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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 현실의 한 단면 ① : ‘학생인권조례’의 출현 배경

雲靜, 仰天 2018. 6. 3. 14:30

한국교육 현실의 한 단면 : ‘학생인권조례의 출현 배경

 

얼마 전, 교육감 선거철이 다가오자 학생인권조례가 다시 논란이 된 바 있다. 선거가 끝나고 각 시도 교육감이 선출됐다. 한국교육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도 간단하지 않고, 한 번으로 끝날 일도 아니다.

 

오늘은 특히 교육문제들 가운데 최근 10여년 사이에 적지 않은 문제들을 야기시킴에 따라 사회적 논란이 커지면서 철폐하거나 혹은 개정 요구가 끊이지 않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흔히 우리는 시골과 어촌에 사는 농민과 어민은 모두 선하고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선입견이다. 선하고 착한 농민과 어민이 있으면, 그 반대의 농민과 어민도 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학생들 가운데서도 선하고 착하고 바른 학생이 있는 반면에 착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바르지 않은 학생도 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학생들에게 권리만 주장하게 해선 안 되고, 권리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도 같이 인식시켜야 할 논거다.

 

학생인권조례 조항들을 보면 우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의무와 책임에 대해선 제시되지 않고 오로지 학생들이 존중 받을 수 있는 인권적 권리만 제시돼 있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이 조례가 나오기 전에 학생을 지도하기 위한 감독, 제제, 관리, 통제 일색의 교칙, 학생생활규정 등이 있었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고 나서부터는 이 조례를 적용하는 서울과 경기 지방의 학교들에선 교칙과 학생생활규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고 상당 부분 무력화 된 듯한 느낌이다. 교사들에게 대들고 막 대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교사들의 푸념이 늘어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학생의 인권도 중요한만큼 교사의 교권도 중요하다. 내가 초중고를 마치고, 대학에서 교육학을 이수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그리고 그 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목도한 한국사회의 교육과정을 보면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은 그 동안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비민주적인 언행이 원인이 된 측면이 커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학생의 인권만 필요 이상으로 중요시하고 그들의 의무는 축소하거나 무시해버린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사의 교권이 크게 위협 받고 있다. 그 결과는 교육이 정상화되지 않고 교사들의 사기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청소년 시절기의 학교교육은 개성과 인격의 존중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수준에서 그 나이에 합당하게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의 영역과 범위를 정해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사회성과 민주성 함양에 효과적이고, 본질적으로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내용도 여기에 부합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인권은 일방적으로 강조할 게 아니라 학습의 효율성과 교우들 간 및 사제 간에 지켜야 할 예의, 전체의 유지를 위한 질서, 학생신분으로서는 분수를 지키는 상대성과 사회성 가운데 체득되도록 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엔 살인, 사기, 강간, 방화 같이 어른들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범죄는 거의 일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눈에 드러나지 않은 영역에선 학생들이 성인이 되면 똑 같이 어른들의 범죄로 확대될 수 있는 사회적 범죄의 싹들이 행해지고 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국가적, 법률적으로 정당하고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공인된 법질서, 교육체계 등의 현존 체제 그리고 동급생, 선후배, 교사를 구분하는 제도나 인간관계 같은 학교의 여러 가지 규칙이나 제도,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와 권위나 질서를 어기고 파괴하는 언행이 그것이다. 민주적으로 정당한 절차와 그로 인해 형성된 기존 질서에 대한 일탈이나 파괴, 자신이 져야 할 어떤 행위에 대한 책임의 방기와 전가, 이유가 있건 없건 간에 급우를 때리거나 따돌리는 왕따도 미래 성인범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악행의 한 가지다.

 

이처럼 말과 행위는 자신이 해놓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선 딴 학생한테 책임을 전가시키는 언행이 성인의 사기나 기망과 무엇이 다르며, 이유가 있건 없건 간에 급우를 때리거나 따돌리는 왕따나 괴롭힘은 성인의 폭력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현실에 눈을 돌리면 권위 해체, 권위 파괴의 시대로 들어선지 최소한 사반세기 이상이 되는 현 시점에 학과 공부와 별개로 체득하게 할 교육내용이 적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공정한 법, 국가이념에 부합하는 합목적적이고 합리적인 교육체제, 민주적인 정당한 교사의 권위에 대한 학생들의 복종은 교육효과를 높일 수 있는 장려해야 할 내용이자 기제다. 학생의 권리, 정의, 자유, 민주, 평등, 인권 류의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충돌되지 않고 공존하도록 교육돼야 한다.

