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중국의 군사적 대응−군대이동과 배치를 중심으로−
6⋅25전쟁 초기 중국의 군사적 대응
−군대이동과 배치를 중심으로−
서 상 문(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 머리말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정부는 이와 무관한 듯이 침묵을 지켰다. 중국정부가 6⋅25전쟁에 대한 자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하게 된 것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정무원 총리이자 외교부장인 周恩來(1898~1976)의 논평이었다. 그는 한반도 파병과 미 제7함대의 대만해협 진주를 명령한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과 그 정부를 겨냥해 6⋅25전쟁은 미국이 “이승만 괴뢰정부”를 교사해 일으킨 전쟁이자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음모라고 단정했다.
周恩來의 논평은 같은 날 소집된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 약함)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미국의 군사행위에 대응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취해진 것이었다. 그로부터 중국정부가 1950년 10월 중순 중국군을 입북시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기까지 정부차원에서 추진한 실제적인 대응은 크게 일곱 가닥으로 정리된다.
첫째, 미군의 한반도전개와 미 제7함대의 대만해협 출동을 중국의 통일문제, 즉 대만해방에 대한 무력간섭으로 인식하면서 대만해협과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철수와 6⋅25전쟁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촉구한 것이었다. 그것은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미군이 대만해협과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환기로 나타났는데, 일정 부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과의 의견조율을 거친 공조의 결과였다. 소련과의 공조는 이외에도 북한을 지원하는 소련 군수물자의 중국 영공 및 육상 통과 등의 군사 협조까지 포함된다.
둘째, 북한에 대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기능을 정상화하면서 북한 지도부와의 공조를 모색했다. 그것은 주로 북한의 전쟁수행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각종 군사지원의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일부 병력의 북한이송, 북한 지도부와의 연계를 통한 정세파악 및 정보수집과 북한지역의 지형정찰 등이었다.
셋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군사적 방어와 한반도 군사개입의 동시 준비로서 그 임무를 수행할 이른바 ‘東北邊防軍’을 급거 편성하고, 관련 사전 준비를 진행시켰다.
넷째, 그 과정에서 한반도 전황변화에 대응해 대만해방작전의 연기를 당론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다섯째, 이에 따라 중국국민당군과 미군의 공격 예상지역으로 간주한 華東지역과 수도 北京-華北일대의 중국연해지역을 중심으로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방공체제를 구축했다.
여섯째, 군수, 병참, 수송 등의 후방지원체제 수립과 단위 부대별 군사훈련 등의 각종 전투준비였다. 일곱째, 국내정치 수준에서 반미의식의 고양을 위한 군중집회의 유도, 그리고 이를 통한 전시동원체제로의 전환준비에 착수한 것이었다.
본고는 이 가운데 세 번째 주제인 중국의 군사적 방어조치와 한반도 군사개입의 동시 준비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특히 毛澤東(1893~1976)이 파병을 결심하기 이전의 군사적 예비조치 가운데서도 중국군의 이동 및 배치에 대해서 현미경의 조리개를 열어봤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간 학계에서도 그다지 세밀하게 조명된 바가 없다. 이 작업은 이 영역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서 중국군의 한반도 파병을 신 중국의 국가안보 내지 국가 방위계획과의 비단절적 연장선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이 작업은 6⋅25전쟁 당시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을 총체적, 계통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신 중국의 국방 군사배치 조감도
중국은 군대를 한반도에 파병해 군사적으로 개입하기까지 어떤 과정과 행로를 밟았을까? 먼저 전쟁초기 중국 지도부가 취한 군사적 예비조치를 살펴보자. 6⋅25전쟁 발생 직후부터 10월 중순 한반도 군사개입에 이르는 약 4개월 동안 초기 중국 지도부가 취한 군사조치 중 가장 두드러진 동선은 두 방향이었다.
첫째, 대만해방을 위한 군사준비의 계속적 추진과 그리고 미군의 한반도 전개에 따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방어와 개입을 동시에 고려한 이중적 군사준비의 조기 착수였다. 군사이동 배치가 방어준비에 해당됐든, 파병개입을 위한 사전 이동이 됐든 군 병력을 동북지역으로 이동, 배치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예비조치였다. 둘째는 대만해방 작전을 연기함으로써 그 때까지 대만공격을 계획, 준비해온 공세적 입장을 버리고 미군의 동북아 군사진출에 대한 영토방어 및 한반도 파병으로 선회한 것이다.
상기 조치를 주도한 것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毛澤東이었다. 군사문제는 외교문제와 같이 毛澤東이 사단급 부대의 전술지휘까지 내리면서 직접 주관한 그의 전문 영역이었다. 중국군의 참전을 당론으로 최종 결정하기 전까지 군사배치의 재조정과 이동, 준비 등에 관한 조치들은 전적으로 毛澤東이 중국 중앙군사위원회의 참모들과 주요 야전 지휘관들의 건의를 종합해 내린 결정이었다. 따라서 중국군의 정확한 동선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먼저 毛澤東을 중심으로 한 중국 수뇌부가 조치한 중국군의 병력이동과 배치에 관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쫓아가 볼 필요가 있다.
핵심논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사항에 관해 개념을 정리해보고 넘어 가기로 하자. 하나는 전쟁 초기 중국군의 중북 국경지대로의 군사이동 배치를 어떤 성격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毛澤東의 對한반도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전통 중국의 脣亡齒寒 개념의 발전적 형태인 신 중국 수립 후 毛澤東의 지정학적 안보개념을 짚어본 후 그것을 토대로 그가 짜놓은 신 중국의 군사상황과 군사배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중국군의 중북국경지역 이동과 배치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먼저 전자와 관련해 중국관내의 군 병력을 동북지역으로 이동, 배치시킨 목적이 파병개입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미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 목적이었는지 그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중국의 6⋅25전쟁 개입 결정시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국학계의 徐澤榮은 毛澤東이 전쟁에 참전하려고 작정한 것은 1950년 1월부터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1950년 초 毛澤東과 스탈린이 중소동맹 체결시 김일성(1912~1994)의 남침문제를 논의한 바 있고, 이에 따라 毛澤東은 한국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미리 연초부터 이에 대한 전쟁준비에 착수했는데, 군대이동 배치는 그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毛澤東과 스탈린의 사전 밀약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중국내 군대이동까지 참전의 범주 안에 넣고 봤기 때문이다. 반면 이종석은 1950년 7월에서 9월에 걸친 중국 지도부의 군사이동배치를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출병준비로 파악하면서 중국이 참전을 준비한 것은 7월초부터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점과 관련해 나는 중국이 파병준비를 착수된 한 것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였지만, 최종적으로 국가정책차원에서 파병을 결정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쳤다고 본다.
첫째 단계는 1950년 6월 28일의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에서, 즉 중국 수뇌부 수준에서 원칙적으로 참전을 배제하지 않고 그에 관한 당론은 사태추이에 따라 결정하기로 함에 따라 毛澤東이 7월 중순부터 군 병력을 동북지역으로 이동 배치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군사준비에 착수한 후부터 한반도의 전황이 역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8월 중순까지 사전 중북 국경방어 준비에 치중한 기간이었다. 물론 이 조치는 순전히 방어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북한진입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둘째 단계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연이어 전개된 전황반전 시점부터 9월 말 기간동안 毛澤東이 번민어린 심사숙고 끝에 최종적으로 파병을 결심하게 된 시기다. 이것은 중공 차원에서 최종적인 당론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 毛澤東 개인의 생각이었다.
셋째 단계는 毛澤東이 자신의 결심을 중공 당 지도부에 공론화함으로써 국가정책 차원에서 파병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10월 초부터 10월 19일 사이의 단계였다. 이 마지막 셋째 단계는 소련의 군사지원 범위, 즉 파병조건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조율문제로 파병 결정을 미루기도 하고,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기도 하는 등 몇 차례의 반전을 거친다.
후자인 毛澤東의 대한반도 지정학적 인식과 관련해서 당시 신 중국의 국가 방위에 관한 그의 구상과 실제는 어떠했는가? 중국은 전통적으로 자국영토를 지정학적 관점에서 핵심(혹은 중핵)지대, 변경(邊疆)지대, 완충지대(buffer zone), 전략적 영토경계지대 등 4개 지역으로 구분해왔다.
