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상식 :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祖와 宗의 연원과 차이
역사상식 :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祖와 宗의 연원과 차이
서상문(中國共産黨 所屬 中共創建史硏究中心 海外特約硏究員)
사극을 보면 어떤 왕은 ‘태조’니, ‘선조’니 조를 붙여 부르는데, 어떤 왕은 ‘태종’이니 ‘고종’이니 하면서 종을 붙여 부른다. 왜 그럴까? 조와 종은 모두 임금이 죽은 뒤 후세에 선대 제왕들을 부르는 명칭이다. 이를 묘호(廟號)라고 하는데, 종묘(宗廟)에 신위를 모실 때 정하는 존호(尊號)이다. 조와 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묘호의 기원은 중국이다. 묘호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거나 이와 관련된 세 가지 용어, 즉 諡號(시호), 年號, 묘호 가운데 하나다. 이외에 살아 있는 황제를 칭하는 별칭도 있다. 시호, 별칭, 연호에 대해 차례로 알아본 뒤에 묘호를 자세하게 알아보자.
제왕의 시호는 황제가 죽으면 생애의 업적, 품격과 덕성에 비춰 諡法규정에 의거해 칭호를 부여했다. 시호 부여자는 통상 새로 제위를 계승한 황제였다. 시호는 좋은 뜻과 나쁜 뜻 그리고 선악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칭송 및 현창, 비판, 동정을 표한 의미가 있는 褒(포), 貶(폄), 憐(연)의 3종류로 분류했다.
칭송 및 현창에 속하는 시호로는 ‘文’, ‘武’, ‘明’, ‘紹’가 있었다. 비판과 부정적 의미를 지닌 시호로는 ‘厲’, ‘煬’, ‘寧’, ‘幽’, ‘靈’ 자가 자주 쓰였다. 예컨대 周厲王, 隋煬帝, 周幽王, 衛靈公 등이 있다. 동정을 표하는 시호에는 ‘哀’, ‘懷’, ‘愍’(민), ‘悼’(도) 등의 글자가 쓰였다. 동정을 표하는 이 글자들은 주로 단명한 황제이거나 국가가 불행을 당하여 동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황제에게 사용했다. 시호는 제왕에게만 부여하는 게 아니라 南宋의 애국 명장 岳飛에게도 사후 武穆(무목)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듯이 고관대신에게도 썼다.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어떻게 불렀을까? 이 경우 황제는 ‘天子’, ‘萬歲’, ‘足下’, ‘今上’, ‘閣下’, ‘殿下’, ‘陛下’(폐하) 등으로 불렸다. 황제 이외에 황후, 황자나 기타 황제의 형제 혹은 제후국의 통치자인 왕들에게는 ‘千歲’라고 불렀다. 황제를 뜻하는 별칭인 천자와 만세 중에 천자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周왕실에서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왕권신수’의 이론이다. 춘추시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제후국의 군주를 왕이라 칭하고 周 王을 ‘周 天子’라 칭하여 다른 기타 제후 왕들과 구분했다. 周 王은 하늘의 아들이라고 널리 선전하여 제후들에게 그의 명령을 듣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세는 秦漢시대 이후부터 신하가 군주를 배알할 때 ‘萬歲’를 세 번 외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萬歲의 본래 뜻은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10세기 중반의 宋代부터는 황제에게만 萬歲를 축원할 수 있도록 국한해서 사용됐고 일반인에게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명대에 들어와서 만세는 황제의 전유물이 되도록 법으로 규정됐다. 만세가 황제에게만 사용된 것은 명대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청대에도 이어졌으나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왕조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종언을 고했다.
황제의 칭호는 아니지만 황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연호가 있다. 漢 武帝 劉徹(유철)부터 시작된 연호는 한 마디로 년도를 기록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즉각 새로운 연호를 만들어 선대 제왕과 구별했다. 한 사람의 황제는 여러 개의 연호를 가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漢 武帝는 6년을 주기로 한차례씩 開元하여 재위 기간 중 총 11개의 연호를 사용했고, 唐 高宗 李治는 무려 14개나 사용했다.