 

기존의 부당한 권위, 절차, 관행에 정당한 방법으로 항의하거나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학생은 자라나 성인이 되면 기성세대의 부정에 타협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봐도 크게 논리가 비약된 말이 아니다. 이런 식의 유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모순된 교육을 받은 이들이 결국 성인이 되면 사회가 경직되고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고 국가기강까지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이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실패한 교육이었음이 판명된 경우를 들라치면 지난 세기 이웃 일본과 독일의 교육이었다.

 

지난 세기 일본 청소년들은 천황이 신이 아님에도 신이라고 거짓말 해 천황은 잘못이 있을 수 없는 무오류와 무소불위의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게 만든 교육을 오랫동안, 아니 평생 동안 받았다. 천황제 절대주의, 국가주의 교육을 받은 결과 그들은 인간과 인간의 평등성, 자신이 삶과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적 자각이나 의문이 불가능한 타자화 된 박제 인간이 돼 갔고, 결국 천황의 이름으로 침략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국가권력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침략전쟁의 하수인이자 협력자가 돼 거국일치로 조선,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 등의 타국 국민들에 대해 살인, 구타, 강간, 재산 갈취, 인력 착취, 인권유린 등등의 반인륜적 범죄를 천황에 대한 충성경쟁으로 시합하듯이 저질렀다. 그들이 범법행위를 정당화한 행위를 저질렀던 것은 인륜적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증발하고 양심이 말라버렸거나 혹은 국가의 폭력적 강압에 저항할 힘을 잃고 집단에 스스로를 내맡겼기 때문이다. 즉 주체적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치 체제하의 독일 병사들도 유사한 행적을 보였다. 1930년대 민주정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도태되고 인근 국가들에 대해 유약한 모습을 보인 독일정부에 실망한 독일국민이 강력한 국가의 모습을 보길 바랐던 사조에 맞춘 국가주의에 사상적 토대를 둔 히틀러의 전제주의 교육이 전일적으로 이뤄졌다. 폴란드 침공을 시발로 전체 유럽으로 확대된 나치의 침략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전쟁범죄들이 모두 나치의 이름하에 정당화 되고 일상화 됐다.

 

600만 명의 유태인을 죽인 광기의 홀로코스트가 죄의식 없이 자행돼도 누구 한 사람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독일 청년들도 일본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침략의 하수인이자 협조자가 돼 주변 국가와 민족들에게 각종 인륜적 범죄를 일삼았던 것이다. 인간과 개성과 사상의 존중 보다는 국가에 모든 것을 예속시켜 버린 교육, 자유와 민주 보다는 독재체제에 묶어 놓고, 정의와 합리성이 아니라 민족의 생득적 우수성과 힘의 논리를 장려하고 우선시 했던 것이다.

 

일본군 병사들과 독일군 병사들은 결국 자신들이 받은 국가주의, 전체주의 교육의 희생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학교교육은 크게는 국가의 정당성과 법질서라는 거대 담론에서부터 작게는 교육목표, 교육과정, 교사의 권위 등 미시적 차원의 제도와 가치나 질서 등이 정당한 것인지 부단히 점검하고 학생들과 교육과정에서 함께 토론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육현장에선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 왕왕 비민주적, 비인격적, 비사회적인 언행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국가, 제도, , 정치, 도덕 등의 원리적이고 원론적인 상부구조는 민주적이지 않고 권위적이며 반인권적인데다 그 하부 차원의 교육현장인 학교에서도 교사집단이 비민주적, 비인권적으로 교육하는데 학생들만 민주적, 비권위적, 인권적이 되어주길 바란다면 한 마디로 대단히 모순이 아닌가?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대해 찬반 양론이 양분됐다는 것은 이 조례가 양측의 요구사항을 다 담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서양철학과 윤리학의 오랜 주제다. 선과 악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의될 선험적 개념이 아니라 현시돼야 할 실천적 변별기준이다. 악은 선의 반대개념이다. 선이 무엇인지 딱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듯이 악 또한 그렇다. 악은 거창하게 무고한 살인, 이유 없는 폭행과 방화, 강간, 사기, 타인의 재산 탈취, 근거 없는 험담과 무시 등등 형법에 저촉되는 적극적 행위들도 있지만, 악행을 보고 방관하거나 본 못 체 하는 것도 소극적 의미의 악이다.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통해 반드시 독재, 국가지도자의 독단 및 전횡 그리고 정치인, 지자체단체장, 공무원, 판검사의 반사회적 부정과 비리, 교사의 삐뚤어진 권위의식에서 오는 부당한 지시와 지나친 간섭과 체벌엔 저항해야 하는 정의의식을 같이 기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작금의 우리사회처럼 어른과 아이들이 한 가정에서 같이 살아도, 같은 학교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어도, 또 한 사회에서 같은 국적을 두고 있어도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이중적 모순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두 세계를 관통하는 도덕의 빛, 양심의 찬란함, 인간으로서의 평등개념에 토대를 둔 정의의식, 인격체로서의 등가성, 조화성과 공존성에 대한 인식이 박약한 이유가 된다.