핵심지대는 長江, 黃河江 중하류 유역과 남방의 珠江 유역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중화문명의 발상지이자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腹地)이다.
변경지대는 핵심지대를 보호하는 바깥 외연지역으로서 핵심지대와는 脣亡齒寒, 脣齒相依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핵심지대를 에워싼 內蒙古, 위구르(新疆), 靑海, 廣西, 東北地域 등이 여기에 속한다.
완충지대는 국경 너머 바깥 지역의 동북아시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5개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 지역들은 러시아를 제외하고 대체로 과거 중국과 ‘조공 책봉’의 宗藩관계에 있던 지역이었다.
전략적 영토경계지대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인도차이나 반도, 동남아의 말라카 해협 연안 국가들과 같이 중국의 국력과 영향력이 실제로 미치는 지역이다. 위에서 열거한 東北, 內蒙古, 위구르, 靑海, 廣西 등의 변경지역은 핵심지대를 보호하는 바깥 외연지역으로서 핵심지역과 순망치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각기 한반도, 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라오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이들 바깥지역과도 순망치한 관계에 있다.
신 중국 건국 후 毛澤東이 전국 차원의 국방군사력 배치를 조정하기 위해 수립한 계획도 상기 지정학적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1949년 10월 하순 중국인민해방군 제3야전군이 대만 점령의 일환으로 대만과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음으로써 전술적 요충지로 부상한 金門島에 대해 감행한 공격이 실패하자 그 직후인 같은 달 31일 毛澤東은 바로 신 중국의 군 병력 배치를 새롭게 했다.
이에 관한 毛澤東의 기본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天津-북경, 上海, 廣州를 중심으로 한 세 지역을 중국 국방의 중점 지역으로 설정했다. 이 세 지역은 모두 연해지역으로서 근대공업이 가장 발달한 수도 북경과 화북, 화동-화중지역, 화남지역을 대표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중국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 침략시 진입해온 통로였다.
천진은 수도 북경과 화북으로 직입이 가능한 중국북방의 관문이다. 20세기 벽두 중국의 북경과 화북지역 일대에서 발생한 義和團의 난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으로 군대를 진주시킨 영국, 프랑스, 일본 등 8개국 군대가 북경으로 진입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천진의 塘沽항이었다.
상해는 주지하다시피 신 중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서방 국가들이 자국의 대중국무역 혹은 침략을 위해 끊임없이 드나들거나 꽈리를 튼 곳이었고, 長江을 통해 南京, 武漢 등의 중부 중국지역은 물론 重慶, 成都 등 서부내륙의 四川省까지 들어갈 수 있는 중동부 지역의 문호이다.
광주는 중국의 문호개방을 강제하기 위해 아편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중국인에게 피침의 역사를 안겨준 영국이 대중국 진출의 거점으로 삼은 굴욕의 상징으로서 광동성 뿐만 아니라 광서, 호남, 강서, 복건성을 통해 중국의 중부와 서남부로 들어갈 수 있는 남방의 길목이다.
따라서 상기 세 지역은 제각각 長江, 黃河江 중하류 유역과 광동성의 珠江 유역의 중심도시로서 중국의 안보개념상 전략적 중핵(핵심)지대에 속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요컨대 毛澤東이 연해지역의 주요 거점도시들을 잇는 북경, 천진, 山海關, 상해, 杭州, 南京, 廣東, 廣西지역을 중국 안보의 중점지역으로 설정한 것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적 필요성에서 고려된 구상이었다. 毛澤東은 이 세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계획을 수립했고, 군대배치와 운용도 그에 부합되도록 조치했다.
중국은 국공 내전이 끝나가는 당시 총 병력 390만 명의 중국인민해방군을 4개의 야전군으로 편제해 운용해 왔었다. 1개 야전군은 대략 3~4개 병단이 소속돼 있고, 1개 병단은 3~4개 군단을 예하에 두고 있었다. 이 병력은 공안 사단 등 여타 무장병력을 제외한 정규군 숫자였다.
이 가운데 지상군이 거의 100%를 차지했고, 공군과 해군은 각기 7,500명과 7,700명으로서 둘을 합쳐도 전체 병력수의 0.5%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공내전이 끝나기 전인 1949년 7월 현재 병력분포를 보면 4개 야전군 가운데 중국국민당군의 잔여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있는 제4야전군에 전체 정규군 병력 390만 명의 약 70%에 가까운 240만 명을 배속했다. 나머지 150만 명이 각 군구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 직할부대에 소속돼 있었다.
신 중국 건설 초기 중국인민해방군 주력부대는 주로 西北, 西南, 中南, 華東 지역에 배치돼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중국국민당 군벌의 잔여 세력과 비적(土匪)토벌에다 중국국민당 계열 간첩의 색출, 반당분자들의 숙청과 함께 농촌토지개혁 및 건설사업에 투입돼 새로 탄생된 중공정권을 공고히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대만과 티벳을 해방시킬 준비를 병행하고 있었다. 각 야전군의 배치지역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인민해방군 제1야전군(제1․제2․제18․제19병단)은 內蒙古, 山西, 陝西, 甘肅, 寧夏, 靑海, 新疆 등지의 서북을 ‘해방’한 후 주로 이 지역에 주둔하면서 점령지의 혁명공고화 작업에 투입돼 있었다. 일부분의 병력은 제2야전군의 작전에 투입돼 서남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2야전군(제3․제4․제5병단)은 雲南, 貴州, 四川, 西康지역, 즉 이른바 서남지역에 들어가 중국국민당 잔류 부대를 소탕하고 있었다. 제3야전군(제7․제8․제10병단)은 대만의 대안지역인 화동지역의 上海, 杭州, 南京일대를 중점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제4야전군(제12․제13․제14․제15병단)은 廣西지역의 중국국민당 계열의 군벌들을 제압한 후 예하 5개 군단이 廣州를 중심으로 廣東과 廣西 두 지역의 국방을 맡고 있었다.
이 상황은 1950년 5월 야전군을 폐지하고 전군을 각 군구별로 개편, 재조정하기 전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때 중국은 중앙군사위원회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 등의 중앙기구는 그대로 존속시키고 기존의 야전군 체제를 새롭게 전국을 중공의 6대 지방중앙국으로 개편한 군사관리 체제에 맞게 6대 군구(동북, 서북, 서남, 중남, 화동, 화북)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 직할(제20병단) 체제로 개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처럼 毛澤東은 6⋅25전쟁 직전까지는 핵심지대인 수도 북경과 화북지역 방어에 치중하기보다 중국국민당을 섬멸하기 위해 남방에 더 많은 군대를 투입 혹은 배치해놓은 형국이었다. 따라서 수도방어에 직결된 화북지역과 동북지역의 옛 해방구에는 주로 지방부대와 수비부대가 있었을 뿐 야전군의 주력부대는 적었다. 화북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는 제20병단(사령관 楊成武, 1914~) 예하의 제66․제67․제68군단 등 3개 군단과 기타 6개 2급 사단이 北京, 天津, 山海關을 잇는 선상에 배치돼 있었다.
핵심지역 방위에 직결되는 동북지역도 병력이 많지 않았다. 이 곳에 야전부대가 주둔하게 된 것은 중국인민해방군 제42군단이 이동한 1950년 봄부터 시작됐었다. 제42군단 군단장 吳瑞林(1915~)에 따르면 6⋅25전쟁 발생시 동북지역에는 자신의 제42군단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취약한 수도와 화북지역의 방어에 대해서 毛澤東은 다음과 같이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먼저 상기 병력으로는 유사시 수도 및 화북지역 전역을 방어하기엔 역량이 부족할 것으로 판단했다. 제3야전군의 경우 방어 중점지역은 화동지역이었고, 병력 일부를 대만 공격준비에 투입시켜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도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華北지역까지 방어하기에는 무리였다.