明·淸대 황제들은 각기 단 1개의 연호만 사용했다. 한 사람의 군주가 재위 기간에 하나만의 연호를 썼다고 해서 중국사에서는 전문용어로 이를 ‘一世一元制’라고 부른다. 흔히 ‘永樂大帝’로 알려진 명대의 永樂황제의 ‘永樂’은 바로 明의 제3대 황제 朱棣(주체)의 연호이고, 淸代의 ‘康熙’, ‘雍正’, ‘乾隆’, ‘咸豐’, ‘道光’, ‘同治’, ‘光緖’ 그리고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宣統’은 모두 그들의 통치기임을 상징하는 연호다. 조선이나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의 이러한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바로 중국의 시간관에 포섭됨에 따라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황제가 죽으면 그의 묘는 황실의 宗廟 내에 모셨는데 모든 묘실은 각기 명칭이 따로 있었다. 이 명칭이 바로 황제의 묘호였다. 중국에서 묘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商朝 때부터였지만 사용이 빈번해진 것은 漢代에 이르러서였다. 한대에 이르는 동안 모든 황제에게 묘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전에 공덕이 있는 황제라야만 묘호를 가질 수 있었다. 唐代 때부터는 거의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가지게 됐고, 唐代 이후의 황제들은 아예 묘호로 불렸다. 묘호가 모든 제왕들에게 두루 쓰이게 된 데는 唐代부터 시호의 글자 수가 증가돼 긴 시호로 제왕을 칭하려면 사용하기 불편했기에 짧은 두 글자가 간편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묘호의 준칙은『孔子家語』중 “祖有功宗有德”,“開創爲祖,守成爲宗”이라는 어구에 연원을 두고 있다. “祖는 공이 있고, 宗은 덕이 있다”와 “개창은 祖, 수성은 宗”이라는 뜻이다. 원칙적으로는 漢 太祖, 唐 高祖, 宋 太祖처럼 매 朝代의 개국 황제는 모두 祖 자를 사용해 묘호로 삼았다.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는 祖를 썼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는 宗을 붙였다.
묘호에 祖를 붙인 경우는 나라를 세운 황제, 치세 기간 중 외국의 침략을 받았거나 내란이 생겨서 위기를 잘 넘긴 황제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고, 宗은 태평성대를 이루거나 큰 업적을 이루었던 황제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조와 종 가운데 조가 더 높이 받들어진 존호였음을 알 수 있다. 이해하기 쉽게 묘호란 황제가 생전에 행한 치적, 공적이나 德을 토대로 붙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漢朝를 개국한 劉邦의 경우 천하를 평정하고 나라를 연 공로가 대단히 높아서 ‘高 皇帝’로 추존됐고 묘호는 ‘漢 太祖’였다. 묘호는 원래 ‘太’ 字가 ‘高’ 字 보다 높았다. 하지만 劉邦은 ‘高 皇帝’라고 부를 경우 헛갈리기 쉬워서 ‘漢 高祖’로 불렸다. 당시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던 데다가 유방처럼 개국 황제는 ‘漢 高祖’로 불렸기 때문에 후세 황제들이 자신이 좋아한 대로 高祖와 太祖를 동등한 지위에 두게 됐다.
