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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과거, 현재, 미래 : 일본은 왜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가?

雲靜, 仰天 2012. 3. 31. 06:28

독도의 과거, 현재, 미래 : 일본은 왜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가?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현재의 자신은 과거 자신이 살아온 결과이며, 자신의 미래상을 보려면 오늘 자기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공동 집합체인 국가나 영토에도 적용 가능하다. 독도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독도가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독도영유권을 확고하게 행사하지 못하면 독도를 계속 영유할 수 있을지 앞날을 장담하지 못한다.
 
현재의 독도위상을 점검하고 독도위기의 근원을 살펴본 뒤 독도에 대한 일본의 행보가 어떠할지 전망해보자. 그리고 이를 토대로 우리의 대응자세와 대비책은 어떠해야 하는지 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Ⅰ. 독도는 왜 위기인가?
 
1. “신 한일어업협정”의 문제점
 
물새 떼, 괭이 갈매기, 파도와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유유자적 평화로운 자태를 보이고 있는 독도가 위기인가? 그렇다. 독도는 지금 공전의 위기다. 그 첫 번째 표증은 우리정부와 일본정부 간에 1998년 11월 28일 체결돼 이듬해 1월 22일부터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이하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약칭함)이다. 이 협정에 내재돼 있는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독도 기점이 아니라 울릉도를 기점으로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y Zone)을 정한 점이다. 이로 인해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정부의 입장이 강화된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독도가 섬이 아니라 암석으로 간주돼 지도상에 독도 명칭이 표시되지 않았으며, 좌표로도 표시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섬은 EEZ를 가질 수 있지만 암초와 암석은 EEZ를 가지지 못하게 규정된 국제해양법에 따라 독도가 EEZ를 가질 수 없게 됐다.
  
셋째, 독도가 “공동관리 수역”(또는 “잠정수역”)에 놓이게 됨으로써 울릉도와 분리됐다. 독도가 그 母島인 울릉도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마치 19세기 일제가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켜 독립국임을 인정한 후 그 다음 수순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제의 악랄한 수법을 상기시킨다. 원래 협상과정에서 한국 측은 울릉도를 EEZ의 기점으로 삼아 울릉도와 일본의 오키섬(隱岐島) 사이의 중간선을 EEZ의 경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했다.
  
반면 일본 측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전제하면서 시종일관 독도를 EEZ의 기점으로 삼아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중간선을 EEZ의 서쪽 경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린 결과 독도영유권문제를 합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 한일 양국은 우선 어업협정만 개정하고 EEZ경계 획정은 유보한 채 독도주변의 넓은 바다를 “공동관리 수역”으로 획정해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독도가 이 수역 내에 들어가게 됐고, 독도를 일본영토로 설정하고 독도를 기선으로 배타적 경제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일본정부의 전략이 반 정도는 먹혀들어 간 셈이다.
  
한국정부는 일본과 달리 이 “공동관리 수역”을 “중간수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정부가 중간수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엔해양법협약 제74조 제3항에 명기돼 있는 잠정조치(provisional measure, provisional arrangement)의 일종, 즉 관련국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EEZ가 정식으로 획정되기 어려울 경우 잠정적으로 합의한 수역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신한일어업협정에서 체결된 독도의 상황. 위 지도에서 보듯이 한국정부는 독도가 들어가 있는 해역을 '중간수역'이라고 명명한다. (사진 출처 : KBS)
반면, 일본정부는 같은 해역을 중간수역이라고 부르지 않고 '잠정수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한일 간의 이 잠정조치는 협약으로 최종 확정하지 않고 장기간 방치해놓으면 기정사실화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것은 사실상의 법적 상태로 굳어질 수 있다. 국제법에서도 국내법과 마찬가지로 ‘법적 안정성’(legal stability)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간수역”을 장기화 하면 독도의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약화될 수 있는 것이다.
 
2. 일본정부의 “타케시마”영유권 주장의 전민교육
  
위기를 알리는 두 번째 상황으로는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노린 최근 일본정부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들 수 있다. 일본정부는 21세기에 들어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독도의 일본영유를 주장하는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독도의 “타케시마”화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이는 근린국 침략에도 모자라 아시아민중에 대한 만행과 유린까지 자행한 과거사를 은폐하거나 호도, 합리화 혹은 강변함으로써 자국민을 우민화하는 일본정부의 근현대사교육과 맞물려 있다. 그 실태를 연대기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2005년 2월 22일 “타케시마의 날”을 제정해 독도에 대한 야욕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가 시도할 경우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피할 속셈으로 지방정부에게 그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이후 해마다 벌여오고 있는 시마네현 정부의 “타케시마의 날” 기념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래 시마네 현민들은 독도에 관심이 적었지만, 이 영향으로 최근에는 ‘타케시마’가 시마네현 지도에까지 등장하게 됐다.
  