이에 대비해 전군에서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제4야전군의 제13병단과 제1야전군의 제19병단 등 2개 병단을 수도를 중심으로 한 華北지역 방어뿐만 아니라 유사시 전국 차원의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이른바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이하 ‘중앙군사위원회’로 약칭함) 직할의 ‘국방전략예비대’로 운용하고 있었다. 즉 제4야전군의 예하 군단들 가운데 廣州를 중심으로 兩廣(廣東과 廣西)지역을 수비하고 있는 5개 군단들 외에 3개 군단을 河南에 주둔케 함으로써 언제든지 華北으로 증원할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기타 나머지 군단은 湖南, 湖北, 江西 3개 성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주력부대를 철도선상에 위치시켜 남북으로 민첩하게 기동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다른 하나의 국방전략예비대인 彭德懷(1898~1974)의 제1야전군 예하 부대 가운데 楊得志(1911~)가 지휘하는 제19병단 소속 3개 군단 병력 10만 명을 寶鷄, 天水, 平凉 지역에 주둔시켜 유사시 어느 곳으로나 기동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毛澤東의 군 병력 배치 조정 작업은 1950년 상반기 제19병단과 제13병단 두 국방전략예비대가 각기 지정된 주둔지인 하남과 호남, 호북과 강서성 등지에 도착하면서 기본적으로 완료됐다.
이상의 배치에서 알 수 있듯이 毛澤東은 국방전략예비대를 남북과 동서의 주요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역인 陜西省과 河南省 일대에 주둔시켜 남쪽과 북쪽 양방향으로 기동시킬 수 있도록 해 남방을 중시하고 북방을 느슨하게 하는 경향을 보였다. 남방을 중시하고 수도와 동북지역을 포함한 북방지역을 경시한 군사력 배치는 앞에서 소개한 지정학적 안보개념을 토대로 대륙 내 잔류중인 중국국민당군의 섬멸, 그리고 대만해방작전을 고려한 혼합형으로서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한 과도기적 조치였다. 당시 중국국민당군의 잔여 세력이 중공군에 저항하고 있던 지역은 주로 장강 이남의 서남 각지였다.
첫째, 신 중국의 6대 행정구 가운데 동북지역은 해방이 가장 빨랐고 토지개혁도 이미 완성됐으며, 공업 분야의 회복도 마무리돼 가는 단계로 중공 지도부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의 중점이 해방에서 이미 경제 건설로 이행된 상태였다.
둘째, 안보문제에 있어서도 동북지역은 소련과 북한에 인접한 변경지역이었지만, 당시는 중소동맹이 체결된 데다 중북관계도 우호적이었던 상황이 반영된 결과 이 지역 수비에 거대 병력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지정학적 방어개념에서 볼 때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주변의 국제적 안보환경이 변화하지 않았던 중국의 동북지역은 전략적으로 후방에 속했다. 이 점은 1960년대에 들어와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중국군을 대거 동북지역의 중소국경지대로 배치시킨 사실과 대비된다. 중국은 국공내전 승리 후 방대해진 군 병력을 감원하기 위해 군대복원을 실시하기 전 한동안 전체 중국군의 병력이 정규군인 중국인민해방군과 기타 각종 무장병력을 포함해 사상 최대 규모인 총 530여만 명으로 팽창했던 적이 있다. 이 때에도 毛澤東은 동북지역에는 방어병력을 많이 주둔시키지 않았다.
이 지역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동북군구는 예하에 6개 경비사단과 일부 지방부대 약 10만 명 밖에 배속돼 있지 않았다. 이 병력은 당시 전국 6개 대군구 가운데 가장 적은 규모였다. 물론 이 외에 당시 동북으로 이동해와 농업생산에 종사하던 원 제4야전군 소속 제42군단과 정치 군사훈련(政訓)을 진행하고 있던 일부 포병부대와 기병부대들이 있었지만 이 부대들을 모두 합쳐봐야 총 22만8,000명의 병력에 불과했다. 제42군단도 5월 중국인민해방군의 개편에 따라 부대 전체가 농업개간 부대로 전환됐으며, 6개 경비사단은 2개로 축소된 상태였다.
3. 방어와 개입을 위한 이중적 군사 예비조치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초래한 미국의 즉각적 한반도 개입과 미 제7함대의 대만해협 진주로 중국 주변의 안보환경이 크게 변화하자 毛澤東은 기민하게 군사력 배치를 재조정했다. 毛澤東이 서둘러 군사력 배치를 조정하게 된 중요한 동인은 두 가지였다. 毛澤東은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이 북한을 거쳐 중국동북지역으로 진격해올 것으로 예단했고, 이에 따라 먼저 미군에 대항할 북한정권을 지원할 준비를 갖춰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중국동북지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그는 긴급히 군사력 배치를 재조정하고, 동북지역에 대한 군사역량을 증강시켜 안보태세를 공고히 함으로써 돌발 사태를 미연에 예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毛澤東의 전략구상에 따라 전략적 후방으로 간주돼 오던 동북지역이 일약 국가안보의 전진기지(advanced base)로 바뀐 셈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 조치와 대응은 먼저 중공 중앙정치국 서기처 수준에서 논의를 거친 일차적 합의가 선행됐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에 소집된 중공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중앙정치국이 국가 안보전략의 중점 재조정에 따라 결정된 중국의 국방 군사배치는 크게 두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즉 그간의 대만공격 작전준비는 계속 추진한다. 그와 동시에 동북변방의 안전을 지킬 이른바 ‘동북변방군’을 긴급히 편성해 동북지역으로 이동 배치한 후 만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하기로 하되 그에 관한 당론은 사태추이를 보아가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동북지역에서의 방어작전과 유사시 한반도 군사진입에 필요한 소련의 공군 지원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실제로 중국 수뇌부가 그 때까지 지속해온 중국국민당 잔여 부대 소탕을 포함해 대만에 대한 재공격준비를 일단 보류하고 즉각 중국인민해방군을 전시 비상 예비동원체제로 신속하게 전환시킨 것은 북한군이 수세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한반도 전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은 8월 중․하순에 이르러서였다.
毛澤東은 일찍부터 6⋅25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1950년 7월 7일 周恩來에게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국방군사회의를 개최토록 지시했다. 이 날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날이자 동시에 중공 군사고문단이 베트민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을 향해 昆明을 떠난 날이기도 했다. 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周恩來는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신분으로 즉각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을 소집해 당일 오후 국방군사회의 제1차 회의를 열었다. 태평양 건너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 결성안건이 통과되기 10여 시간 전이었다.
회의 참석자는 周恩來를 비롯해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 朱德(1886~1976), 제4야전군 사령관 겸 중남군구 사령관 林彪(1907~1971)와 靑島에서 요양중인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徐向前(1901~1990)을 대리하고 있던 부총참모장 聶榮臻(1899~1992),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羅榮桓(1902~1963) 등 모두 20명 내외였다.
회의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이 적지 않게 불참했고, 그 대신 다른 야전 전투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한 점으로 보아 중공 최고 지도부 수준의 결정을 실무진에서 어떻게 진행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 중점적으로 논의된 회합으로 판단된다.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周恩來로부터 毛澤東과 당 중앙정치국이 ‘東北변방군’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과 함께 유사시 “출국 참전”에 대비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周恩來 자신의 주장을 듣고 東北변방군에 관한 편성과 이동문제를 집중적으로 의논했다. 東北변방군으로 구성될 부대와 병력 수, 지휘기구 설립 및 지휘관 인선과 배치, 정치동원, 수송계획, 병참보급의 보장, 압록강 부근지역으로의 집결시간, 병력보충과 부대훈련 등에 관한 방안들이 거론됐다.
논의 결과 5개항으로 된 ‘동북변방 보위에 관한 결정’(關於保衛東北邊防的決定) 초안이 작성됐고, 그 날 밤 12시에 毛澤東의 승인을 받았다. 毛澤東은 동북변방군 편성에 관한 중앙군사위원회 제1차 국방군사회의의 결정을 의의 없이 동의했고, 결정한 대로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5개항의 내용은 첫째, 부대규모와 이동, 배치 문제로서 4개 군단과 3개 포병 사단을 7월 말까지 전부 安東(현 丹東), 輯安, 本溪 등지로 집결시켜 다음 명령을 기다릴 것. 둘째, 지휘기구 편성문제로서 제3야전군 부사령관 겸 화동군구 부사령관인 粟裕(1907~1984)를 동북변방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蕭華(1916~1985)를 부정치위원으로 임명할 것. 셋째, 후방병참 업무를 준비할 것. 넷째, 병력자원 확보문제를 준비하되 (중국인민해방군) 총후방근무부가 관련 계획을 기간 안에 완성할 것. 다섯째, “국방안전을 지키자”라는 슬로건 하에 정치동원을 전개하되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가 이에 관한 계획을 기초할 것 등이다.