그 뒤 2대나 3대 황제처럼 후대의 황제들에게는 唐 太宗이나 宋 太宗처럼 묘호에 宗을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 지켜지지 않고 예외가 많았다. 이유는 묘호 자를 선정할 때 시호법(諡法)을 적용하거나 참조하지 않고 해당 황제에 대한 포폄을 보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상 수많은 종류의 조와 종은 대개 후대인의 호오가 반영된 것이어서 당사자와 어울리지 않은 것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太祖, 高祖는 개국의 공이 커서 붙이는 묘호였다. 世祖, 太宗은 공적이나 치적이 높이 발양된 제왕에게, 世宗, 高宗은 守成한 군주에게 붙인 묘호였다. 仁宗, 宣宗, 聖宗, 孝宗, 成宗, 叡宗은 明君賢主의 의미가 있었다. 中宗, 憲宗은 중흥의 제왕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哲宗, 興宗은 적극적인 자세로 원하는 바를 행해 공을 세운 좋은 제왕이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神宗, 英宗은 공로가 부족한 제왕에게 붙였으며, 德宗, 寧宗은 나약한 제왕이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玄宗, 眞宗, 理宗, 道宗 등은 허황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好玄虛)의 제왕이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당 현종이 대표적인 예다. 文宗, 武宗은 말로는 칭송하는 듯 하지만 실제는 낮춰본 묘호(名褒實貶)였고, 穆宗, 敬宗은 공과 과가 모두 상당한 제왕에게 붙인 묘호였다. 光宗, 熹宗은 어리석고 부패한 군주의 경우에, 哀宗, 思宗은 나라를 망친 군왕에게 붙인 묘호였다.
황제가 죽은 뒤 “祖”라고 불리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나라 光武帝는 東漢의 개창자였지만,朝代가 漢朝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高祖나 太祖라고 쓰지 못하고 世祖라고 불렸다. 반면, 선대 황제를 높여 부르면 자기 스스로 높아진 것이라고 믿고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은 제왕도 있었는가 하면, 祖라고 불릴 소지가 전혀 없던 황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南宋을 개국한 趙構는 달랐다. 그는 비록 개국황제였지만 재위 기간 중 이렇다 할만한 치적을 쌓지 못해서 祖라고 불릴 자격을 얻지 못해 단지 宋 高宗이라고 불렸다.
반대로 明나라 제3대 황제로서 永樂帝로 불리는 朱棣는 守成皇帝였지만 재세 시 이룬 업적과 공이 개창 보다 더 커서 成祖로 불렸다. 심지어 宗마저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祖라는 묘호를 붙이기를 원하지 않은 황제도 존재했다. 예를 들면, 위나라 明帝인 曹睿가 대표적인데, 35세 정도로 살다간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호를 ‘烈祖’라고 부르도록 명했다.
중국사에서 祖를 많이 쓰게 된 시대는 조조의 아들 曹丕(조비)가 세운 魏나라 때부터였다. 魏, 蜀, 吳 ‘3국시대’에 이어 ‘5호16國’ 시대에 이르러 後趙, 前燕, 後秦, 西秦 등등의 작은 나라들은 각기 제왕의 묘호에 祖를 붙이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南北朝시대에는 묘호를 가진 황제가 많았는데 그들이 모두 공덕이 있어서 만든 건 아니었다.
총 12명의 황제가 재위한 淸朝도 祖가 붙은 묘호를 지닌 제왕이 3명이나 됐다. 문약한 한민족에 대한 통치에 자신감이 넘쳐난 청조 황제들 가운데 전반기의 세 황제가 祖를 붙여 불렀다. 後金의 개창자 누르하치가 첫 번째인데, 그는 1644년 청조가 정식으로 개창되고 난 뒤 太祖로 받들어졌다. 정확하게는 청조의 초대 황제이지만 태조 누르하치부터 계산하면 청조의 제3대 황제가 되는 順治帝도 世祖라고 칭했다. 중국 관내에 들어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大淸帝國’을 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康熙帝 역시 三番의 난을 평정하고 러시아의 침입을 물리쳤다고 해서 聖祖라고 칭해졌다.
공이 있다고 祖라고 붙일 수 있다면 ‘貞觀之治’로 유명한 唐太宗도 唐太祖가 돼야 하고, 중국인들에게 千古의 仁君으로 평가되고 있는 宋 仁宗도 宋 仁祖가 됐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唐 太宗이나 宋 仁宗 둘 다 공로가 개국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음에도 宗 자 묘호가 사용됐다.
