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10월 26일의 두 죽음

雲靜, 仰天 2017. 12. 2. 11:41

10월 26일의 두 죽음

 

서상문(수필가/형산수필문학회 회원)
 

10월 26일 역사상의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갠지스강의 모래알 보다 더 많았으리라. 나 같은 張三李四, 匹夫匹婦의 범부도 있었을 테고, 일세를 풍미하다 간 절세가인의 영웅호걸도 있었을 테다. 허나 아침잠에서 깨어나 달력을 보고 오늘이 10월 26일임을 알게 되자 그 많은 망자들 가운데 유독 두 사람의 죽음이 진하게 다가온다.
 
오늘, 한국 근현대사는 두 사람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사망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다. 여기에 두 사람을 사살한 안중근과 김재규라는 두 인물의 죽음은 자신이 죽은 날이 아니기에 오늘만큼은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두 사람의 죽음은 서로 연관된 게 전혀 없다. 시대가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달랐고, 시대정신이 달랐다. 우연히 죽은 날만 같았을 뿐이다. 굳이 두 사람을 끈으로 이을 수 있는 게 있다고 한다면, 두 사람 다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다는 점이다. 또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남의 손에 시해를 당한 운명도 같이 갖고 있다. 더 있다고 한다면, 둘 다 각기 자신의 조국에서 좋든, 나쁘든 역사의 족적을 깊고 도드라지게 남긴 점을 들 수 있다.
 
굳이 둘의 죽음이 비교가 된다면 죽음에 이르러 남긴 말들이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못다 한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피살된 것에 대한 외마디 탄식이요, 다른 한 사람은 “난 괜찮아!”라는 한 마디 외엔 국가 최고 지도자라면 남길법한 흔하디흔한 유촉조차 남기지 못했다. 일반인이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됐을 것이지만, 둘 다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작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잊어선 안 되는 일제 강점의 주모자였지만, 일본인들에겐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끈 절세의 영웅이다. 더군다나 천수를 누린 게 아니라 조선의 이름 모를 청년에게 뜻밖의 저격을 당해 불귀의 객이 되면서 비명횡사한 비극적 요소를 안고 있으니 그 追崇이 더 각별하다.
 

일본인들에게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으로 존경 받고 있지만 일제의 침략을 받은 한국인과 아시아인들에게는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한 원흉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토히로부미. 아무리 일본의 근대화에 공이 지대하다고 해도 그것이 근린 민족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또한 일제의 번영을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한 것이라면 그의 공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일본의 근대화를 예비한 인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게 사사한 그는 일본 근대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이 많이 붙는 정치인이었다. 막부타도(倒幕)를 성공시킨 공로로 1885년 내각제를 창설하고 스스로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됐고, 그 뒤 총리대신을 네 번이나 역임한 최초의 정치가였으며, 추밀원, 귀족원의 초대 의장을 지냈으며, 러일전쟁 후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거물이었다.
 

한일 양국에서 서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이또 히로부미. 이 사실을 보면 역사 사실 및 평가도 절대성이 없는 것으로 상대적 진리일뿐이다. 인간사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영원한 것과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가르친 석가모니의 수승한 가르침 앞에서 누구나, 특히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 판검사, 학자, 언론인들은 정말 겸손하고, 겸허해야 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늘, 오전 9시 30분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도마 안중근 의사가 리볼버 권총으로 쏜 6발 중 3발을 맞고 30분 후에 절명했다. 그는 피격 직후 옆에 있던 일본 남만주철도 사장 나까무라 요시고토(中村是公)가 끌어 앉자 신음하는 소리로 “내가 당했다!” (私がやられた!)고 뱉었다. 이어서 피를 흘리며 열차 안으로 옮겨지자 이토는 숨을 거두기 직전 비서 모리(森)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쏜 거냐? 모리도 맞은 것이냐?(誰が撃ったのか? 森も撃たれたのか?).
 
“내가 당했다!”고? 이 말은 역사학도인 내게는 자신이 저격당할 수도 있다는 걸 감을 잡고 있었는데 그만 방심해서 변을 당했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게 추론되는 게 생판 상궤를 벗어나는 괴기스런 일은 아닐 터다. 아니면, 한국과 중국을 제압해 동양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그의 야심이 좌절될 것을 우려해 “당했다”고 한 것이었을까?
 