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毛澤東이 승인한 문헌에는 동북지역으로 보낼 부대를 구체적으로 지정해주지 않은 것처럼 기록돼 있다. 그래서 핵심 사항인 어떤 부대를 동북변방군으로 선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란 끝에 사흘 후인 7월 10일의 제2차 국방군사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제1차 국방군사회의가 끝난 후 제2차 국방군사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제4야전군 겸 중남군구 제3정치위원 譚政(1906~1988)과 趙爾陸(1905~1967) 참모장, 萬毅(1907~) 특종병 사령관, 賀晋年(1909~) 동북군구 부사령관 겸 참모장이 잇달아 북경에 도착했다. 제2차 국방군사회의에는 제1차 회의에 참가했던 인원 가운데 羅榮桓과 許光達(1908~1969)이 불참했고, 滕代遠(1904~1974) 대신에 중앙군사위원회 수송사령관 呂正操(1905~)가 참석했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 총후근부 부부장 張令彪(1902~1987)가 총후근부 부장 楊立三(1900~1954)을 대리해 참석했으며, 譚政, 趙爾陸, 萬毅, 賀晋年과 중앙 인민정부 위생부 부부장 겸 중앙군사위 위생부 부장 賀誠(1901~) 등도 회의에 참가했다.
7월 10일의 제2차 국방군사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제1차 국방군사회의에서 성안된 ‘동북변방군’조직 관련 초안에 대해 심의한 후 이를 정식으로 통과시켰다. 계속해서 회의는 결정된 사항들에 대한 후속 조치를 토의했고, 동북변방군 결성에 필요한 각종 세부사항을 확정했다. 이 안은 周恩來가 몇 차례 문구를 조정하는 퇴고를 거쳐 3일 뒤인 7월 13일 毛澤東으로부터 “동의한다. 이대로 집행하라”(同意, 照此執行)는 최종적인 승인을 득했다.
관련 자료와 앞뒤 정황을 종합했을 때 毛澤東은 제1차 국방군사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크게 변경하지 않고 최종 안으로 결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7월 7일의 제1차 국방회의 결정 내용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으로는 단지 그 후 실행된 군 이동 시간과 실제 집결지역이 조금 변경됐을 뿐이다.
동북변방군 조직에 관한 최종 안에 따르면, 제4야전군의 주력으로서 중앙군사위원회의 국방전략예비대인 제13병단 예하 제38․제39․제40군단과 동북군구로 배속된 제42군단, 그리고 제1․제2․제8 등의 3개 포병사단과 공병, 기병 등의 특종부대 수 개 사단 및 연대를 포함해 총 25만5,000명의 병력으로 동북변방군을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편성된 동북변방군의 병력은 이 보다 약 4,000여명이 적은 25만 명을 약간 웃돈 규모였다. 선발된 병과와 부대별 병력 수는 아래 표와 같다.
동북변방군 부대 편성표
부 대 | 편성 인원(명) | |
제13병단 | 병단 사령부 | 1,400 |
제 38 군 단 | 49,015 | |
제 39 군 단 | 57,907 | |
제 40 군 단 | 50,916 | |
소 계 | 159,238 | |
제 42 군 단 | 47,857 | |
포병사령부 | 포병 사령부 본부 | 1,000 |
포병 제1사단 | 9,478 | |
포병 제2사단 | 9,233 | |
포병 제8사단 | 9,499 | |
고사포병 4개 연대 | 8,134 | |
소 계 | 37,353 | |
기병 1개 연대 | 1,100 | |
공병 제6연대 | 2,200 | |
자동차병 3개 연대 | 3,000 | |
총 계 | 250,748 |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의 4개 야전군 가운데 제4야전군이 6⋅25전쟁에 투입될 중국군의 주력으로 선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중국군 중 가장 전투력이 강한 최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제4야전군은 원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정예부대로 성장 발전했는데, 특히 사령관 林彪가 1949년 4월 중국국민당군의 저항지였던 海南島를 점령함으로써 “철군”이라는 칭호를 얻은 전력이 이를 말해준다.
둘째, 제4야전군에는 東北지역의 지세나 기후 등을 잘 알고 있는 東北지역 출신 군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국공내전 시기 東北지역에서 전투를 치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東北지역전쟁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었고, 여기에다 한인 출신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고려됐다. 한인 병사들은 태반이 1945년 8월 일제패망과 동시에 만주점령을 놓고 국공양당이 선점경합을 벌였을 때 毛澤東이 동북으로 급파한 중공군에 충원된 동북지역 출신들을 가리킨다. 그 후 계속해서 그들은 제4야전군에 소속돼 중국국민당군에 대한 전투를 위해 남방까지 동원됐다.
셋째, 당시 사령부를 漢口에 두고 있던 제4야전군은 예하에 제12․제13․제14․15병단 등 4개 병단과 특종병과 철도수송병으로 편성돼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13병단이 주력으로 선정된 이유는 제4야전군의 海南島 공략작전 시 제13병단 소속 제38․제39․제40군단이 선봉에 서서 주력군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제13병단은 1949년 말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중앙군사위원회의 직할 국방전략예비대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병단은 중국을 둘러싼 주요 완충지대인 臺灣,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편성돼 있었다.
이 세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다른 전선에 배치돼 있는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고도 그 지역의 유사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임무가 부여돼 있었다. 말하자면 전국적 차원의 방위의 틀을 흩트리지 않거나 전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국경변방의 국지전에 긴급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13병단의 사령부도 유사시 중앙군사위원회의 직할군구인 북경군구와 그 밖의 6대 군구 등 전국 어디든지 필요한 곳으로 기동, 지원할 수 있도록 동서남북 기동이 편리한 교통의 요충지인 중원지역의 河南省에 뒀다.
상기 방침에 의거해 중국 지도부가 실제로 편성한 동북변방군 지휘부와 병력의 동북지역 이동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동북변방군의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는 제3야전군 부사령관 겸 화동군구 부사령관 粟裕가 선임됐고, 부사령관으로는 蕭勁光(1903~1989)이 선정됐다. 부정치위원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 蕭華가 임명됐다. 동북변방군 후근사령관에는 李聚奎(1904~)가 임명됐다.
부대이동과 관련해 제38․제39․제40군단을 7월 10일과 15일 각기 주둔지인 廣州, 信陽, 漯河를 떠나 8월 5일 이전에 일단 동북지역의 중북국경의 安東, 遼陽, 鳳城지역으로 집결시키고, 제42군단으로 하여금 7월 30일 齊齊哈爾과 北安線을 출발해 通化, 輯安으로 이동, 집결하도록 계획했다. 毛澤東이 승인한 7월 7일의 지시는 제13병단의 일차 집결지로 安東, 輯安, 本溪로 지정됐는데, 이번에는 安東, 輯安, 本溪 지역 외에 遼陽, 鳳城 지역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毛澤東은 제13병단 중 예하 3개 군단을 동북지역으로 이동케 함과 동시에 7월 19일 광동의 제4야전군 소속 제15병단 사령관 鄧華(1910~1980)와 정치위원 賴傳珠(1910~1965)를 각기 제13병단의 사령관과 정치위원에 취임하도록 전보발령을 내렸다. 그리고 鄧華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13병단과 제15병단 지휘부를 서로 맞바꾸기로 하고, 제13병단 사령관 黃永勝(1910~1983)이 지휘부를 데리고 광주의 제15병단 사령부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중공 중앙의 심의결과 鄧華가 黃永勝 보다 군사 능력면에서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7월 25일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제13병단의 제40군단 군단장 韓先楚(1913~1986)를 제13병단 부사령관으로 승진 발령했다. 鄧華는 제13병단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毛澤東에게 제15병단 참모장 洪學智(1913~)를 제13병단 부사령관으로 천거했고, 毛는 8월 洪學智를 제1부사령관으로 임명해 鄧華와 손발을 맞추도록 했다. 또 한사람의 부사령관은 7월에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사령관에서 동북변방군 부사령관을 겸직토록 전보 발령 난 蕭勁光이었다―그러나 蕭勁光은 8월 중순까지도 부임하지 않았다. 부 정치위원에는 각각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 蕭華가 겸직토록 임명됐으며, 참모장과 정치부 주임에는 각각 解方(1908~1984)과 杜平(1908~)이 임명됐다.