그러면 중국 이외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은 어떠했을까? 이번에는 중국 이외의 나라들에게 눈을 돌려보자. 묘호는 원래 원칙적으로 중국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朝貢-冊封 관계에 있던 중국 주변의 번속국들은 묘호를 쓸 수 없었다. 번속국의 통치자는 중국의 승인을 얻어 왕으로 불리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원래 왕은 중국에서는 황제의 형제나 제후들에게 붙인 존호였다. 주변 조공국들은 중국보다 한 등급 아래로 낮춰 중국내 제후국들과 동급으로 취급한 것이다. 제후국이나 번속국들에선 황제를 상징하는 皇 자는 물론, 조나 종의 묘호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7세기 티베트 고원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해 강력한 국력으로 당과 대등한 관계를 가졌던 티베트의 송첸감포(Srong-btsan sgam-po, ?~649)도 왕이었을 뿐이다. 몽골은 자연환경, 생활양식과 문화가 달라서 중앙아시아 지역 일대의 투르크나 몽골계 민족들이 사용한 ‘군장’의 의미인 칸(Kha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중국 주변국들 가운데 베트남과 일본은 주목을 끌만큼 아주 특이했다. 벌써 기원전부터 武帝라고 황제를 칭한 제왕(찌에우다, 趙佗)이 있었다. 그로부터 11세기 전후까지는 '다이 하인 호앙데'(大行皇帝) 외에는 모두 왕으로 칭했다. 뒤이어 1010년에 개창된 리왕조(李王朝)가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조와 종의 묘호가 쓰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응우옌 왕조(阮朝)에 들어와서는 다시 황제로 칭했다.
일본의 경우는 결론부터 말하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묘호제도는 없었다. 단지 연호와 諱(휘)만 사용했을 뿐이다. 휘란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인 명(名)이라는 것에 代한 용어로서 죽은 사람을 공경해 그의 생전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 것이나 혹은 죽은 후에는 생전 그의 이름 그 자체를 가리켰다. 일본은 후한시대부터 중국 왕조에 조공한 역사 기록이 남아 있고, 정식으로는 魏, 東晋, 隋, 唐, 明에 조공을 바치고 冊封을 받았다.
이는 일본의 국왕으로서 중국왕조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일본 조정에서 수나라나 당나라에 보낸 ‘遣隋使’니 ‘遣唐使’니 하는 사절단도 朝貢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여러 세력으로 분열돼 서로 쟁투를 벌이는 식으로 혼란해지게 되면 통상 어느 나라에게 승인을 받아야 할지 몰라 조공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대중국 조공은 1336년에 개창한 무로마찌(室町) 바쿠후(幕府)가 明朝에 한 것을 마지막으로 끊어졌다.
따라서 일본은 지속적으로는 중국의 조공-책봉 체제에 들어온 나라가 아니었던 만큼 왕이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天皇’이라고 높여 불렀다. 연호도 중국의 것을 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용했다. 예컨대 明治, 大正, 昭和 같은 것이 천황의 통치시기를 나타내는 연호였다. 1989년에 제125대 일왕으로 즉위한 아끼히토(明仁) 일왕의 현재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이다. 보통은 연호를 따서 메이지(明治)천황, 다이쇼(大正)천황, 쇼와(昭和)천황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묘호는 없고, 각기 무쯔히토(睦仁), 요시히토(嘉仁), 히로히토(裕仁)이라는 휘가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한 뒤로부터는 법률로 정한 것은 없지만 연호를 시호로 삼았는데, 이것이 관례가 돼 가고 있다.