아시아의 평화를 유린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으로 한국의 식민지화가 늦춰졌다는 이해도 있고, 반대로 그러한 비극이 더 빨리 다가왔다는 해석도 있다. 이글은 어느 설이 맞는지를 따져보는 학술논문이 아니다. 그냥 10월 26일 오늘이 역사의 두 거물이 죽은 날이 일치한 걸 보고 그들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고 몇 가지 사실들만 갖고 소일 삼아 써보는 글일 뿐이다. 진중한 역사평가를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글쓰기는 아닌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안중근 의사가 이웃 국가를 침략한 수괴를 처단함으로써 민족혼과 세계평화를 希願한 대한남아의 비장하고도 웅혼한 결기를 세계만방에 떨쳐 한민족의 존재를 각인시킨 사실이다. 도마도 얼마 안 있어 이듬해 3월 26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젊고 순정한 휴머니스트(humanist)와 늙고 노회한 침략자는 각기 31세와 68세였다.
 
세월이 흘러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경, 서울 홍은동 문화촌의 어느 하숙집. 지금도 그렇지만 산 하나 넘으면 청와대 뒷길로 통하는 곳이었다. 그날 그 시간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랍시고 뭔가 하던 중 갑자기 온몸에 뭔가 전율 같은 것이 지나갔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같은 시각,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인근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피를 흘리며 뒤로 병풍에 쓰러졌다. 급히 “대행사”에 각기 20만원의 일당을 받고 불려온 가수 심수봉과 배우지망 여대생 신재순이 경악해 바들바들 떨었다. “대행사”란 박통이 젊은 여성 여럿을 불러 벌이는 술자리를 말하고, 박 대통령이 한 여성과만 오붓이 즐기는 술자리를 “소행사”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일국의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으면서도 절대 권력자를 위해 채홍사(採紅士) 역할까지 맡은 차지철 실장이 낚아채 들여 넣어준 한 사람의 젊은 여성과 질펀하게 즐기는 혼자만의 술자리가 한 달에 10회 정도 있었다. 여기에 불려왔다 간 연예인들이 100명 정도 됐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TV에서든, 달력에 사진으로 나와 있는 여성이든 그걸 보고 “한 번 보고 싶다!”라고만 하면 차지철이 납치하듯이 잡아다가 다 갖다 바쳤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비밀리에 운영한 안가의 의전과장 박선호의 증언이다.
 
순식간에 술상엔 전복, 장어, 갈비, 수삼, 송이 등 당시 시세로 약 6만원이라는 거금으로 마련된 안주들이 널브려졌다.(출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5월 29일 방영) 안주 값 6만원! 여공들의 월급여가 5~6만원 하던 시절, 내 고향 포항시내 하숙비가 2인 1실에 한 사람당 월 1만 2,000원 하던 시절, 내가 돈이 없어 외상으로 간 고2 때 4박 5일의 수학여행비가 7,350원이었던 시절, 아무리 국가원수가 마시는 술자리라고 하더라도 하룻밤 술안주로는 놀랄 만큼 과한 거액이었다. 평소 국민들에겐 막걸리를 즐기는 소박한 대통령으로 비춰주던 이미지와 달리 술상에 올라 있던 시바스 리갈 양주값은 별도였다. 요즘과 달리 국민의 혈세가 어떻게 쓰이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보다 10일 전인 10월 16일, 우리 현대사의 방향을 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20일 경남 마산·창원에 내려진 위수령이 계속되던 상황이었다. 이날 안가의 대행사 술자리는 ‘부마사태’에 대한 위기수습책,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던 야당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구속여부를 둘러싸고 강경진압을 주장한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언쟁으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만찬 중 차지철은 캄보디아는 200만 명을 죽였는데 그까짓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확 쓸어 엎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발언은 아마 박정희가 그날 죽지 않았더라면 부산은 1980년 광주에 앞서 피바다가 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다. 이에 반해 김재규는 온건하게 YH무역 농성사건이나 부마사태 등 당시 시국사건들의 원인이 독재에 있다면서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죠!”라고 대놓고 말했다. 박정희가 김재규를 질타하고 차지철을 비호하자 이에 분격한 김재규는 사전에 바지춤에 숨겨온 소형 발터 PPK권총으로 차지철과 박정희를 쏘았다. 첫발은 먼저 차지철에게 향했고, 두 번째 발이 박정희에게 겨눠졌다.
 