이 뿐만 아니다. 2007년 12월 일본 국토지리원은 독도에 대한 정밀위성지도를 제작해 국내외에 배포했는가 하면 이를 10개국 언어로 번역해 배포했다. 이 지도는 일본외무성 홈페지에 게시돼 있다. 또 2008년 7월 일본문부성은 중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독도명기를 강행했다. 학습지도요령해설서란 각급 학교에서 교사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실제 교육지침서이기 때문에 그 파급의 정도는 작지 않다.
 
2008년 12월 일본 방위성은 일본방위백서에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로 명기하기 시작했다. 방위백서에 그치지 않고 매년 외무성 외교청서에도 독도의 일본영유를 기술하고 있다. 금년 3월에는 일본 문부성이 각종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중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시하거나 기술한 회사의 교과서만 검정에 통과시켰다.
  
민족적, 국가적 이념이 스며들기 쉬운 민족, 국가 및 영토를 포함한 역사교육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 의거해 교육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일본은 역사교육에서 진실을 가르치기는커녕 오히려 국가가 왜곡과 호도에 앞장서고 있다. 일본정부의 이 같은 교육이 우려되는 까닭은 그것이 가져올 폐해가 불 보듯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진실이 없는 교육은 세뇌다. 세뇌는 맹목적 인간형을 만들고, 경우에 따라선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진실이 실종된 세뇌교육은 우민을 양산시키고, 이웃나라와 소통장애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진실을 외면한 교육으로 언로가 막히는 소통장애는 민족 간에 불협화음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고 급기야 상대국과 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
 
여기에다 정치지도자들의 폐쇄적인 자국이기적인 집단욕망이 더해지고 영토와 같은 현안문제를 둘러싼 마찰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금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거행된 원폭피폭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정부의 한 지도자가 “핵, 전쟁 없는 세상, 평화를 지향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또 다시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한 사실은 이 가능성을 예감하게 만든다. 그들의 저의와 장차의 행보가 어떠할지 자명하다.
 
3. “타케시마”의 홍보우위와 불확실한 국제사회의 향배
  
세 번째 위기감은 일본정부와 정치권이 당연한 듯이 자행하는 일본정부의 집요한 대외홍보가 상당부분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일본정부의 체계적인 홍보 결과 국제사회에 이미 ‘독도’ 보다 ‘타케시마’라는 명칭이 더 보편적이고,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알고 있는 국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세계 인터넷 사이트 중 독도라고 쓰지 않고 ‘리앙쿠르 巖’이라고 쓰는 곳은 2008년 현재 세계 최대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비롯해 3만 8,500개에 이른다. 이는 2005년의 2만 2,000개에서 3년 사이에 자그만치 60%나 늘어난 수치다. ‘리앙쿠르(Liancourt Rocks) 암석’이란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 호가 이 섬을 섬이라고 하지 않고 ‘리앙쿠르 바위’라고 붙인 데서 유래하는데, 서구에 널리 알려진 명칭이다.
  
이것은 ‘타케시마’로 바로 불리어지기 전의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독도’가 섬이 아니라 암석이라는 기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적인 꼼수가 일정부분 적실했음을 말해준다. 또 세계의 유수한 상업지도, 국제기구, 각국의 교과서, 언론 매체, 학술지 등에는 ‘독도’ 보다 ‘타케시마’로 더 많이 불리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일본은 세계인의 인식 속에 독도의 일본령을 고착화시킬 이미지조작의 한 수법으로 동해를 일본해로 명칭 변경시키는 작업에 착수한지 오래다. 주지하다시피 동해는 일본열도, 한반도, 사할린, 및 연해주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이 일본해로 명칭이 변경될 경우를 상상해보라! 그럴 경우 세계인의 인식 속에 당연히 일본해에는 일본령의 ‘타케시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心象地理(imaginative geography) 개념에 의한 이미지 조작이 초래할 위기를 현실화 시킬 요인은 현금 힘(power)이 정의롭게 행사되지 않고 국가이익에 따라 전략적으로 운용되는 국제환경도 독도의 운명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향배가 변수가 될 수 있다. 최근의 한미 양국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천안함사건, 북핵을 겨냥한 대북 공조 등이 말해주고 있듯이, 한미관계는 현재 매우 돈독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의 한미 군사동맹 관계가 “이처럼 좋은 때가 없다”고 할 정도로 최상의 긴밀한 유대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역사적 관점에서 1세기 반 이상 미국이 구사해온 동아시아 정책과 행보를 보면 현 한국정부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우호적 태도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일시적인 시위에 소용된 ‘한국 활용’적 측면이 강하다. 과거 20세기 역사를 되짚어 볼 때 미국은 한국 보다 일본을 더 중시해왔다. 현재도 그러한 상황은 변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경제, 군사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더욱 일본을 중시할 것이다.
  
