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은 결코 "무조건 항복"을 말하지 않았다! :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오해
일왕은 결코 “무조건 항복”을 말하지 않았다!
: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오해
서상문(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다시 광복절을 맞이하였다. 빛을 되찾은지 70년이 더 지났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라디오 방송에서 비통하고 침울한 어조로 공표한 것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극히 일부의 일본사 전공자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일왕은 “무조건 항복”은커녕 “항복한다”는 말조차도 입에 담지 않았다. 아예 항복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았다. 히로히토가 공표한 담화문의 정식 명칭은 ‘종전 조서’였다. 그것은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국에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어서 간접적으로 ‘항복’의사가 내포돼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일본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담화 형식의 “종전 선언”의 의미가 더 컸다. 당시 일왕이 공표한 종전 조서는 일본왕실에서 사용하던 문체로 되어 있는데, 이를 가급적 왕실 특유의 어조를 살리면서 현대적 의미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하며, 이에 충량(忠良)한 너희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게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라는 뜻을 전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평온무사(강녕)를 도모하고 전세계(萬邦)가 다 같이 번영(共榮)하여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역대 천황들(황조황종 皇祖皇宗)이 남긴 가르침(遺範)이어서 짐도 두 손으로 받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바다. 이전에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지 이미 4년이나 되고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 짐의 많은 관료들(百官有司)의 성의를 다한 노력, 짐의 1억 신민(衆庶)의 봉공(奉公)이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戰局)이 꼭 호전되지 않았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그런데다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번번이 죄 없는 신민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문명까지도 파괴해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짐은 무엇으로 수많은 신민(億兆의 赤子)들을 보호하고 역대 황조황종의 신령들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東亞)의 해방을 위해 일본에 협력한 여러 맹방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목숨을 잃은 자, 직장(職域)에서 순직한 자,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자 및 그 유족들에게 생각이 미치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다. 또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재화를 당하고, 가업을 잃어버린 자의 후생에 관해서는 짐이 깊이 걱정(軫念)하는 바이다.
생각컨대 금후 제국이 받을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을 것이다. 너희 신민의 충정(衷情)은 짐이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짐은 시운의 흐름에 참기 어려움을 참아내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내어 금후의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고자 한다.
짐은 이에 국체를 보호 유지하여 충량한 너희 신민의 충심(赤誠)을 믿고 늘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감정이 격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하여 대도를 그르치고, 세계에 신의를 잃게 되는 것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모쪼록 나라 전체가 한 가족처럼 단결하고 자손들이 이어지는 것을 굳게 하여 신주(일본)의 불멸을 믿어, 책임은 중하고 길은 멀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장래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케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행하여 세계의 나아감(진운)에 뒤쳐지지 않도록 기할지어다. 너희 신민들은 이러한 짐의 뜻을 잘 이해하고 지키도록 하라.
모쪼록 나라 전체가 한 가족처럼 단결하고 자손들이 이어지는 것을 굳게 하여 神州(일본)의 불멸을 믿어, 책임은 중하고 길은 멀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어 총력을 장래의 건설을 위해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케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흐름(進軍)에 뒤쳐지지 않도록 기할지어다.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잘 지키도록 하라.”
이게 이른바 종전조서란 것의 전부다. 이것을 과연 항복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일본정부는 일왕의 종전 조서 공표 전후로 연합군 측에다 일왕의 존속과 ‘천황제’가 유지되도록 해주길 바란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조건부 항복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여기 어디에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형언 불가의 고통을 가한 것에 대하여 반성과 사죄를 한 게 있는가?
자국민이 원폭을 맞아 살상된 것에 대해선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다”고 애통해 했지만, 일본군이 일왕 자신의 이름 하에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해 수많은 약탈,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인명까지 살상한 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사과한다고 말한 게 없다. 일왕 자신의 전쟁도발 책임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도 없다. ‘천황제’ 국가의 특성인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위 조서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일본이 항복하게 된 이유와 일왕의 심사가 오롯이 손에 잡힌다.
첫째, 일왕이 항복하게 된 이유는 연합군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든 “세계 대세”에 밀린데다 “잔학한 폭탄”으로 규정한 원자폭탄을 맞아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계속했다간 일본민족의 멸망에 그치지 않고 인류문명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둘째, 일왕은 사실을 왜곡하면서 일본의 전쟁도발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린 사실이다. 일본은 19세기 말의 청일전쟁, 20세기 초의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공격 개시 전에 미리 상대국에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일왕은 태평양 전쟁 개전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였다. 더군다나 하지도 않은 “선전포고”를 한 이유가 일본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호도하였다.
셋째, 일본의 침략은 일왕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침략전쟁의 도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사실이다. 이는 당시 군사적 모험에 승부를 걸어 대외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던 군부에게 그 책임을 미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봐도 된다.
넷째, 일본인 전체에게 거국적으로 허구에 지나지 않은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유지, 보존시키고 “제국의 국체를 수호, 발양”할 것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한 사실이다.
다섯째, 패전의 책임을 방기하는 한편, 일본민족의 불멸을 강조함으로써 다시금 재기할 것을 일본국민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오늘날 일본정부가 시종일관 과거의 침략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비뚤어진 절치부심을 통한 재기 후 군사적 팽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이미 종전 시 일왕이 읊은 종전 조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광복절이 어느덧 70여회나 된다.
일본의 과거사 무시와 왜곡 작태를 시정시키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일왕의 항복 내용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달리 어떤 무기가 이 보다 더 예리하겠는가?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투철하지 못해 스스로 역사왜곡을 만들어내는 자세로는 절대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깊이 명심할 일이다.
위 글은 2017년 8월 15일자『오마이뉴스』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