그러면 한반도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통일신라시대 때 무열왕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자 당 고종이 “너희 신라가 해외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람(僭濫)하게 썼으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 그 칭호를 고쳐라”고 하명했다. 이에 대해 신라 조정은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써야 한다고 맞서서 뜻을 관철시킨 일이 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신라의 다른 왕들은 조든, 종이든 묘호는 쓰지 못하고 그냥 왕이라고만 불렀다. 신라왕들 가운데 묘호를 쓴 이는 태종 무열왕 밖에 없었다.
고려시대는 전체 34명의 왕들 중에 ‘祖’의 묘호를 사용한 것은 太祖 왕건이 유일했다. 나머지 왕들은 모두 ‘宗’자 묘호거나 그냥 ‘〇〇왕’으로 불렸다. 바꿔 말하면, 고려는 묘호의 원칙이 잘 지켜졌다는 얘기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고려 전기는 중국이 송, 요, 금이 서로 각축한 혼란기에 휩싸여 있어 고려의 왕들이 황제로 칭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셈이었음에도 베트남민족처럼 대담하게 稱皇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부터는 조, 종의 묘호를 쓰지 못하고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등으로 불렸다. 원조의 간섭기 원 황실에 충성을 바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王자 앞에 忠자를 꼭 붙이도록 했다. 물론 몽골의 강압에 따른 것이지만 고려 말기 왕명에 忠자를 붙인 왕은 총 5명이 있었다. 왕명에 忠자가 빠지기 시작한 것은 몽골제국의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뒤인 공민왕 때부터였다. 이 시기는 베트남의 여러 왕조들과 달리 묘호를 우리 마음대로 자신 있게 쓰지 못하고 중국의 눈치를 봤다.
임금의 묘호는 반드시 왕의 사후에 붙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예종실록에 나와 있듯이 선대 왕이 죽으면 새로운 왕이 정2품 이상의 대신들과 논의해 정했다. 선조니 고종이니 하는 식으로 짧은 두 자의 묘호가 아니었다. 재세 시 왕의 치적이나 품성을 두고 그 특징을 표시하는 긴 명칭의 묘호로 지었다. 예컨대 세종대왕의 경우처럼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과 같은 식이었다. 한 마디로 세종은 문무가 겸비된 명현성왕이었다는 의미다. 이처럼 완전한 묘호는 너무 길어서 통상 앞의 두 글자만 따서 ‘세종’이라고 부른다.
왕이 살아 있을 때는 ‘〇조’나 ‘〇종’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왕의 생존 시엔 자신의 묘호가 조가 될지 종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현직 왕에 대해 신하들이 왕을 지칭하거나 부를 때에는 전하, 주상 혹은 금상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야 보통 ‘성종’이니 ‘숙종’이니 하고 부르지만, 만일 지금처럼 ‘성종’, ‘숙종’하고 부르면 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왕도 이름은 있었지만, 간혹 외국에 서한을 보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반상 간의 차별이 덜했던 중국과 달리 양반은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습속에 따른 것이다. 조선시대엔 태어날 때부터 모두 제각기 胎名(배냇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동기 때는 아명을 사용하다가 성인이 되면 이름을 대신한 호를 사용했다.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부모, 스승, 임금뿐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조선의 왕족은 이름을 외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어서 ‘거의’ 모두 외자였다. 드라마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정조는 ‘이 산’이라는 외자 이름이었고, 세종은 이 도, 연산군은 이 융이었다. 이름이 외자가 아닌 경우도 있었는데, 태종 이방원과 방석, 방간 등등 방자 돌림의 그의 형제들이 그런 예다. 이방원은 왕족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왕이 되는 바람에 일약 왕자가 되어 원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도 조와 종의 사용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는 마찬가지였다. 500년이 넘은 기간 동안 배출된 총 27명의 왕들 가운데 묘호에 朝가 사용된 왕은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7명이었고, 宗은 18명이었으며, 조와 종 외에 君으로 불린 임금이 둘 있었다. 君은 신하들에게 쫓겨나 왕의 묘호를 받지 못한 경우에 쓴 묘호다. 두 사람의 군은 연산군과 광해군이었다. 이들은 왕이 되기 전에 불렸던 군이라는 명칭이 사후에도 그대로 사용됐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재위시 행적도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성계는 나라를 건국했으니 그에게 묘호로 太祖를 붙여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창업 임금이 아닌 데도 조의 묘호가 쓰인 왕이 7명이나 됐다는 것은 대단히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세조의 경우는 그의 아들인 예종이 조의 묘호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노산군으로 강등시켰음에도 왕위에 올라 단종 시절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았으니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서 그랬다. 게다가 세종의 치세정신을 이어 받았다는 의미에서 世宗에서 世를 따서 世祖라고 정했던 것이다.