현재 독도문제에 대해 미국은 침묵하고 있다. 독도분쟁사태가 발생하면 일단 중립적 입장을 취할 것으로 보이지만 주변 상황에 따라 일본을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자국영유를 주장하는 몇몇 섬들이 캐나다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처지를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과거 일본이 독도의 일본령을 획책하는데 미국이 긴밀하게 협력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즉 전후 1947년 초부터 개시된 대일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의 설득과 제안을 받아들여 당시 남한의 미군정 하에 있던 독도를 미 공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면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행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한 바 있다.
  
특히 미국은 대일강화조약 제5차 초안까지 분명히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기했음에도 일본 측의 로비를 받은 유엔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정치고문이자 주일 일본정부의 정치고문, 미 국무부 외교국장이었던 윌리엄 시볼트(William J. Sebald)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6차 초안에서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누락시켰으며, 맥아더도 시볼트의 주장에 동조한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기명되던 것에서 일본 영역에 들어가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윌리엄 시볼트. 1901년생인 그는 전후처리문제 협상인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 시 독도의 귀속권 처리 과정에서 일본정부의 로비에 먹혀든 친일파 외교관이었다. 그의 처도 일본인이었으니 일본은 처가이자 장인의 나라였다. 버마와 호주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한 뒤 1980년에 사망했다.

또 1951년 2월 서울이 중국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와중에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미 국무성 특사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일본의 각계 정당, 사회단체들로부터 편입청원을 받고 독도의 일본 귀속을 묵인하기도 했다. 이에 한국정부가 독도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1951년 8월 10일 이번에는 미 국무부 차관보 러스크(Dean Rusk)가 “리앙쿠르 섬은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 번도 없고, 1905년 경부터 일본의 시마네 현의 관할 하에 있었다”는 취지의 서한을 한국정부에 보냈으며, 결국 대일 평화조약에 일본이 포기할 섬의 리스트에 독도를 넣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1954년 9월 미국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일본정부의 제안을 지지했다. 또한 일본의 이 제안이 계속 유효하게끔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의 입장을 옹호한 바 있다. 이 제안은 한국정부에게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독도문제 해결방안의 하나로 한일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으로 소유하자고 제의했다. 즉 “독도의 일한공유론”을 제의한 셈이다. 1960년 5월 17일의 일이었다.
  
중국은 현재 독도영유권 문제에서 우호적으로 보이거나 최소한 관망하면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변수도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작금의 중일관계를 볼 때 현재로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지만 일본이 중국의 조어도 공동개발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독도의 일본영유권 주장을 중국이 승인할 경우, 혹은 대만독립의 불승인과 같은 문제로 중일이 독도를 “빅딜”대상으로 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혹자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겠으나 과거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소국을 희생시킨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Ⅱ. 과거 일본은 독도를 어떻게 침탈했는가?
 
1.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했던 일본
  
일본은 무슨 근거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까? 또 그 주장은 정당한가? 그 근원은 일본제국주의시대 독도를 탈취한 데에 있다. 그런데 독도에 대한 한일 간의 인지사실 유무를 살펴보면 일본은 과거 독도에 대해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인정했던 점이 무엇보다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정부 차원에서 기록하고 해당 정부부서에 행정지도 방식으로 분명히 고지한 바 있다. 관련 사실을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667년 일본 최초로 독도를 기록한 마쯔에번(松江藩)의 藩士 사이토 칸스케(齊藤勘介, 齊藤豊宣으로도 불렸음)가 저술한 ‘隱州視聽合紀’에 독도는 다음과 같이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기록돼 있다. “隱州는 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隱岐島라고 말한다. (중략) (은기도에서-인용자) 이틀 낮과 하루 밤(二日一夜)을 가면 송도(독도-인용자)가 있다. 또 하루거리에 다케시마(울릉도-인용자)가 있다. (중략) 이 두 섬은 무인도인데, 高麗를 보는 것이 마치 雲州에서 隱岐國을 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서북 경계는 이 州(隱州-인용자)로 限을 삼는다.” 즉 당시 일본에선 송도는 독도, 죽도는 울릉도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들이 은기국이라고 부른 까닭은 모든 번을 마치 독립된 국가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인들 사이에는 출신지를 물으면서 “어느 國(쿠니)에서 왔느냐”고 묻는 관습이 남아 있다. 國(쿠니)라는 단어는 나라를 뜻하기도 하고 내가 살던 고향이라는 뜻도 있다. 어쨌든 몇몇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위 내용처럼 隱岐國의 서북에 송도와 죽도가 있다고 했지만 은기국, 즉 일본에 포함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같은 책의 부록 지도에도 前島와 後島만 그려져 있지 송도와 죽도는 제외돼 있다.
  
