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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대만대학에서의 강연 (蔣介石 蔣經國 父子와 金九 金信 父子 : 二代에 걸친 友誼)

雲靜, 仰天 2018. 10. 17. 23:00

국립 대만대학에서의 강연


때 : 2018. 10. 17, 16:00~18:00
곳 : 國立臺灣大學 사회과학대학 강당
연사 : 徐相文(金九재단 金九포럼 學術企劃委員)
주제 : 蔣介石 蔣經國 父子와 金九 金信 父子 : 二代에 걸친 友誼)
(Jiang Jieshi, Jiang Jingguo and Kim Koo, Kim Shin : Two Generations of Fraternity)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 받은 한국의 김구재단 산하 김구포럼의 학술기획위원 徐相文이라고 합니다. 제가 대만 국립 정치대학 역사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느라 과거 인생의 황금기인 30대 청년 시절 10여년을 보낸 이곳 타이페이는 제게 남다른 인연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들, 함께 공부한 同學들이 많고, 제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이 잠자고 있는 곳이어서 자주 찾아오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구 주석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진전 행사를 위한 일원으로 이곳을 다시 찾아오게 돼 대단히 기쁩니다. 김구재단이 김구 주석의 발자취와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사진 전시회를 이곳 중화민국의 소재지인 대만에서 열게 된 것을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둔 이 시점에 대단히 뜻깊게 생각합니다.
 

김구 사진전시회장과 강연장이 함께 마련된 국립 대만대학 사회과학원 입구
대만대학 총장을 비롯한 많은 교수들과 학생, 주한 대만 대표부의 전 대표, 한국대표부의 대표, 언론인 등등 각계의 다양한 인사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는 필자

 

오늘 대단히 뜻깊고 의미 있는 이 행사에 각계각층의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중국근현대사 전공자로서 본인이 여러분에게 “蔣介石 蔣經國 父子와 金九 金信 父子 : 二代에 걸친 友誼” 에 대해 소개를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구재단과 대만대학교의 김신 포럼이 공동으로 김구 사진전을 여는 것은 과거 역사, 특히 지난 세기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침략에 김구 주석을 지도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장개석 총통을 지도자로 한 중화민국 양국이 공동으로 대항한 역사를 되돌아보자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意義와 교훈을 되새김과 동시에 2대에 걸친 우의를 계승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상호 발전을 위한 상호切磋가 필요할 것입니다. 
 
과거 19세기 말 西勢東漸의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해 조선과 청국은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나라는 식민지가 되었고, 다른 한 나라는 반식민지가 돼 제국주의의 질곡과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양국은 좌절하지 않고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침략과 悖道에 다 같이 저항하고, 구국과 독립에 힘썼습니다.

강토가 일제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한민족이 유린당하자 많은 조선의 지사들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중화민국으로 건너와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同病相憐의 처지에 있던 중국은 임정 및 김구 등의 한국독립운동 지사들을 지원했습니다. 지원은 멀리 중국국민당의 전신인 동맹회 시절로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적지 않은 중국 朝野의 有志들이 한국독립운동 지사들을 계속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중화민국 정부가 임정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4월 김구 주석과 윤봉길 의사가 감행한 虹口 공원 의거가 성공된 후 장개석 총통이 김구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윤봉길 의거 후 일본측이 홍커우사건 주모자 김구를 잡기 위해 그에게 건 현상금은 60만 大洋이었습니다.
 
대양은 銀圓을 말하는데, 1대양은 동전 300개와 바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가치로 치면 한화로 100억대가 넘는 거금이었습니다. 이 돈에 눈이 어두워 일제와 일본인은 물론, 일부 중국인과 조선인도 백범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 조야의 仁義를 추구한 인사들은 김구 주석을 숨겨주고 금전까지 지원해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도록 힘썼습니다. 김구 주석과 임정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장개석 총통과 중국국민당의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로부터는 재중국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중국국민당의 지원이 공개적이 되었으며, 임정에 대한 지원도 중국국민당의 정책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중국정부는 군사비, 임정 및 각 한인단체에 대한 보조비와 차관 제공뿐만 아니라 한인 교민들의 생활보조비, 각종 구제비, 구호물품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임정은 이 지원금으로 임정 운영, 독립운동활동비, 임정 구성원 및 그 가속들의 생활보조금으로 썼습니다.
 
중국국민당은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자국의 사정도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외교적 지지에서부터 군사인재 양성의 지원, 물질적, 경제적 지원에 이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료에 나타난 것만 해도 1932년 말부터 비정기적으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정기적으로 매월 적지 않은 금전을 임시정부에 제공했습니다.
 