김재규가 박정희 사살에 사용한 권총

‘앗’ 하는 사이에 가슴에 총탄을 맞은 박 대통령은 “각하, 괜찮으세요?”라고 다급하게 묻는 신재순의 말에 “난 괜찮아!”라고 답했다. 이게 그가 남긴 지상 최후의 말이었다. 첫발이 차지철의 손목을 관통시킨 뒤 두 번째로 박정희에 이어 세 번째 사격이 격발이 불발되자 황급히 밖으로 나가 자기 방에서 새 권총을 가지고 들어온 김재규의 총탄이 쓰러진 박통의 후두부에 박혔다. 절명이었다.
 

김재규가 거사를 치른 안가의 박정희 시해 현장

박정희는 더 이상 말을 남길 수가 없었던 상태였다. “난 괜찮아”? 자신은 괜찮지만 ‘대행사’ 현장의 죄 없는 두 젊은 여인들과 다른 부하들이 걱정된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18년 동안 견고하게 쌓아올린 유신체제가 무너질 게 염려돼서 한 말이었을까? 그의 심중에 들어가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건 박정희라는 거두는 병풍 위로 쓰러졌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유신체제가 역사의 무대에서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거사 후 당일 밤, 김재규의 초청을 받아 안가의 다른 방에 와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자신의 아지트인 남산 중정본부로 가지 않고 정 총장의 제의로 국방부로 간 게 거사가 실패하게 된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정승화의 지프차를 타고 남산으로 가던 중 정승화의 제의로 갑자기 핸들을 꺾었던 것이다.
 
차안에서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박정희의 사살을 말하지 않고 ‘각하’가 유고했다고만 말하고 즉각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며칠 뒤 합동수사본부장이 돼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전두환의 긴급 지시로 체포됐다. 박정희가 키운 전두환의 신군부가 득세하게 된 계기였다.
 
다시 ‘휘리릭’ 무대가 바뀐다. 1980년 5월 24일 새벽 4시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새벽서리를 맞은 목련꽃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떨어지고 있었다. 교도소 측은 다른 날과 달리 그날은 사과, 달걀과 커피를 특별 메뉴로 군법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김재규가 수감돼 있는 독방에 밀어 넣었다.
 

 
김재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곤 바로 누워 있던 철제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손으로 권총모양과 포승줄모양을 지어보이더니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교도관들이 아무 답변을 하지 않자 그는 호통치듯 이렇게 말했다. “안개 피우지 마라. 사나이가 가는 길은 알고 가야 할 것 아니냐?” 올 때가 왔다는 걸 안 김재규는 말을 마치자 바로 5분간 냉수마찰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앞서 가는 교도관을 따라 감방을 나섰다.
 
사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김재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국민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즐기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사형 집행 직전, 이승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검사가 입을 열었다.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
 
김재규는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몇 분 후면 맞게 될 죽음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전날 이미 전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유언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갔다. 지나고 나면 덧없는 인생을 54년이나 산 이 세상을 말없이 떠났다.
 
김재규가 아직 살아서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을 즈음 스스로 “민주회복 국민혁명지도자”로 자칭하면서 자신의 모친에게 전해달라고 변호를 맡은 강신욱 변호사에게 시 한 수를 전해줬다. “나와 자유”라는 제목이었다.
 
나와 자유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나 내 목숨 하나 바쳐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나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민주주의 회복하였네.
나 사랑하는 3700만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 주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위 글귀는 내용으로 봐선 시라기 보다 한 편의 선언문에 가깝다. 정제되지 않는 치기마저 느끼게 하는 이 '시'와 그가 남긴 행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글에서 밝힌 그의 언행과 위 시만으로는 그를 “민주회복 국민혁명지도자”로 단정하기엔 마뜩치 않은 게 많다.
 