둘째, 1696년 1월 일본 막부의 關白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이 사실을 이듬해 1월 정식으로 조선에 서찰로 통보했다. 동시에 막부는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려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다. 그 후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에 몇 차례 외교문서가 왕래된 끝에 1699년 대마도의 平義眞이 조선의 예조참의 이선부에게 보낸 외교문서를 끝으로 외교문서상으로도 정리가 됐다. 에도 막부는 물론 일본의 재야인사들까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명백히 인지하고 존중했다. 이러한 사실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까지 지속됐다.
  
셋째, 19세기 중후반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재개 및 병탄을 위해 국가 최고 기관에 해당하는 太政官(오늘날 총리대신에 해당)의 지시로 1869년 12월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사이토 사카에루(齊藤榮) 등의 외무성 고관들이 부산으로 건너와 사전에 조선사정을 정탐하고 이듬해 복명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했다. 이 복명서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정했다. 그리고 독도가 조선의 부속령으로 된 경위를 게재한 문서를 일본 측에서는 찾지 못했지만 조선에는 독도가 조선의 부속령임을 알리는 문서가 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으며, 이 사실을 일본외교문서에 수록했다.
  
넷째, 일본 육군성 참모국이 1875년에 작성한 ‘朝鮮全圖’, 일본해군성 水路局이 1876년에 편찬한 ‘朝鮮東海岸圖’에서 공히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했고, 이 지도들은 1905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재판돼 사용됐다.
  
다섯 째, 1877년 메이지 정부의 내무성은 일본국토 지적조사를 개시하면서 약 5개월에 걸친 심층조사 결과 “죽도 외 1도”, 즉 “울릉도 외 독도”는 일본과 관련이 없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에 대해선 이미 1696년 “안용복 사건”으로 종결된 것으로 결론을 냈다. 즉 내무성은 “영토의 가부를 결정짓는 문제는 중대한 일”이라고 하면서 1877년 3월 17일 태정관의 최종 결심을 요구했다. 3월 20일 태정관은 “품의한 취지의 죽도 외 1도의 건에 대해서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해 3월 29일 내무성에 보냈다. 내무성은 다시 이 지령문을 4월 9일 울릉도 및 독도의 귀속여부를 최초 질의한 시마네 현에 보냈다. 이것은 시마네현 정부가 그 전년인 1876년 10월 16일 내무성에 공문을 보내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 현에 포함시킬 것인가”라는 질의를 보낸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여섯 째, 1903년 1월 일본극우단체인 흑룡회가 발행한 ‘韓海通漁指針’에 독도는 “맑은 날 울릉도의 높은 산봉우리에서 볼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독도를 대한제국의 강원도에 소속된 섬으로 표시돼 있다. 실제로 날씨가 청명하면 독도는 울릉도에서도 육안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막부가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린 1696년 이후부터는 죽도와 송도, 즉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령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측량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노 타다타카(伊能忠敬)가 1821년에 완성한 “大日本沿海輿地全圖”를 견본으로 1867년에 작성된 에도시대 유일의 관찬지도인 “官板實測日本地圖”에 죽도, 송도가 기재돼 있지 않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됐다. 이 점은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내 양식 있는 학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 외무성은 “竹島―竹島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라고 이름붙인 14쪽의 팜플레트(2008년 2월 제작)에서 “울릉도와 타케시마를 조선반도와 은기제도 사이에 적확하게 기재하고 있는 지도는 다수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는 상기 지도 외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게 일본 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정부는 국가의 공식 입장을 밝힌 이 팜플레트를 통해 일본국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일본제국주의의 대두와 독도 침탈
  
그런데 근대화가 진전됨에 따라 일제가 서양열강들과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20세기 초엽 가공스런 반전이 일어났다. 일본이 과거 스스로 인정했던 독도의 한국영유 사실을 부인하고 독도를 강탈한 것이다. 배경은 제국주의적 대외침략의 패권 경쟁에서 러시아와 벌인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898년 아관파천 전후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한반도 독점점령에 걸림돌이 된 러시아를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들이 독도를 자국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흑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이때를 전후한 1900년대부터였다. 1904년 2월 8일, 중국 동북에서의 일본의 사활적 이익과 한반도의 독식을 위협 내지 견제하고 있던 러시아를 제어해야 할 필요성에서 일제는 인천과 중국 뤼순(旅順) 주둔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기습으로 기선을 제압당한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대한해협까지 남하시켜 일본육군 수송선 2척을 격침시키면서 반격에 나선 결과 일본 해군은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했을 정도로 열세에 처했다.
  