이 가운데 장 총통께서는 일제의 침략에 직면해 상해를 내주고, 중화민국 수도 남경을 버리고 중경까지 후퇴를 하게 되면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임정도 중화민국정부를 믿고 의지해 일제가 항복하기까지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김구 주석과 장개석 총통의 대담 장면을 그린 대형 유화 작품

장개석 총통은 심지어 1938년 5월 7일 장사(長沙) 남목청(楠木廳)에서 피격된 김구 주석의 치료비까지 지원했습니다. 南京, 長沙, 廣州 등지를 거친 임정이 마침내 그 해 11월 중순 四川省의 重慶 인근에 도착하기까지 김구 주석의 지원요청에 응해 중국국민당은 임정직원들과 그 권속들이 거주할 수 있는 땅과 건물구입 자금도 보조해줬습니다. 또 광복 후 장개석 총통은 환국하는 김구 주석에게 미화 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돈은 김구 주석이 중국에 남아 있는 한인들의 수습, 귀국 후에 소요될 여러 가지 정치자금이 필요해 장 총통에게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중경의 임정청사도 중국국민당 측에서 지어줬습니다. 임정이 중경으로 이동해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江蘇省 주석, 陳果夫, 광동성 주석 吳鐵城 그리고 貢沛誠, 朱慶瀾, 査良釗, 褚輔成, 殷鑄夫, 張治中, 徐恩曾, 朱家驊, 邵毓麟 등의 국민당 인사들이 피난중의 임정 한인들에게 차량제공과 여비에다 생활비까지 제공했습니다.
   
경제지원에 그치지 않고 장개석 총통은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카이로 회담 등에서 미국, 소련, 영국 등의 열강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한중 양국의 우의, 지원과 협력은 전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장개석 총통의 반공 의지와 투쟁은 한국전쟁에까지 이어져 비정규군을 한국에 파견해 유격전, 심리전, 정보전, 선전전, 중공군포로 심문 등에서 미군과 한국정부를 도왔고, 한국정부도 중화민국의 요청에 응해 한국전쟁에서 잡힌 중공군 포로 1만 2000여명을 중공에 돌려보내지 않고 중화민국으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19일 金奎植, 嚴恒燮 등의 임정 요인들 및 아들 김신을 대동하고 육로로 臨津江을 건너 38도선을 넘어 평양까지 올라가 김일성과 만나 남북한의 단일 정부 수립을 반대했습니다. 김구 주석이 평양행을 결행한 것은 분단을 막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민족통일을 위해 결행한 최후의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김구 주석은 단일정부 세력에게 암살을 당해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장개석 총통도 하나의 중국을위해 切齒腐心의 심정으로 반공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한국정부와도 반공을 위한 협력을 중시하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 6월 백범께서 타계했을 때 장개석 총통이 지어 보낸 輓詩

이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만 상황에 대해서까지 김신 대사에게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조언을 해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장 총통을 김신 대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화민국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어떤지 의중을 타진해주기를 요청했고, 김신 대사의 알선으로 실제로 장개석 총통은 미국의 의중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세계 현대역사에서 흔히 있는 경이로운 일로서 대단히 이채롭습니다.
      
이러한 상호 협력과 신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김구 주석과 장개석 총통 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한 믿음, 반제 저항정신과 반공정신에 토대를 둔 두 분의 정치사상의 일치 내지 유사성에서 연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김구 주석과 장개석 총통이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함께 보여준, 전제제도 청산, 반제식민지 침략투쟁, 자강 부국, 독립, 민주주의 지향, 민족분단을 막고 하나의 한국, 하나의 중국을 지향한 역사적 사명 및 의지와 비전이 견고하게 결합된 결과입니다.
      
사실상 한중 양국은 고대로부터 정치사상적으로 공통의 이상을 추구한 전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大同思想, 民本, 민주사상, 公義와 仁義, 선공후사(范仲淹), 애국애족 등의 뛰어난 사상적 전통이 있습니다. 맹자와 순자는 이렇게 말했었죠.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듣는 것을 듣는다.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보는 것을 본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孟子) “나로부터 나온 것이 틀리거나 부당하다면 하늘은 그것을 나무랄 것이며, 백성들은 그것을 저버릴 것이다.” “임금은 배요, 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子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荀子). 天의 대리자인 天子, 즉 군주가 군주답지 않을 땐 民이 그 왕조를 뒤엎어도 된다는 易姓革命사상이 그걸 표상합니다. 맹자와 순자에게서 백성은 곧 하늘이었고, 천자는 백성을 받들어야 할 하늘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로 파악됐습니다. 
 
