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4~6차 공세와 서울 재수복
중공군의 제4차~6차 공세와 서울 재수복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4’후퇴로 37도선의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력을 회복한 후 1951년 1월 24일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하에 강력한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총반격을 개시했다. 23만 명의 대병력이 동원된 서울재탈환 작전이었다. 이에 대해 다음날 중공군이 즉각 방어에 나섬으로써 중공군의 제4차 전역이 시작됐다.
아군은 미 제1군단이 서울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중공군 제38군단 제112사단과 제50군단을 상대로 20여일 동안 격렬한 공방전을 치른 끝에 인천을 재차 점령했고, 중공군은 2월 18일 한수 이북으로 철수했다. 아군은 2월 19일부터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재개한데에 이어 3월 7일 서부전선에서도 재공격에 착수했다. 3월 중순 아군 측이 세 방면에서 서울을 옥죄고 들어가자 적은 8개 군단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했고, 아군은 4월 21일 서울에 재입성했다. 이로써 87일 동안 지속된 중공군의 제4차 전역이 끝났다.
아군이 서울탈환에 그치지 않고 38도선 부근까지 밀고 올라가자 적은 휴식과 부대를 정리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날부터 제5차 전역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팽덕회는 1단계 공세에서 미군 3개 사단과 한국군 2개 사단을 섬멸하고 37도선까지 점령한다는 목표로 약 80만 명의 대병력으로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이 4월 29일 서울 북쪽 교외를 공격했고, 중공군 제3병단, 제9병단과 동부전선의 북한군도 38도선 남쪽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 공격으로 한때 전선 중앙의 한국군 제6사단과 미 제24사단의 일부가 타격을 입었고, 전선이 동서로 양단되고 70~80㎞까지 밀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군은 서울을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양식과 탄약이 바닥난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38도선 이북의 기동지역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1단계 공세가 1주일도 지속되지 못하고 끝났다. 후방 군수지원이 원활하지 못했던데다 아군의 후방상륙을 우려한 모택동의 지시에 따른 후퇴였다. 그 후 5월 16일 밤부터 13개 군단 병력으로 2단계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3일 연속 공격으로 아군 측 4개 사단을 격퇴하고 전선을 50~60㎞정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5월 20일부터 아군은 반격에 나섰고, 중공군은 이 반격에 밀려 후퇴하는 과정에서 5월 26일 북한강 남쪽의 가덕산, 납실리 등지에서 미 제7·제24사단과 한국군 제6사단에 포위당한 제60군단의 주력 제180사단의 1만 여명이 사상되거나 포로가 됐다. 팽덕회는 즉각 휴식과 부대정비 중에 있던 8개 군단을 투입해 5월 27일부터 전전선에 걸쳐 방어전에 돌입했다.
아군은 18일간의 공격으로 적의 완강한 방어망을 뚫고 북쪽으로 수십㎞에서 100㎞ 정도 밀고 올라갔다. 하지만 이 공격은 적이 머지않아 대규모 반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미군 지휘부의 지시로 중지됐고, 아군은 즉각 전 전선에 걸쳐 방어준비에 들어갔다. 아군 측이 방어에 들어감에 따라 중공군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기에 제5차 전역은 여기서 자동적으로 종결됐다.
제5차 전역 후부터 毛澤東은 아군의 북진을 격퇴하여 중국 동북지역의 안전을 확보하고 북한정권을 구하고자 한 애초의 전쟁개입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고, 전선을 38도~38.5도선 사이에 고정시켜 북한지역에 대한 방어에 치중한 이른바 “전략방어”로 선회했다. 그러면서도 모택동은 제6차 전역을 9월에 발동하기로 계획했지만 7~8월 북한지역에 발생한 40년 만의 대홍수 때문에 연기돼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 글은 축약돼 "중공군의 4차~6차 공세"라는 제목으로 2010년 6월 2일자『朝鮮日報』A29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