조선해가 전장화되자 그때까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대한제국의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던 일본의 군부와 외교 관료들은 독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전력열세를 뒤집기 위한 방편으로 러시아해군의 활동 감시와 남하를 막는다는 군사적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904년 9월 1일 일본해군성은 먼저 울릉도 서쪽과 남쪽에 무단으로 러시아 해군감시용 망루를 설치했다.
 
계속해서 같은 달 24일 일본함정 ‘니타카 마루’(新高丸)를 독도에 보내 망루설치를 위한 현지조사에까지 나섰다. 나아가 9월 29일에는 농상무성 및 외무성과 담합하여 일본인 어업기업가인 나까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로 하여금 독도의 일본영토편입과 독도에서의 강치 잡이 독점청원서를 일본정부의 내무성, 외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토록 획책, 사주했다. 당시 나까이 요자부로는 물론, 상기 각성들의 당국자들도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 명백한 한국영토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던 상태였다.
  
러시아 발트함대와의 결전을 앞둔 일본해군은 이듬해 1월 10일 내무대신과 총리대신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비밀리에 보내 내각회의를 열어 독도를 편입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제국정부는 1월 28일 내각회의를 열어 나까이 요자부로의 청원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독도가 무주지이고, 그가 1903년 이래 독도에서 어로행위를 한 것이 국제법상 점유사실이 있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독도를 시마네(島根)현에 편입시켜 ‘타케시마’라고 명명했다. 전후 일본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는 독도를 선점한 후 내각의 독도편입 결정을 1905년 2월 시마네현에 통고하였고, 그 달 22일 ‘현고시 제40호’를 통해 이 사실을 일반에 알렸다고 한다.
  
일제는 이 같은 요식 행위를 밟으면서 계획적으로 대한제국정부의 항의가 불가능하도록 외교권을 빼앗고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 독도침탈 사실을 통고했다. 그것도 대한제국정부에 정식으로 통고한 것이 아니라 시마네 현이 울도군수에게 알렸을 뿐이다. 즉 한국 측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1906년 3월 28일에야 울릉도에 들른 시마네현의 관리로부터 전해들은 울도 군수 沈興澤의 보고로 일본정부의 독도편입사실을 알게 됐다. 이 시점은 1905년 11월 17일의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 체결로 서울에 일제통감부가 설치(1906년 2월 1일)되고, 한국정부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내정까지 통감부의 지휘감독을 받게 된 때였다.
  
상기 보고를 접한 대한제국정부는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일본메이지정부의 주장이 근거무근의 억지라고 보고 즉각 의정부 참정대신 朴濟純에게 5월 20일 지령 제3호를 내게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부에 지시함으로써 독도가 명백한 한국영토임을 분명하게 밝혔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한제국정부의 항의는 외교 문서화되어 일본정부에 전달될 수가 없었다. 대한제국 외(교)부가 폐지되고 외교행위가 원천 봉쇄되어 있던 상황이었기에 항의를 한다면, 논리적으로 보아 외교권을 탈취한 일제통감부가 자기 본국정부에 항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일제가 계획적으로 암암리에 추진한 독도편취는 구미열강에 알려지지도 못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일 양국 간에 외교적으로도 쟁점화 되지 못한 채 1910년 한국이 강제 병합되어 버렸던 관계로 일제 강점기 동안 독도는 국제사회는 물론 한국인들의 인식에서도 잠시 멀어지게 됐다.
  