이 사상은 조선조로 넘어와선 정도전 등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로 전승됐고,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는 “사람이 하늘”(人乃天)이라고 역설한 孫秉熙, 崔時亨이 주창한 동학사상으로 표출된 바 있지만, 서양의 민주주의사상을 능가하는 민본주의의 그 수승한 정치사상이 현대에 와선 전통이 약해진 느낌이라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主權在民을 중핵으로 하고 있으며, 주권재민은 중화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孫中山선생이 중화민국을 수립한 첫날에 세운 원대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목표였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伊藤博文을 처단한 것도 公義와 仁義의 발로였습니다.
    
장개석, 장경국 두 총통께서도 이러한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은 위 맹자의 말을 적으면서 “결단코 나는 나의 개인적 허영을 위하여 나라가 진정 손실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 바 있는 사실이 이를 표증합니다. (1932년 2월 16일), 또한 역량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것을 중국이 나아갈 길이라고 보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 개인을 희생하겠다는 결심을 한 이상, 내가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1933년 7월 14일).
 
장개석 총통이 공의와 의를 중시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壯烈千秋”라는 글을 남겼고,(1972년 7월 6일), 장경국 총통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날(1979년 9월 2일)에 “碧血丹心”이라는 글을 남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제에 저항하고 피압박 약소민족의 처지에 처한 한국 임정과 한국민을 도와 준 것도 바로 동일한 인식의 所産으로 보입니다. 장개석, 장경국 부자의 반부패 노력도 公義와 義를 실천하고 부국강병, 반공을 위하고자 한 동일한 사상에서 기인했던 것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김구 주석과 김신 부자 역시 동일한 사상적 전통에서 그러한 사상적 이상을 현실에 체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독립, 부강, 하나의 민족, 애국애족 정신과 사익을 버리고 대의와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無私的 삶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구 주석께서 평생을 재물과 권력에 사욕 없이 나라와 민족 사랑을 우선했던 것처럼, 김신 장관께서도 어릴 적부터 가난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지금 동아시아는 격변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남북한이 기존의 무력 대결을 지양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흐름이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청산, 군사대결 종식, 평화체제 구축, 민족통일, 구시대의 종언,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나아갈 수 있는 서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70년 전 김구 주석께서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했던 남북분단방지와 민족통일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실천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김구, 김신 부자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希願이자 시대정신입니다. 이러한 希願이 바로 오늘 우리가 쫓아야 할 시대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20세기 한중 양국이 걸어온 역사의 면면을 재복원함과 동시에 仁義에 바탕을 둔 김구, 김신 부자와 장개석, 장경국 부자의 2대에 걸쳐 보여준 우의와 협력정신을 새로이 조명하고 되살려 낼 때 한국과 대만이 호상 切磋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대만의 젊은 청년들에게 당부 드립니다. 대만은 지난 20세기 반제 항일, 한중 협력, 양국 지도자들의 우의와 협력의 역사를 실증하는 엄청난 량의 자료들이 쌓여 있는 역사자료의 寶庫입니다. 이러한 것은 전대가 물려준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러한 유산을 썩혀 두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양국의 손실입니다. 문화유산을 활용해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기성세대는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다리를 놓아줘야 합니다. 그 가교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김구재단 김미 이사장님, 김구포럼 이태진 좌장님, 楊昌洙 주 타이페이 한국대표부 대사님, 郭大維 대만대학 총장님, 朱雲漢 장경국학술기금 집행장님 겸 중앙연구원 원사님, 胡爲眞 중국문화경제협회이사장님, 石定 주 한국 대표부 대사님, 대만대학 사회과학대학원장님, 정치대학 李明 교수님 등등 많은 전문가, 학자들이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이 다리를 놓는데 작으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긴 시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내빈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에도 행운이 깃들기를 희망합니다.  (끝)
 
*위 강연내용은 원고였고, 실제 강연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조금씩 내용을 보태기도 하고 생략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대만 양측 참여 내빈들이 함께 한 오찬장에는 한국, 대만, 미국 등 약 30명 정도가 참여했다.
김구 재단의 김미 이사장이 주최한 오찬 중 미국에서 참석한 콜럼비아 대학 앤드류 마크 교수와 한국과 대만관계, 김구와 장개석 관계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필자
왼쪽부터 대만 中美文化經濟協會 이사장 胡爲眞 박사(중국현대사에서 장개석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자 저명한 장군 중의 한 사람인 胡宗南 장군의 아들), 대만대학교 사회학과의 劉 교수,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