그런데 동북변방군 사령부는 예정된 원안대로 설립되지 않았다. 동북변방군의 지휘관과 참모로 임명된 보직자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현지에 부임하는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중국 측 문헌들에 따르면 粟裕는 여전히 靑島에서 요양 중이었고, 해군사령관 蕭勁光과 蕭華도 현직에서의 업무관계로 쉽게 이임할 수 없었다고 한다. 蕭勁光은 8월 중순까지도 부임하지 못했다. 粟裕가 제때에 부임하지 않은 것은 중국측의 기록과 달리 그가 중공 중앙의 정책변화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7월 13일의 제2차 국방군사회의의 최종 결정사항을 각 군구에 하달했고, 粟裕에게 직접 東北변방군 사령관으로 취임하라고 통보했다. 粟裕는 毛澤東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이 때 그는 반발했거나 미온적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상기 사정을 보고받은 毛澤東은 周恩來와 聶榮臻의 건의를 받아들여 7월 23일 동북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인 高崗(1902~1954)에게 동북변방군에 대한 지휘를 위임했고, 동북변방군의 후근부는 동북군구의 후근부와 합병토록 한 후 李聚奎에게 지휘를 맡겼다. 周恩來와 聶榮臻의 건의내용은 粟裕, 蕭勁光, 蕭華가 모두 제때에 도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선 高崗에게 지휘를 위임해놓고, 부임자들이 도착한 후에 사령부를 정식으로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高崗은 당시 중공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毛澤東으로부터 동북변경지역의 방어문제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동북군구의 부사령관은 제15병단 부사령관으로 있다가 얼마 전 동북군구 부사령관으로 전보돼 온 賀晉年이 임명됐다.
상기 선정된 야전부대들은 동북변방군 지휘부 구성문제가 상부 차원에서 재조정되기 전에 이미 동북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즉 중국이 본격적으로 중북국경의 압록강지역으로 군 병력의 이동배치를 개시한 시점은 7월 15일부터였는데, 그 이동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관련 부대들은 각기 7월 14일부터 중앙군사위원회에게서 동북변방군 편성에 관한 결정과 구체적 지시를 하달 받았다.
이에 따라 제38․제39․제40군단은 대략 7월 15일을 개시일로 각기 주둔지를 출발해 대략 8월 5일 이전에 지정된 집결지에 도착했다. 제13병단 정치위원 賴傳珠가 인솔한 제13병단 사령부 기구 및 직할부대 병력 2,000여명과 50여대의 차량, 말 49마리, 26만 2,000근의 물자는 대략 8월 12일과 13일 사이에 安東에 도착했다. 제1․제2․제8 포병 사단 등 3개 사단은 이미 7월 22일 이전에 지정된 집결지에 도착했지만, 고사포 연대는 8월 상순까지도 이동이 완료되지 못했다. 그리고 동북군구의 제42군단을 제13병단에 소속토록 지시한 후 7월 30일 주둔지인 齊齊哈爾과 北安線을 출발해 四平철도를 따라 압록강의 대안인 중국 쪽의 通化, 輯安으로 이동, 집결하도록 조치했다.
제42군단은 원래 제4야전군 제14병단 소속이었으나 1950년 3월 경에 동북군구로 이동해온 뒤 동북야전군에서 확대 발전된 부대로서 모체는 동북야전군 제5종대였다. 이 군단은 동년 3월부터 동북지역의 북쪽 北大荒(현 三江 평원 일대)에 배치돼 황무지를 개간하던 중에 제13병단 편입을 명령받은 것이다. 동북변방군의 주력인 제13병단 사령관 겸 정치위원인 鄧華와 부사령관으로 결정된 洪學智는 8월 9일 북경을 출발해 그날 밤 동북군구 사령부가 있는 심양에 도착했다.
毛澤東이 중국군의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 소속 제13병단을 주력으로 한 대규모 부대를 동북지역으로 이동시킨 배경은 전술했다시피 당시 동북군구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제42군단과 5개 독립 사단, 그리고 1개 공안사단 병력을 모두 합쳐 20여만 명 밖에 주둔하고 있지 않아서 미군 공격시 중국 전체 면적의 5분의 1이나 되는 동북지역 방어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20여만 명의 병력은 당시 중국군 전체 병력의 약 27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측의 입장에서 사후의 결과를 놓고 보면 사실상 이 조치는 기민하고 시의 적절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미군의 중국동북지역 진입에 대비하고, 더 나아가 만일 북한진입이 불가피한 상황이 도래할 경우 그 때 가서 20만 이상의 대규모 군 병력을 이동시키려면 당시 낙후된 수송수단 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중국의 상황으로 봤을 때 모든 수송수단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최소한 2개월 이상 걸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을 경우 그에 따른 병력이동과 군수물자 수송 등의 전쟁준비는 때늦을 것이다.
동북변방군으로 개편돼 동북지역으로 이동해온 각 부대의 집결지는 아래와 같았다. 제13병단 사령부는 安東에 주둔했다. 제38군단 사령부는 鐵嶺에, 그리고 예하부대 제112․제113․제114사단은 각각 鐵嶺, 新開原, 老開原에 위치했다. 제39군단 사령부는 遼陽에, 예하부대 제115․116․117사단은 각각 遼陽, 土佳屯, 海城에 위치했다. 제40군단은 사령부와 예하부대 제118․제119․제120사단이 전부 安東에 집결했다. 제42군단 사령부는 通化에, 예하의 제124․제125․제126사단은 각각 通化, 三源浦, 柳河에 집결했다. 특종병 사령부는 豊城에 위치했고, 예하 야전포병 제1․제2․제8사단은 각각 豊城, 本溪, 通化에 위치했다. 고사포 연대는 安東과 拉古哨에 집결했으며, 1개 공병연대는 安東에 위치했다. 제13병단에 배속된 기병 제13연대는 安東에 집결했으며, 전시 군수지원 임무를 맡은 동북군구 예하 제169사단은 大東溝에 배치됐다.
상기 4개 군단은 동북변방군으로 개편을 명령받고 동북지역으로 이동해 왔지만 동북변방군의 지휘부가 설립될 때까지 당분간 원 소속인 제4야전군과 중남군구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치 군사훈련에 필요한 군수, 병참, 수송 등에 관해서는 심양 동북군구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대규모 병력이 목적지에 당도한 뒤 최고 지휘관에게 도착보고를 하지 않는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현지 지휘관으로부터 도착보고를 받았을 毛澤東은 즉각 8월 5일 高崗에게 9월 상순에는 싸울 수 있도록 8월 중순에 군단과 사단 간부 회의를 열어 그들에게 군사개입의 목적, 의의와 대략적인 방향을 설명해주고 8월말까지 군사훈련과 출동준비 등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명령을 기다릴 것을 지시했다.
4. 개입을 위한 후속 병력의 편성과 이동
그런데 중국군의 중북국경지역 이동은 1차에 그치지 않았다.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함께 동북의 중북국경지역으로 이동시킨 후 1950년 8월 들어 한반도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한반도 진입을 상정한 추가 병력이동이 두 차례 더 있었다. 즉 8월 하순에서 10월에 걸쳐 동북변방군을 지원할 병력을 제2선과 제3선의 지정한 위치로 배치했던 것이다.
이 시기 중국 수뇌부가 7월 중순 동북변방군의 편성, 이동 외에 그 후속조치로서 또 다시 중북국경지역으로 군 병력을 2차에 걸쳐 대규모로 증강하기로 결정한 배경은 세 가지였다.