독도는 전후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후 대일 승전자가 된 연합국이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로 일본영토를 “4개의 主島(北海島, 本州, 九州, 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약 1,000개의 인접 소도를 포함”한다고 규정하면서, 그 주권을 이들 섬들에 국한시켰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명백히 일본영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독도문제가 일단락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간 잠복되어 있던 독도영유권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52년 1월 18일, 한국전쟁의 와중임에도 대한민국정부가 발표한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통칭 이승만의 ‘평화선’)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 ‘선언’에서 한국정부는 독도와 그 영해가 한국령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즉각 “의문의 여지없이 일본영토인 이 섬에 대한 대한민국의 그 같은 가정이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영유권문제가 표면화되면서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된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는 일본의 이 같은 항의를 일축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지령(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하고 한국에 반환한 조치는 정당했다고 공박했다. 동시에 연합국최고사령부가 훈령 제1033호에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거듭 재확인했음을 상기하라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한일간의 외교문서와 매체를 통한 반박과 재반박을 거듭하는 가열찬 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1953년 6월 시마네현으로 하여금 어민들에게 독도어업 허가권을 발부해주게 하는가 하면,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2척에 30여명의 관리를 태워 독도불법상륙을 시도케 한 후 ‘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고 쓴 경계표를 설치하게 만들기도 했다.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일본극우파들은 1950년대에 여러 차례 독도인근 해역까지 침범하기도 하고, 직접 독도에까지 상륙해서 탈취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울릉군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독도의용수비대’가 발포한 총격에 격퇴됐다. 한국정부도 일본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함으로써 민초들의 독도수호의지를 북돋우었다. 국가 최고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에 힘입어 정부는 평화선을 침범해오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여 재판에 회부하는가 하면, 해양경찰대를 파견하여 전쟁까지 불사할 기세로 나포에 불응하는 일본선박들에 총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단호한 대응에 부딪힌 일본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독도의 최종적 귀속결정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임하여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만들든가, 아니면 일단 꼬리를 내리고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1954년 9월 25일,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구상서를 보내 독도영유권시비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가리자고 제의해왔다. 이 제의는 10월 28일 한국정부로부터 즉각, 그리고 당연히 거부됐다. 명명백백한 고유영토를 정의가 실종된 힘의 논리에 내맡긴다는 건 상상불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1962년 3월 한일 외상회담에서 일본 외무대신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가 또 다시 같은 제의를 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독도문제의 국제분쟁지화 기도, 즉 이 섬을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내맡기자는 일본의 제의가 한국정부로부터 일축되자 일본은 일단 공세의 수위를 낮추고, 자국민을 대상으로 독도영유권에 대해 사실을 호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장기 전략을 취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연례적으로 한국정부에 독도의 ‘불법점령’을 항의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오고 있다. 물론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경우를 대비한 명분축척용이다. 독도탈취의 다음 제3라운드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점부터 일본은 국력을 바탕으로 한 대외홍보전략에도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3. 독도문제의 근원 : 미청산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사와 ‘아전인수’식 해석
  
일본의 독도탈취의 근원은 일본정부가 자국의 제국주의 대외침략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과거사를 자의적으로 비틀면서 또 다시 군국주의의 망령을 불러들이고 있는 데에 있다. 우리는 먼저 “한일합방”이 원인무효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시 체결된 한일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따라서 일제가 자의적으로 결정한 독도의 ‘일본영토편입결정’도 결정당일인 1905년 1월 28일전까지 한국이 독도를 지속적이고 실효적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애시 당초 원인무효다. 더군다나 자의적인 독도편입이 강압적인 수단을 띤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도 그러하다.
 
일제가 독도를 선점한 후 내각의 독도편입 결정을 시마네현에 통고하였고, 또 ‘현고시 제40호'를 통해 이 사실을 일반에 고지했다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영토취득을 위한 국가의 의사’(the Intention of the State to Acquire the Territory)표시가 충족됐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일본정부는 1954년 2월 10일 대한민국정부에 보내온 외교 각서에서 “현대 국제법상 영토취득을 위한 요건에 관하여 영토를 취득하려는 국가의 의사는 일본영토에 독도를 추가하기 위하여 1905년 1월 28일의 내각회의의 결정으로 확인된바 있고, 또한 영토취득을 위한 국가의사의 공적 발표는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에서 공표한 고시로 성립됐다”고 주장했다. 즉 국제법상 인정되는 ‘선점통보’가 성립됐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무주지의 자국영토 편입을 인정받으려면 이를 위한 국가의 의사가 공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는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어디까지나 ‘국내적인 의사표시’에 불과하며, 국가대표기관이 수행한 ‘국가 간의 행위’(Interstate activities)라고 보긴 어렵다. 이 사실을 두고 현 일본정부(외무성)는 “타케시마를 영유하는 의사를 재확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역시 앞에서 살펴본 대로 과거 일본정부가 독도는 일본에 속해 있지 않다고 인정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영토처리에 관한 연합국의 기본방침은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 즉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약탈하기 전의 영토 및 국경상태로 환원시킨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그 해 9월 2일 ‘무조건 항복문서’로 성문화됐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곧 일본정부가 한국으로부터 획득한 모든 영토, 재산, 그리고 주권과 권리는 한국인이 ‘일본의 노예상태’로 강제된 상황에서 “일본의 폭력 및 탐욕에 의해 약취”했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며, 동시에 연합국의 위와 같은 기본방침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일본정부는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듯이 독도를 청일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마땅하다.
  