조선조 최악의 왕으로 평가 받는 임금인 선조는 원래 붕어 후 선종으로 묘호가 정해졌지만, 나중에 광해군이 선조가 임진왜란을 잘 극복했다고 해서, 또 혼용의 정도로는 결코 선조에 뒤지지 않은 인조는 폭군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잘 넘겼다고 해서 묘호에 조를 붙여 높였다. 선조와 인조가 각기 임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잘 극복했다고?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지만 당시 인조반정, 즉 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인조는 선왕이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인조가 새로운 왕이 됐으니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거나 다를 바 없다는 논리로 그 후손인 효종이 그렇게 부르기로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직계 후손들이나 선대왕 일족의 지원을 받아 왕권을 잡은 이상 공명정대하게 평가하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선조와 인조는 그렇다고 치더라고 영조, 정조, 순조 세 왕은 정말 원칙에서 벗어나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의 치세 시에는 전쟁도 없었고, 국가적 위기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는 모두 묘호에 祖가 쓰였다. 처음엔 그들도 영종, 정종, 순종으로 宗 자 묘호로 정해졌다. 그런데 후대 고종 대에 이르러 묘호 중에서 종보다는 조를 사용하는 게 더 낫다는 유혹을 버리지 못해 아들이 아버지에게 조를 붙이기를 원한 결과 영조와 정조가 고종의 직계조상이라는 이유로 영종과 정종을 각기 영조와 정조로 바꾸었다. 순종도 ‘강화도령’신분에서 철종으로 임금이 된 뒤 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순종을 순조로 바꾸어버렸다. 공적으로 치자면 조선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세종대왕도 종의 묘호를 썼음에도 후대에 내려와 이처럼 조와 종의 차이가 원래 의미와는 별 관계없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조선이 태조 이성계 때부터 중국에 납짝 엎드려 조공을 갖다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면서 중국의 눈치를 봤는데 어떻게 묘호는 사용할 수 있었을까? 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통일신라시대 때 보다 훨씬 더 사대주의에 깊이 빠졌는데도 묘호는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조선에게 끝까지 쓰지 못하도록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조가 중국에 조종묘호 사용에 대해 사과를 한 아래와 같은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중국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임금이 방자하게 조종의 묘호를 쓴다고 선조를 심하게 질책했다. 이에 선조는 삼국 시대 이래 중국을 지극히 사모하여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묘호만큼은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면서 죄를 묻는다면 만 번 죽더라도 할 말이 없다고 싹싹 빌어서 죄를 모면했다. (『宣祖實錄』宣祖31年 10月 21日)
이처럼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의 충실한 제후국임을 표방했고 사대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묘호만큼은 중국의 간섭을 받아가면서도 끝까지 사용했다. 조선 중기 송시열 같은 자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청이 욱일승천하고 명이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현실을 보고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줬다는 이유로 명을 끝까지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극사대주의자였지만, 죽은 왕에게 묘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조선의 사대부나 왕들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묘호 하나라도 끝까지 사용하면 스스로 자존의식을 지키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었을까? 대국에 사대(事大)를 하면서도 자주적이라고 안위하면서 혼자만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 의식의 발로였을까?
2017. 11. 12, 22:07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