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주석이 자신감을 얻었다고?
시진핑 주석이 자신감을 얻었다고?
서상문(고려대학교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중공 제19대 전국대표대회는 예상대로 새로운 변화가 없었다. 시진핑 주석이 자신에 찬 어조로 중국의 ‘신시대’와 ‘중국의 꿈’(中國夢)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시행해온 정책들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표명일 뿐이다. 이를 두고 시 주석이 국정운영에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해석한 전문가와 언론도 있었다.
내겐 공멸을 우려한 중공 원로와 현수뇌부의 의지가 반영된 공전의 위기의식에서 나온 절박한 각오로 들렸다. 당 이념의 근본적인 변화야 분명 시기상조지만, 혹여 역사발전의 순류대로 경제성장에 따른 자유, 민주, 인권의 보편가치를 신장시킬 선언이나 다당제, 의회제, 사유재산제의 점진적 허용을 전제로 한 단계별 로드맵 같은 새 비전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허나 시 주석은 개인권력의 강화로 당, 군, 정부와 인민에 대한 감독과 통제를 더 강화할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막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과 중공 일당독재를 포기하지 한 기존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확인시켰을 뿐이다. 중국지도부는 마오쩌둥의 위권(威權)시대로 되돌아가면서도 현 중국상황을 총체적 위기로 본다.
무리한 성장위주 경제정책이 빚어낸 이상증후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 매년 거대자금을 투입했지만 생태환경과 생산성만 악화시킨 채 경제성장률을 6%대로 하향 조정한 것이 표증한다. 과도한 은행대출에 의존한 심각한 국영기업의 만성적 채무로 인한 국가채무는 5년 전 GDP의 148%에서 올해는 235%로 폭증했다. 이대로 갈 경우 2022년엔 300%로 늘어나고, 부동산과 주식가격의 폭락에다 상승한 실업이 더해져 그리스사태가 재연될 것이라든가 혹은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경고도 있다.
국영기업의 개인소유가 인정되지 않는 이상, 주식시장은 수십조 위안의 공적자금으로 연명되고 있다. 부동산시장도 경기과열로 거품이 형성돼 있다. 엄청난 국가채무와 거품을 걷어내지 않으면 위기가 일시에 폭발할 임계점에 이르렀다. 즉각 손을 쓰지 않으면 체제가 위협 받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IMF가 지난 8월 중국정부에게 성장지수를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신용대출에 대해 재차 경고했고, 지난 9월 말 무디스, 피치 등 신용평가회사들이 중국의 신용등급을 낮춘 이유다.
절대 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여전히 빈곤하지만 국가와 일부 계층은 막대한 부를 축척한 격차사회다. 그들의 부는 공공권력이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소위 ‘수퍼(超級)부패’(권력형 부정축재)가 곳간이다. 도처에 똬리를 튼 뿌리 깊은 부정부패의 주역은 다름 아닌 혁명원로 2세(紅二代)를 포함한 당, 군, 정의 고위층이다. 조직적으로 국가재산을 축내는 이들의 부패가 경제성장을 막고 사회기강을 해치는 주범이라는 게 당 지도부의 판단이다.
전국에서 매일 토지와 건물의 소유권보장을 둘러싼 농민, 노동자 시위도 반중공, 반체제적 적의를 드러내 위험수위에 도달한지 오래다. 중공은 이들이 분리주의자 및 민주세력과 결합되는 걸 극도로 경계해왔다. 지난 5년간 시 주석이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전담 영역인 경제문제에까지 개입해 자파세력인 ‘개혁소조’를 가동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노선과 고위층 부패문제해결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진 권력투쟁 결과 가까스로 장쩌민, 후진타오 등의 각 계파들이 시진핑의 권력집중을 용인하게 된 배경이다. 시 주석의 집권 제2기의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중국정부가 통화스와핑 연장에 순응하는가 하면,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배치로 벌어진 갈등국면을 봉합하고 경제보복 조치를 해소시킬 낌새를 보이는 것은 자국 내 취약한 사정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곧 있을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중국 속사정에 대한 면밀한 연구검토 위에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중국경제 및 정치상황에 대비한 수출입시장의 다변화 모색은 이미 오래된 과제다. 무엇 보다 우리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 보다 중국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큰 이상, 중국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지속적인 중국연구의 심화는 국가적 과제로까지 격상돼야 한다.
위 글은 2017년 11월 6일자『서울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