과연 김재규는 정말로 민주주의를 갈망한 나머지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려고 박통을 시해했을까? 아니면 평소 욱하는 성격에 박정희를 잘못 보필하고 자기를 모욕한 차지철을 없애기 위함과 동시에 차지철을 비호하는 박정희에게 화가 나서 홧김에 저지른 사적 차원의 복수극인 것을 민주화니 하면서 민주주의의 수호신으로 포장한 것이었을까?
 
그런데 김재규가 분노해서 홧김에 저지른 것이라고 하기엔 그가 그날 밤 거사 전 부하들에게 대통령까지 제거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봤을 때 올바른 해석이 아닐 수 있다. 이 부분은 역시 전문적인 인고의 연구과정을 거쳐야 내릴 수 있는 해석과 역사적 평가다.  
 
몇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김재규는 육사 제2기 동기생이자 고향도 같은데다 9살이나 많아 친형처럼 따랐던 박통에게 한 때 대통령 직선제와 긴급조치 해제를 건의한 사실이다. 김재규는 자신이 중정부장에 취임한 뒤 남산 중정의 고문실을 없앴고, 강압수사도 금지시켰다. 또한 명망 있는 재야인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권력에 저항한 장준하가 돌연 의문사 되자 그의 유가족들을 찾아가 작은 전세라도 얻을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을 한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앞 왼쪽)와 김재규(앞 오른쪽)

당시 날로 심해져간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에다 핵개발까지 하겠다는 ‘공갈’이 더해져 골머리를 앓고 있던 미국은 박정희를 갈아 치우고 다른 인물로 대체하려는 의사를 품고 있었다. 이즈음 김재규는 미국이 지목한, 미국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죽었을 때 평소 그토록 지지한다고 굽실대던 그 어떤 정치인도, 서거하자 마치 자기 부모가 사망한 거 보다 더 큰 슬픔인 듯 울고불고 대성통곡하던 그 어떤 민중도 유신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연들도 그렇지만 개운치 않은 것은 주연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그 속에 들어있다. 가난의 극복만을 내세워 일도양단해 박정희를 단군 이래 민족의 최고 영웅이라거나 혹은 유신체제의 유지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 사실만을 강조해 최악의 독재자라고 하기에는 그가 보여준 얼굴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는 사회주의혁명이나 사회개조에 심취한 사회주의자에서 군 숙청 작업시에 체포돼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처하자 당장 공화주의자로 변신했듯이 이념에 빠지기보다 이념을 자신의 권력과 영달을 위해 서슴없이 바꾼 변절자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한 고뇌어린 모습도 보여줬지만, 민주주의를 유린한 독재자의 잔악한 면도 있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모내기 하다가 논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는 서민적인 얼굴도 있었지만, 만년엔 자신의 딸 보다 어린 여성들을 바꿔가면서 밤마다 주색잡기에 빠져 허우적댄 호색가의 면모도 보여줬다.
 
더군다나 한국인들, 특히 아직도 많은 경상도 사람들이 박정희 혼자서만 이룩한 것으로 믿고 있는 근대화와 경제성장이 과연 온전히 그만의 공이었는지도 꼼꼼히 되짚어 볼 일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계선을 어디까지 그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치하게 고찰할 일이다. 학계에는 이미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나온 지 이미 여러 해다. 아무리 많은 연구와 평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역사연구자로서 내 스스로 그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그것은 수많은 사료들을 빠짐없이 새로이 봐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나는 역사서술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역사학도다. 더군다나 한국사가 아니라 이웃나라 역사를 전공한 나로선 도전하고 싶어도 지금으로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논란이 예상되는 상반된 자료들의 대해에 빠져 길을 잃거나 산더미 같은 사료의 무게에 눌려 버텨낼지 의문이어서 깜냥 밖의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평가는 우선 이 글을 읽는 이들 각자에게 맡겨두겠다. 오늘은 그냥 가을을 덮고 있는 핏빛 보다 진한 단풍이나 보러 가야겠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샛노란 은행잎이 고와 보인다.
 
2017. 11. 1. 14:37
포항발 서울행 열차 안에서
雲靜
 
위 글은『보리수필』, 제12집(2017년 12월)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