첫째, 8월 4일 한반도 군사개입의 원칙이 재확인됐고, 둘째, 8월 하순부터 시작된 압록강 하류의 안동시 일대에 대한 미 공군기의 잦은 중국영공 침범과 그로 인한 압록강 교량의 피폭 가능성, 그리고 셋째, 한반도 남단의 급격한 전황반전의 징후였다. 압록강 교량이 미군기에 폭파될 경우 중국군의 북한진입이 차질을 빚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한반도의 전황반전은 중공 수뇌부가 심각하게 예의주시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러한 ‘전황악화’는 중국수뇌부로 하여금 최종적인 군사개입의 결정으로 치닫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25만 명의 병력 보다 더 많은 병력의 투입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중국 지도부 차원에서 결정된 제2차와 제3차의 병력이동과 배치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동북변방군의 증강작업은 동북지역의 현지 야전군 지휘관들의 현지 실태보고에 따른 상응조치였다. 전술했다시피 8월 5일 毛澤東으로부터 출동을 위한 모든 준비를 8월말까지 완수하라는 지시를 받은 高崗은 주요 지휘관들이 현지로 부임한 이후 毛澤東의 지시를 실행하는 군사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그는 8월 13일~14일 간 중공 동북국상무위원회 1급 회의에서 동북군구와 동북변방군 예하 부대 사단장급 이상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이 심양군사회의에서 파병개입 전에 해결돼야할 문제가 폭 넓게 검토됐다. 논의 결과 군사 개입할 경우 크게 두 가지 문제점, 즉 병력 부족과 북한진입시 중국군을 엄호하기 위해 미 공군기를 견제할 공군기를 확보할 필요성이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8월 16일 동북군구 사령관 高崗과 粟裕 대신 동북변방군 사령관으로 전보된 蕭勁光은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문을 보내어 周恩來와 毛澤東에게 병력충원과 공군력 보장 등을 요청했다.
병력충원은 우선 중남지구의 1개 군단을 동북군구에 편입시켜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중국군의 공군기는 당시 소련의 지원으로 1952년까지 3개년에 걸쳐 총 1,560대를 보유하기로 계획을 잡았지만, 실제 전투투입은 1951년 1월 후에라야 가능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겨우 11개 항공연대를 편성할 수 있고, 그 중 제트기 330대를 보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에 대비해 동북지역과 관내의 天津과 靑島 등지에 각기 15개소, 20여개소의 비행장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이 건의를 받아들인 毛澤東은 8월 18일 우선 먼저 8월 말까지 완료하라고 지시한 출동준비 완료시기를 9월 30일까지로 연장한다고 통보한 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에 高崗 등의 요청에 대해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毛澤東의 지시를 받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聶榮臻은 먼저 遼寧省 남쪽지역으로 이동, 배치시킨 제13병단 25만 여명의 병력으로 사태에 대처하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고, 사전 방비를 위해 이를 보완할 전략 기동부대를 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전국의 부대배치 상황을 볼 때, 중남지역과 서남지역의 부대가 각처에 분산돼 있어 군단 이상의 부대가 즉각 집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聶榮臻은 상해지역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화동군구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소속 4개 군단을 먼저 山海關 내 機動지역에 보내고, 여기에다 서북지역의 제1야전군 예하 제19병단을 적당한 시점에 가세하게 하면 제9병단과 공동으로 전략기동부대의 역할을 맡길 수 있다는 구상에서 毛澤東에게 제2선의 특정한 기동방어 지역에 병력을 배치할 것을 건의했다.
1950년 8월 하순 毛澤東은 동북변방군의 제2선 부대로서 2개 병단 병력을 山海關 기동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자는 聶榮臻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毛澤東은 자신이 승인한 이 계획을 구체화하라고 周恩來에게 지시했다. 이를 검토한 周恩來는 8월 26일 동북변방군의 고위 지휘관들에게 군사훈련과 보충임무를 강조하면서 중앙군사위원회가 각 군구에서 제3야전군 소속 제10군단을 차출해 후방예비부대로 삼을 계획이라고 알렸다.
다음날 8월 27일 毛澤東은 전보로 高崗과 蕭勁光에게 그들이 요청한 병력보충과 공군기 확보문제가 해결가능하다고 회답했다. 毛澤東이 이렇게 회답한 까닭은 8월 중순부터 소련공군기가 중국 동북지역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각 군구의 주요 지휘관들인 高崗, 彭德懷, 鄧子恢(1896~1972), 饒漱石(1903~1975), 鄧小平(1904~1997)에게 북한에 투입시킬 병력을 기존 4개 군단에다 12개 군단으로 증강할 작정이라고 하면서 그에 관한 최종 결정은 9월말이 될 것이라고 통고했다. 동시에 시국을 논의하기 위한 회합 건으로 高崗 등 상기 5명에게 모두 9월 25일 북경으로 와줄 것을 지시했다.
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聶榮臻 등이 참석한 중앙군사위원회 실무회의를 몇 차례 주관해온 周恩來는 8월 31일 앞서 聶榮臻이 구상했던 동북변방군의 제2선 배치 증원부대들이 동북지역으로 들어가는 시점에 같은 제2선 배치지역으로 이동시켜 동북지역으로의 이동을 대기시킬 제3차 후속증원에 관한 계획을 완성했다.
이에 따르면, 우선 화동지역의 제9병단을 山東의 津浦線(天津-南京 浦口간 1,010㎞의 철로) 연선지역으로 북상, 군사훈련을 실시시켜 이를 동북변방군의 2선 부대로 삼는다. 그리고 서북지역의 제19병단 부대를 隴海線(甘肅省 蘭州-江蘇省 連雲港간 철로)과 연결된 산동성의 기동지구에 집결시켜 제3선의 후속 증원부대로 삼고 제9병단과 합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이었다.
周恩來는 상기 동북변방군의 강화계획을 9월 3일 毛澤東과 劉少奇(1898~1969)에게 종합적으로 보고했다. 보고내용 중 핵심사항은 기존 동북지역의 제1선에 배치돼 있는 4개 군단 25만 명의 동북변방군을 총 11개 군단 36개 사단과 특종부대, 포병, 전차 및 후근부대 등을 합쳐 약 70만 명으로 순차적으로 증강해 제2선, 제3선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廣州에 주둔중인 중남군구의 1개 군단을 당시 4개 군단이 배치돼 있는 동북의 중북국경지대인 제1선으로 이동시켜 총 5개 군단 15개 사단으로 보강한다. 그리고 제1선의 5개 군단을 지원할 후속 부대로서 총 3개 군단 12개 사단을 화동에서 제2선인 徐濟線(徐州-濟南간 철로)에 10월말까지 배치한다. 제3선은 서북의 제1야전군 예하 3개 군단 9개 사단을 이동시켜 1950년 연말까지 집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동, 서남에서 복원을 보류시켜 뒀던 장정 10만에서 12만 명과 동북, 화북 등의 新區와 하남에 익년 봄에 10만 명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예비병력 총 20만 명을 준비하기로 계획했다.
9월 3일 당일, 周恩來의 상기 안은 毛澤東의 승인을 득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확정됐다. 이에 따라 毛澤東은 즉각 상해지역의 제9병단과 西北지역의 제19병단에게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고, 각 야전군 차원의 병력편성과 이동이 시작됐다. 먼저 제1선의 제13병단 소속 4개 군단에 새로 배속, 보강시킬 제4야전군 중남군구 직할부대 소속 제48군단이 같은 중남군구 직할부대 소속 제50군단으로 교체됐다.
毛澤東은 처음에 竷南, 粵北지역의 제48군단을 북상시켜 동북군구에 편입하도록 제4야전군 사령관 임표에게 지시했지만, 나중에 이 계획을 취소했다. 제48군단이 비적 토벌과 새로운 지역 건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0여 개 현에 분산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군단 간부들도 지방 행정업무까지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이 어려웠었고, 江西와 廣東지역의 비적 토벌은 물론 새로운 지역에 대한 건설 작업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毛澤東은 9월 6일 제50군단을 동북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제50군단은 원래 1948년 10월 遼瀋전역 시 長春에서 起義해온 중국국민당군 제60군단이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면서 예하 제148․제149․제150사단과 제167사단으로 편제됐고, 총 병력 3만 6,000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 제50군단은 湖北의 沙市지역에서 정치 군사훈련, 수리 건설과 생산 임무를 맡고 있었다.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은 제50군단은 1차 집결지인 河南의 駐馬店과 湖北의 孝感을 떠나 동북지역으로 이동해 10월 중순 길림성의 西豊, 遼源, 海龍, 磐石 등지에 도착한 뒤 동북변방군에 편입됐다. 동북지역의 제1선으로 이동해온 동북변방군의 북한 진입 전 배치지역을 도면으로 나타내면 <지도 1>과 같았다.
