 그 무슨 해내야 할 범인류적 혹은 민족사적인 사명 같은 것도 없는데 말이다. 술을 마시면 간이 상하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면 마음이 상한다(飮酒傷肝, 不飮傷心)는 걸 아니까! 오늘은 小雪이라지만 눈이 내리지 않는구나. 마오타이 술을 한 잔 하면서 서설이 내리길 빌어볼까?

 

2018. 11. 22. 12:28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