일본은 1962년 7월 13일자로 한국정부에 각서를 보내 연합국 지령 제677호에는 울릉도만 제시되어 있고 독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고 반론을 편 바 있다. 지금도 일본은 여전히 이 주장을 한국 측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연합국 지령 제677호에는 울릉도만 제시되어 있고 독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조약협정문에 3,000여 개의 모든 한국 섬들이 열거될 필요가 없었고, 제주도 남단에 위치한 馬羅島가 동 조문에 명기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국령으로 인정되었듯이, 연합국이 대표적인 섬들만 열거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1952년 9월에 조인된 ‘대일강화조약’ 제2조의 내용을 내세우고 있다. 사실상 동 조문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독도에 대해선 명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독도를 일본이 소유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도 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전후 한국이 이미 일본으로부터 분리됐다는 기정사실을 사후에 국제법적으로 인정하는 형식을 취한 ‘대일강화조약’은 마찬가지로 “독도만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규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의 한반도강제병합이 한국민이 원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합법적이었다고 강변하는 일본 극우파들의 역사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침략의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 내지 미화하는 역사인식이 일본의 비극이자 동시에 아시아의 평화정착에 최대 걸림돌이다. 독도를 분쟁지화 하려는 일본정부도 일본제국주의시대의 “영광스런 제국”을 희구하는 과거 회귀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일본은 독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Ⅲ. 향후 일본의 행보 전망
 
그렇다면 향후 일본의 행보는 어떨까? 일본은 왜 “다케시마”일본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가? 이유는 크게 실제 독도침탈의지, 국내 우익세력의 결집 등 두 가지가 서로 중첩돼 있다. 먼저 현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은 “한국정부의 독도불법점거” 선전, 선동을 강화하면서 실제 침탈을 위한 실력행사를 준비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독도 침탈을 위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갖추는데 주력할 것이다.
  
일본은 이미 정부차원의 독도전담기구 설치를 완료했다. 해양 영토문제, 대륙붕, 배타적 경제수역, 경제, 방위, 해양환경, 개발과 국제협조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07년 4월 27일 해양기본법을 제정해 같은 해 7월 20일부터 시행해오고 있는데, 이 법에 근거해 해양정책본부를 발족, 운영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 기구는 수상을 본부장으로 관방, 경찰청, 금융청, 총무성, 법무성, 외무성, 재무성, 문부과학성, 후생노동성, 농림수산성, 경제산업성, 국토교통성, 환경성, 방위성으로 구성된 범정부 조직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독도문제에 대해 각각의 사안별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등이 각기 문제를 제기하고 대응했지만 이후로는 해양정책본부를 통하여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독도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일본정부는 관련 법령을 제정하고 “타케시마의 일본령”교육을 통한 국민의 동의를 유도하면서 동시에 군비증강을 서둘고 있다.
  
다음으로 일본은 기존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해오던 국가차원의 홍보와 관련 기구 및 인사들에 대한 로비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홍보와 막대한 로비를 통해 국제사법재판소(ICJ), 유엔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각국의 저명한 국제법 학자, 미국의 유력 정치인 등 범세계적인 우군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독도영유권 향방에 변수가 될 수 있는 미국과의 관계 강화, 미국의 인정 혹은 암묵적 지지 유도, 북방4도 등 다른 분쟁지 해결 및 공고화 등 안보환경의 변화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수순으로서 일본은 직접 무력으로 독도침탈을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정국가나 조직이 국제분쟁을 야기시키는 동기를 규명하려는 국제분쟁학자들 사이에 이른바 ‘속죄양 가설’(scapegoat hypothesis)이 거론되고 있듯이 일본정부도 독도를 속죄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즉 국내적으로 경제 침체, 정치지지율 하락을 만회할 국면전환용으로 고의로 외부도발, 즉 독도 상륙을 감행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일본 내 극우파들을 앞세운 무력탈취와 극우단체들의 자발적 시도가 있을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일본정부는 일본정부와 무관한 듯이 방조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따라서 독도를 국제분쟁지화 하려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은 한 일본정부는 군사충돌까지 상정하고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준비할 수 있다. 그런 후 만약 그들의 의도대로 “국제분쟁지화”가 촉발되면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해 중재를 요청할 속셈이다.
  
지금도 일본정부는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바라는데도 한국정부가 회피하고 있다고 공세를 취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승소하면 쾌재를 부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패소할 경우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한국정부에 독도에 대해 일정부분 지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공동개발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다.
 