<지도 1> 동북변방군 편성에 따른 중국군의 이동배치
兗州
曲阜
제2선 배치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9월 초 화동군구 사령관 陳毅(1901~1972)는 명령에 따라 북경에 와서 직접 毛澤東으로부터 제9병단의 동원 임무를 부여받았다. 陳毅는 상해로 돌아간 뒤인 9월 5일 제9병단의 북상계획을 확정했다. 즉 평소 “작은 葉挺”, “패하지 않는 장군”(常勝將軍)으로 불린 葉飛(1914~)가 이끄는 제10병단 예하 제32군단 소속 제94사단을 福建의 厦門지역에서 북상시켜 제27군단에 편입시켜 제9병단의 모든 군단이 4개 사단으로 편제하도록 하고, 1개 사단 병력은 1만 명 안팎으로 구성해 병단 총 병력이 15만여 명에 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북상은 여러 조로 나누어 각기 다른 시각에 출동하는 방식을 취하여 10월 말까지 이동을 완료한 후 11월 중순 북한진입을 위한 군사정비와 훈련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毛澤東은 9월 5일 다음과 같이 명령함으로써 陳毅의 제9병단 북상계획을 승인했다. “제9병단 전체는 10월말에 徐濟線에 집결해 11월 중순부터 부대정비와 훈련에 들어가도 된다.”
이틀 뒤 9월 7일, 陳毅는 제9병단의 군단장 이상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毛澤東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각 부대로 하여금 새로운 작전임무에 적응케 하고, 즉각 병력을 보충한 후 북상 명령을 기다리도록 대기시켰다. 제9병단 예하 제20․제26․제27군단은 화동군구 제3야전군의 주력부대로서 장비도 비교적 괜찮았고, 구성원들의 자질도 뛰어나는 등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부대들은 국공내전 후 줄곧 상해와 항주 지역에서 훈련하면서 대만해방 작전준비를 해왔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이후 대만공격 계획이 연기되자 그 동안 제9병단은 상해와 항주 지역의 경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陳毅의 명령에 따라 제9병단 사령관 宋時輪(1907~1991)은 9월 20일 정식으로 예하의 3개 군단에 북상명령을 하달했다. 3개 군단 예하 12개 사단은 제58․제59․제60․제89사단(제20군단), 제76․제77․제78․제88사단(제26군단), 제79․제80․제81․제90사단(제27군단) 등이었다. 명령을 받은 예하 부대는 10월 1일부터 上海의 昆山 등지에서 제27군단, 제20군단, 병단사령부, 제26군단의 순서로 북상했다.
제27군단은 津浦線 산동구간의 泰安에, 제20군단은 山東의 兗州에, 병단사령부는 曲阜에, 제26군단은 滕縣지역에 각각 집결했다. 제32군단에서 제27군단으로 편입된 제94사단은 북상 중 10월 중순에 이동이 중지됐다. 왜냐하면 소련의 공군지원이 여의치 않게 됨에 따라 제1선 동북변방군의 북한진입이 확정되지 않았고, 연쇄적으로 제2선의 병력도 이동을 할 수 없어 毛澤東이 북상을 보류시켰기 때문이다.
제9병단은 제94사단 외에도 몇몇 후미 부대는 그대로 上海의 華東지역에 체류했다. 이동이 중지된 부대들은 중국군의 자력 출병을 결정한 毛澤東이 10월 14일 다시 제2선 병력을 제1선으로 이동하기로 한 것을 재시도 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10월 28일부터 山東지역으로 이동했다.
제9병단의 예하 부대 전체가 지정된 지역에 집결을 완료한 것은 10월 29일이었다. 제9병단의 예하 부대들은 각기 도착과 동시에 차례로 정치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제9병단의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해 화동군구는 원래 중국국민당에서 기의한 부대로 조직한 제16병단의 부대번호를 폐지하고 그 장병들을 제9병단의 각 부대에 나누어 배분, 보강했다. 그 후 제9병단 전원은 11월 1일부터 兗州를 출발해 동북의 중북국경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제1선의 부대들을 지원할 예비대가 됐다. 선두로 출발한 제27군단은 11월 3일 안동에 도착했고, 나머지 2개 군단도 11월 상순과 중순에 모두 도착했다.
제3선의 병력이동과 배치는 다음과 같이 전개됐다. 제9병단이 제2선 집결지로 이동을 개시한지 4일 후인 10월 5일 楊得志는 毛澤東으로부터 직접 극비의 명령을 받고 자신이 지휘하는 제19병단 소속부대의 생산 및 기타 임무를 정지시킨 후 隴海線 연선지역으로 이동 집결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10월 22일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11월 20일까지 동북출발준비를 모두 끝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북군구 사령관 彭德懷는 毛澤東의 긴급 귀경 명령을 받고 북경으로 갔기 때문에 부재중이었다. 당시 제19병단 사령부는 西安에 위치해 있었고, 예하의 제63․제64․제65군단은 각기 陝西省의 省都인 서안 以西의 三原, 寶鷄와 寧夏 변계지역에 주둔 중이었다.
이 3개 군단 소속 9개 사단은 제63군단 예하 사단부터 순서대로 나열하면 제187․제188․제189․제190․제191․제192․제193․제194․제195사단 등이었다. 이 병단 소속 3개 군단 가운데 2개 군단이 지방경비와 생산임무를 맡고 있었다. 나머지 1개 군단은 隴海線 철도의 天水-寶鷄구간을 수리, 복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11월 20일 이전에 이미 출동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제19병단은 제9병단이 산동의 제2선 지역을 완전히 벗어난 뒤인 11월 22일 서안을 출발해 津浦線에 연결돼 있는 산동의 兗州, 泰安, 滕縣 등지에 집결했다.
이와 별도로 彭德懷는 鄧華, 洪學智 등 제13병단의 주요 지휘관들과 중국군의 입북방안을 연구한 후 10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작전계획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그는 毛澤東에게 2개 군단과 2개 포병사단을 우선 파병시키려고 했던 원 계획을 바꿔 제1선의 4개 군단과 3개 포병사단 전체를 10월 15일 출동시켜 10월 20일 혹은 늦어도 10월 22일까지 압록강 남단 북한의 지정된 지점에 집결시켜 적 섬멸 시기를 기다리겠다는 전술을 제시했다. 계획을 변경한 까닭은 미 공군의 공습으로 압록강 철교가 폭파되면 수송의 어려움으로 병력을 우세하게 집중시키기가 어렵게 돼 전기를 놓칠 것(失去戰機)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북경의 중공 수뇌부에서는 개입의 찬반을 두로 10월 1일부터 벌여온 격론 끝에 일차로 10월 6일 소련의 공군지원을 전제로 한 조건부 참전이 결정됐다. 그리고 毛澤東은 10월 10일 중앙군사위원회를 개최해 ‘항미원조지원군’으로 개편된 부대와 제9․제19병단 외에 서남군구에서 3개 군단 총 9개 사단을 선발해 1개 병단으로 조직한 후 1951년 1월까지 출동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또한 중남군구에서 2개 군단 6개 사단을 선발해 1951년 2월에 출동하도록 준비하고, 이와 별도로 17개 보병사단을 선발해 포병부대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했다. 毛澤東은 10월 11일 4개 군단을 모두 북한으로 진입시키자는 팽덕회의 상기 전술방침을 승인한 후 그날과 이튿날 2차에 걸쳐 화동군구 사령관 陳毅에게 제9병단의 북상을 앞당겨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毛澤東의 기본적인 의도는 제13병단을 주력으로 한 5개 군단의 첫 번째 작전부대가 북한으로 진입하면 즉시 산동의 제2선에 집결중인 제9병단을 동북변방군이 원래 주둔한 지역으로 북상 진입시켜 제13병단의 제2선 부대로 삼고, 수시로 한반도 전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또 제9병단의 이동과 동시에 제3선 부대로서 제19병단도 동쪽으로 이동시켜 원래 제9병단이 주둔한 산동지역에서 정치 군사훈련을 실시케 하는 등 참전에 대비했다.