 

현 세대는 많이 달라진 게 보이지만 1950년대에 태어난 우리세대만 하더라도 핵가족화 되기 전후 시절 3대가 한 집안에 사는 가정이 많았었다. 우리세대는 손자가 잘못해서 부모에게서 꾸지람을 듣거나 매를 맞고 울면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달려가면 이런 소릴 듣고 자랐다. “누가 이쁜 우리 강새이를 때렸노? ? 엄마가 그랬다고? 엄마 따찌! 할매가 엄마 마이 머라 캤으니 인자 울지 마라. 아이고 이쁜 우리 새끼...” 이 광경은 대체로 집집마다 일상처럼 반복된 가정교육의 한 단면이었다.

 

손자가 행한 이러한 한 가지 행동이 누구에겐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되고 누구에겐 잘못한 게 없다고 인정받으면서 부모가 잘못된 행위자로 부정당했다. 동일한 행위라도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따라 행위가 제약을 받거나 눈치를 보게 되는 이중적 판단, 이중적 언행을 하는 아이가 되기 쉬운 교육환경이었다. 우리 연배의 기성세대가 대체로 성인이 돼도 언행의 일관성이 결여된 인간형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요즘 청소년들은 어떨까? 학교교육에서도 일관성이 결핍된 모순적인 교육을 받기 때문에 엇비슷하지 않을까? 모순적이고 일관성 없으며 인성교육이 태부족한 기성세대, 특히 체제옹위를 위한 주입식, 일방적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되면 민주적 시민이 되기 어렵다. 단지 도시에 산다고 시민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시민의식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소양과 양식이 몸에 밴 사람을 가리키는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민주적, 양심적, 주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민을 가리킨다.

 

이러한 과거사를 오늘날 한국사회의 교육현장으로 가져와 보자. 우리사회는 인터넷의 보편화와 1인 언론시대로 진입한 언론환경의 변화로 인해 타인 및 세계와의 소통의 즉시성 덕분에 분명 과거 독재시대나 권위주의 시대 때 보다는 훨씬 기성 권위가 상대적이 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똘레랑스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고무적인 큰 걸음의 진전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절차적 민주화를 이룬 1980년대 학생운동권 시절의 청년들이 기성세대가 돼 사회지도층이 된 지금, 절차적 민주화 다음의 실제적인 민주화의 알맹이가 채워지기는 여전히 턱 없이 미흡한 상태다. 그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양심과 정의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정신적 일관성의 부재로 인해 또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그것의 근원이 되고 있으니까!

 

배경 설명이 조금 길었지만, 한국사회에 학생인권조례가 출현한 것은 이처럼 세상이 바뀜에 따라 자연스레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의식이 확산되고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의식의 소산이다. 사실 이것 자체로 환영할만한 변화임은 부정해선 안 된다.

 

그 동안 교사들 중엔 일부 학생들을 노예 대하듯 무지막지하게 폭행을 가하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무시로 해대는 몰상식한 교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교사가 돼선 안 될 대단히 위험하고 실로 겁나는교사들이었다. 나도 중고등학생 시절 그렇게 당하고 목격한 실제 경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 세대들은 정말 교사들에게 얻어맞지 않고 학교생활을 한 이는 공부를 잘하거나 착한 소수의 모범생들뿐이었던 시절을 보냈다. 그러한 폭행과 폭언은 교육”, “교육한다는 명분 하에 용인되고 정당화된 시절이었다. 권위주의 시절, 아무도 그러한 메카니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피해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폭력과 폭언이 난무한 과거 권위주의 사회의 그런 폐단에 대한 불만의 소리와 개선 의견이 없을 리가 없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학교교육에 대한 정상화, 혹은 그에 대한 반성으로 진보계열의 교육감 후보 측에서 제시하면서 제정된 것이다. 하지만 그 학생인권조례는 치밀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어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 되고 있다.

 

2018. 6. 3. 14 : 4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