Ⅳ. 우리의 대응 및 자세
 
독도는 평온한 듯 해 보이지만 앞에서 살펴봤듯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정의(justice)는 반드시 승리하고 사필귀정이라는 인식에서 일본을 우호적으로만 바라보거나 설마 독도가 빼앗기겠는가 하는 안일한 자세를 버려야 한다. 또한 기정사실화 된 독도의 실효적 지배(effective control) 사실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종합개발, 어업전진기지 건설도 고려해볼만 하다. 일각에서 염려하고 있는 독도의 천연자연에 대한 보호는 독도에 대한 주권확립에 우선하지 않는다. 개발은 환경파괴가 최소화 되도록 해야 하고, 그 대책은 투명하게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둘째, 일본정부처럼 우리정부도 장기적, 지속적, 통일적으로 독도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여기에는 ‘동해’를 포함해 거시적이고 국가 통치적 차원의 독도 관련 전담기구 설립, 세계인 및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이고 전방위적 홍보 등을 들 수 있다. 일본극우파의 맹목적인 애국 감정은 진실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해야 한다. 애국심에 이끌려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권리를 포기하거나 혹은 자신의 옳은 판단을 스스로 왜곡하는 일본정부와 정치인 및 관변 학자들이 준엄한 비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셋째, 일본 스스로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게 최상책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본정부와 관변 학자들의 주장을 국제법에 근거해 반박할 수 있는 법리적 대응책을 치밀하게 준비한다. 예를 들면 ‘분쟁’의 개시를 어느 시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결정적 기일(critical date)원칙” 등에 대해서 국제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한 예다.
 
아울러 최근 국제영토분쟁을 중재한 국제사법재판소가 분쟁 당사국의 ‘공식 발간물’(official publication)에서 영유권을 기술 혹은 주장한 사실을 유효하게 고려하는 판례(2008년 5월 23일 싱가포르-말레이사아 간 ‘페트라 브랑카’-싱가포르 지명/푸라우 바투 푸테-말레이시아 지명 도서영유권 분쟁 재판)를 참고하고, 각국의 실정을 고려한 맞춤형 독도홍보용 공식 발간물을 세계에 배포할 필요가 있다.
  
넷째, 해·공군 위주의 군사 대응력을 증강시킨다. 한국의 해군력은 일본의 그것에 30%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은 한때 해양대국답게 해군에 국가 전체예산의 32%까지 예산을 투입한 적도 있다. 한국해군의 예산은 전체 국방예산 총액의 16%에 불과하다. 일본은 2,600톤급 잠수함을 16척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해군은 9척의 잠수함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아 척 수도 적지만 척당 톤수에서도 그 절반에 미치지 못한 1,200톤급이다. 이지스함도 일본은 5척을 평소 작전에 투입돼 있는 상태이고 추가로 3척을 더 건조할 예정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3척을 운용하는 단계에 있다. 또 해상조기경보와 대잠수함 작전에 필수적인 P-3C항공기도 일본은 100대나 가지고 있지만 한국은 겨우 8대에 불과하다. 통상 적에 대한 전쟁억제력은 적 공격력의 75%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부족할 경우 비대칭적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비단 독도수호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향후 한국경제의 젖줄인 해외수출 및 원료 수입해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대양해군이 필요하다. 따라서 육군 위주의 군사력 확충에서 벗어나 최첨단의 해공군 확충문제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다섯 째, 신한일 어업협정 폐기를 검토하면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을 준비해야 한다. 신한일 어업협정을 발효시킨 김대중 대통령도 “어업협정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고 한 바 있듯이 이 협정은 독도주권을 저해하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일본정부는 영토권과 어업권을 별개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즉 조업권이 곧 영토의 영유권에서 나오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독도가 포함된 공동관리 수역에서의 조업권을 인정해 준 것을 두고 한국정부가 독도에 관한 영유권을 스스로 부정한 게 아니냐고 물고 늘어질 수도 있다.
  
여섯 째, 무엇보다 대일경제 예속도를 줄여야 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어도(釣魚島) 문제가 발생한 최근 중국이 희토류의 대일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일본을 압박하자 일본이 바로 굴복하고만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전체적인 국력을 증강시켜야 하고, 그 하위 개념에서는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당파적, 소아적 정치행태를 극복해 대국적 견지에서 작동되는 정치문화를 창달시켜야 한다.
  
일곱 째, 당사국인 일본은 물론, 미국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동시에 대일, 대미 외교력을 증강시켜 외교 협상력을 한층 제고해야 할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대환은 “먹고 삶” 이외의 진실과 정의문제에 먹먹해진 우리에게 시인의 감성과 치열한 작가정신이 교직된 한 편의 시로 독도에 대한 애절함, 통한, 희망을 일깨운다. 그는 “105년 전 그 날 이전의 완전한 평화를 갈구하는 독도”가 지금 절해의 고도에서 일본이 외면한 역사적 진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외롭다고 한다.
 
이대환의 말대로, “가장 오래된 평화의 표상으로 남고 싶은 독도”가 그의 염원대로 영원한 평화의 표상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한일간의 끝없는 소모적인 갈등과 마찰의 표상이 될지는 한일 양국의 보편적 시민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주권수호는 말로 외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실천이 뒤따르는 민족에게만 허여된다.
 
위 글은『文學灣』, 2010년 하반기, 통권34호(2010년 11월 15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