제2선과 제3선 부대배치의 기동지역으로 산동성의 濟南, 泰安 일대를 선정한 것은 이 지역이 서북의 蘭州를 종점으로 하는 隴海線이 津浦線에 연결되고, 津浦線을 이용하면 북경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원지역에서 津浦線의 德州-天津-唐山-秦皇島市-錦州를 거쳐 한반도전선의 후방근거지인 瀋陽에 이르는 최단거리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 해군 수송선만 확보된다면 泰安에서 철도로 산동반도의 烟臺까지 가서 해로로 남⋅북한의 지정된 지점 혹은 압록강 하구의 안동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毛澤東이 후속부대를 중원지역에서 북경을 거쳐 동북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교통의 요지인 河南省의 鄭州에 집결시키지 않았던 까닭도 鄭州는 東北 혹은 華東지역으로 기동하기가 山東의 이 지역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기 때문인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동시에 산동지역은 화동의 상해와 福建을 방어하거나 혹은 臺灣을 공격할 경우에도 鄭州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徐州-南京-上海로 직입할 수 있고, 또한 隴海線의 동쪽 종착역인 連雲港을 통해 해로로 일거에 福建省의 廈門, 金門島, 福州까지도 남하가 가능하다.
따라서 화이팅(Allen S. Whiting)이 지적한 바 있지만, 중국 지도부가 산동지역으로 병력을 이동, 대기시킨 조치는 한반도나 대만과 관련된 유사시에 대비한 다목적 군사준비로서 기동력을 최대한 확보하려 했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북경이 평양을 지원하기로 결정할 경우 산동의 지리적 위치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지상 혹은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혹은 중국국민당군의 화동 연해지역에 대한 군사공격에 대해서도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毛澤東이 대만공격을 재개하기 위해 浙江省과 福建省으로 남하시킨다면 신속하게 공격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는 만큼 공수 전환이 용이한 곳이었다.
중국 지도부는 이 같은 군사배치를 통해 만일의 유사시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전략적 기동력을 유지해 東北의 중북국경지역의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만일의 경우 동북변방군을 한반도로 진입시켜야 할 경우를 대비해 지속적인 후속지원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전략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5. 맺음말
신 중국 건국 후 毛澤東은 전국적 차원에서 국방 군사 배치를 재조정하면서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중핵지대라고 할 수 있는 天津-北京, 上海, 廣州를 중심으로 한 세 권역을 중국 국방의 중점 지역으로 설정했고, 군대배치와 운용도 그에 부합되도록 조치했다. 이 때 중국대륙 내 잔류중인 중국국민당군의 섬멸과 대만해방작전을 고려해 중국인민해방군 병력 390만 명 가운데 약 70%에 해당하는 병력을 남방에 포진시켰다. 반면 북경의 안전에 직결되는 동북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만 배치했다.
동북지역의 군 병력은 이 지역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동북군구의 예하 6개 경비사단과 일부 지방부대 약 10만 명과 동북으로 이동해와 농업생산에 종사하던 원 제4야전군 소속 제42군단, 그리고 정치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던 일부 포병부대와 기병부대들을 모두 합쳐봐야 총 22만8,000명에 불과했다. 수도와 화북지역의 방위 문제는 중국 내 어느 방향으로도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국방전략예비대를 편성해 河南省 지역에 주둔시켜 남쪽과 북쪽 양방향으로 기동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에 촉발돼 미국이 즉각 군사적으로 개입해옴과 동시에 미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진주시키는 등 중국 주변의 안보환경이 크게 변화하자 毛澤東은 미군이 북한을 거쳐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진격해올 것으로 예단했다. 이에 따라 그는 먼저 미군의 중국진출을 대비하고, 미군에 대항할 북한정권을 지원할 준비를 갖춰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기민하게 대응했다.
중공 지도부는 毛澤東의 지시로 소집된 1950년 7월 10일과 13일 두 차례의 국방군사회의의 결과 중국군 가운데 최정예부대인 제4야전군 예하 제13병단을 중핵으로 4개 군단 3개 포병사단, 고사포병, 기병, 공병, 자동차병 등의 9개 연대 총 25만 여명으로 동북변방군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毛澤東의 편성지시가 떨어지자 각지의 해당부대들은 바로 7월 15일부터 주둔지를 출발해 대략 8월 중순을 전후로 동북지역 압록강 대안의 安東, 鐵嶺, 遼陽, 通化, 豊城 등지에 배치됐다. 요컨대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중북 국경지역으로의 배치는 방어와 개입을 동시에 고려한 대응이었으며, 이 때부터 전략적 후방으로 간주돼 오던 동북지역이 일약 국가안보의 전진기지로 바뀌게 됐다.
毛澤東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부와 동북변방군의 야전 사령관들의 건의를 검토한 후 제2차로 중국인민해방군 후속부대들을 이동케 한데 이어 동북변방군을 지원할 세 번째 후속부대들을 이동시켰다. 8월 19일 동북군구로 배속키로 결정된 제50군단이 원 주둔지인 中南軍區에서 북상을 개시해 9월 6일에 동북지역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제3차로 제9병단과 제19병단이 각기 9월 중순과 10월 초순에 산동성의 기동지역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이 때까지 중북 국경지역으로 이동한 병력규모는 먼저 이동돼 온 4개 군단에다 추가로 이동돼 온 제50군단을 합쳐 5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 등이었다.
그 후 중공 수뇌부는 일차로 참전을 결정한 후인 10월 10일 중앙군사위원회를 개최해 ‘항미원조지원군’으로 개편된 부대와 제9․제19병단 외에 서남군구에서 3개 군단 총 9개 사단을 선발해 1개 병단을 조직하고, 중남군구에서도 2개 군단 총 6개 사단을 선발해 각기 1951년 1월과 2월까지 출동준비를 마치기로 결정했고, 동시에 17개 보병사단을 선발해 모두 포병사단으로 전환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말하자면 기존의 제9․제19병단 외에 군구병력 가운데 재차 총 32개 사단을 더 차출해 이른바 ‘抗美援朝 志願軍’을 증강시킨 것이다.
총괄하면, 동북변방군은 1950년 7월 편성 초기의 25만 여명 수준에서 한반도 군사개입 가능성이 점고됨에 따라 북한으로 출동하기 직전까지 부대를 개편해 총 70만 명 수준으로 증편해 이동시켰고, 12월 하순에 이르러 이 병력을 제2선과 제3선에 걸쳐 한반도에 축차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준비를 완료했다. 즉 毛澤東은 중국인민해방군 전체 병력 가운데 약 100분의 18에 해당하는 병력을 중북 국경선에 집중 배치시켰던 것이다.
중국군의 사전 이동과 관련해 전후 중국인민해방군의 동향을 깊이 추적한 바 있는 그리피스는 중국군의 동북지역및 산동지역의 집결이 이뤄진 것은 1950년 5월과 7월 사이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종래의 이 견해와 달리 중국군의 이동 및 증강은 7월 14일부터 북한 진입 후인 동년 12월까지 계속적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毛澤東은 당시의 수송력 상황을 고려해 중국군을 세 단계로 나눠 이동 배치시켰고, 그의 기본적인 의도는 제13병단을 주력으로 한 5개 군단의 첫 번째 작전부대가 북한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면 즉시 제2선에 집결중인 제9병단을 산동에서 북상시켜 동북변방군의 원래 주둔 지역에 진입시켜 제13병단의 2선 부대로 삼고, 수시로 한반도 전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또 제9병단의 북상과 동시에 제19병단도 이동시켜 원래 제9병단이 주둔한 산동지역에서 정치 군사훈련을 실시케 함으로써 제3선 부대로서 참전에 대비케 했다.
제2선과 제3선 부대배치의 기동지역으로 산동성의 濟南, 泰安 일대를 선정한 것은 이 지역이 서북의 蘭州를 종점으로 하는 隴海線이 津浦線에 연결되고, 津浦線을 이용하면 북경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원지역에서 津浦線의 德州-天津-唐山-秦皇島市-錦州를 거쳐 중북‘전선’의 후방근거지인 瀋陽에 이르는 교통로 중 최단거리에 위치한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 해군 수송선만 확보된다면 泰安에서 철도로 산동반도의 烟臺까지 가서 해로로 남․북한의 지정된 지점이나 혹은 압록강 하구의 안동으로도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중국 수뇌부가 이 같이 군사배치를 재조정하고 중북 국경지역에 군사력을 대거 집중시킨 것은 유사시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전략적 기동력의 유지와 지속적인 후속지원 능력을 확보해놓음으로써 중북국경지역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동북변방군을 한반도로 진입시켜야 할 경우를 대비해 전략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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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논문은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에서 발행한『軍事硏究』, 제122집(대전 : 2006년 12월 26일)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