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이전 중국의 티베트 정책 : 주권확립에서 사회주의개혁으로
1959년 이전 중국의 티베트 정책 : 주권확립에서 사회주의개혁으로
서상문(고려대학교 한국전쟁 Archive 연구교수)
1950년 10월, 티베트를 점령하기 시작한 중국정부는 이듬해 5월 티베트의 카샥 행정부와 이른바 ‘17개조 협정’을 맺음으로써 티베트를 정식으로 중국의 영토에 편입시키면서 법률적인 형식논리로는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17개조 협정’에는 티베트정부가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고, 이 개혁에 대해 중국당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걸로 돼 있었다. 하지만 중공은 신정체제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에게 초기 잠시 동안은 티베트 통치권을 인정했지만 그의 주도하에 티베트를 개혁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 오히려 1951년 5월부터 달라이 라마 정부는 라싸 주재 중공 군정당국의 간섭을 받거나 혹은 최소한 눈치를 보게 된 형국이 됐다.
1952년 1월, 毛澤東은 중공 ‘서장공작위원회’와 駐藏代表外事辦公室을 정식으로 출범시킴으로써 당과 군의 티베트 경영 및 지휘기구를 확립한 뒤 4월 초 티베트 공작방침을 공표했다. 티베트에선 최소한 2~3년 내엔 減租와 토지개혁을 실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티베트 상층부를 와해시킬 통일전선을 개시할 것도 지시했다. 티베트군도 당분간 기존 체제를 유지케 하고 중국군으로 개편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즉 최고 수뇌부 차원에서 티베트에 대해선 사회주의혁명을 보류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毛澤東은 티베트인과 중국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두 민족이 서로 협력하면 상호 보완적 상생관계를 이룰 것이라면서 화합, 협력, 단결할 것을 표방했다. 동시에 그는 티베트민족의 자치권 보장과 고유한 언어, 풍속 내지 습속과 전통적 종교인 라마불교에 대해서도 존중한다고 공언했다. 이것은 티베트에서 사회주의체제와 다른 기존의 전통적인 정교일치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한 약속으로서, 말하자면 ‘一國兩制’를 시도한 것이다. 이는 鄧小平이 홍콩에 적용한 一國兩制 보다 더 이른 것으로서 일국양제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지도부가 티베트에 시도한 협력, 상생의 정책적 기조는 초기 잠시뿐이었고, 하부의 티베트 주재 중공의 급진개조론자들이 毛澤東이 강조한 통일전선을 결행하게 된 이상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一國兩制도 표면적으로는 그 후 8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이미 1952년부터 파행과 균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공 수뇌부의 티베트민족과 문화 및 종교에 대한 존중에 토대를 둔 통일전선 및 一國兩制의 방침에 반하는 토지개혁, 종교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단행한 불교탄압 등 일련의 ‘사회주의 개혁’이 강제되고 있었다. 이는 1950년 말부터 티베트인들에게 중국군이 끼치기 시작한 각종 민폐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며, 이듬해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물가앙등, 인플레이션의 고조, 17개조의 약속이행 불철저 등과 맞물려 있었다. 상부의 최고수뇌부에서 하달한 방침을 둘러싸고 하부의 현지 라싸 주재 중공 지도부 내에 두 파가 대립한 가운데 급진개혁파들이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서둘러 각종 사회주의개혁에 시동을 건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중공 西藏軍區가 설치되고 1년이 지난 1953년 2월부터는 티베트정부의 정책에 중공이 간섭하기 시작한 이중권력(dual power) 형태가 나타났다. 알력과 마찰 속에서 동상이몽이었긴 하지만, 겉으로는 중국수뇌부와 달라이 라마가 상부 차원에서 서로에 대한 정치적 및 종교적 권위를 인정해줌에 따라 협조관계가 지속됐다. 중앙의 내티베트 지역에서는 급격한 변화 없이 달라이 라마의 권위와 신정체제를 인정하는 현상유지 약속이 지켜졌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급진적 개조가 시행되는 이중적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하부의 티베트 현지에서는 티베트 기득권층의 반발과 반중국적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됐다.
중공의 급진개조론자들은 라싸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캄, 암도 등지에서 ‘17개조 협정’과 달리 전혀 다른 방식으로 농촌구조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회주의개혁의 시행조건이 형성돼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 최소 수년간은 보류한다고 선언한 毛澤東의 방침을 위배한 것으로서 앞당겨 실행한 토지개혁이었다. 티베트에 사회주의개조가 시작된 것은 1955년부터였다는 중국학계의 주장과 달리 실제는 이미 1952년부터 부분적으로 착수되고 있었던 셈이다. 泗川省과 연접한 캄과 암도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개혁을 동력으로 삼아 중국의 티베트 정책이 티베트의 현 체제를 인정하는 것에서 강압적으로 기존 체제와 현상을 바꾸려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53년 말부터였다.
토지개혁과 그에 연이어 추동한 종교개혁에 대한 저항자들이 대거 생겨났고, 중공은 이들에 대한 집단 처형, 성소 모독, 사원 파괴 등의 각종 수탈과 살육에 들어갔다. 이 지역 지주들과 승려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의 폐해는 티베트 전역으로 확산됐다. 기근까지 겹쳐 기아로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사망하거나 고통을 받았다. 예상 가능한 결과로서 사회주의개혁은 이것이 개시된 1952년부터 서서히 티베트민족의 산발적이고 국부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해 결국 거족적 저항으로 확대돼 1959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대한 적대의식이 최고 비등점에 다다랐다. 1959년 3월,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것은 중국 측 입장에서 볼 때 그전까지 통일전선전략이라는 이름하에 추진해온 티베트 상층부에 대한 포섭노력과 위로부터의 사회주의개혁이라는 중국의 티베트정책이 파산됐다는 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위 글은 2017년 10월 28일에 개막된 전국역사학대회(고려대학교)에서 발표한 학술논문의 요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