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유럽의 일본연구 선구자 시볼트와 근대 일본

雲靜, 仰天 2024. 12. 29. 13:06

유럽의 일본연구 선구자 시볼트와 근대 일본


나가사끼(長崎)에서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은 뭐니뭐니 해도 원폭투하기념관과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였다. 이곳은 모두 일본 근대사를 관통하는 지역이자 주제들이다. 원폭투하와 하시마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고, 하시마는 조선인의 징용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수년 전 영화 군함도를 본 바 있어 더욱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가사끼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시마를 가기 위해서 관광안내소에 표를 알아보러 갔다. 그러나 그 다음날 비가 내려 모든 배편이 출항할 수 없다고 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목적지인 원폭기념관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 원폭기념관에 관한 감상과 소견은 별도의 장에서 소개할 것이다.

원폭기념관을 나오니 거리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 나가사끼가 “비의 도시”라는 소릴 들은 바 있다. 돌연 머릿속에 “나가사끼는 오늘도 비가 내린다” 라는 일본 유행가 가사가 떠올랐다. 처연함을 느끼게 하는 겨울 보슬비속을 걸어 전차를 타고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에도(江戶)시대에 일본에 살면서 많은 삶의 족적을 남긴 독일인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 기념관이었다.

시볼트는 누군가? 일본인들 중에도 그를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서양 근대사나 독도의 역사에 밝은 이라 해도 지난 세기 50년대 초엽 샌프란시스코 조약 전후 일본에 유리하게 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오늘날 독도의 일본영유 주장에 근거가 되도록 한 내용이 있음)이 체결되도록 힘을 쓴 윌리엄 시볼트가 아닐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미국인 시볼트가 아니다. 독일 국적의 시볼트다. 미국인 시볼트는 일본인 아내를 둔 미국의 친일파 외교관(주일 미국대사 지냄)이자 정치인이었지만 독일인 시볼트는 의사이자 식물학자, 박물학자였다. 후자는 세시풍속과 일본인들의 심성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의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서양사회에 소개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가히 문화인류학자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는 에도시대 후기인 1828년 그가 국방상의 이유로 일본 국외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大日本沿海輿地全図”(伊能図) 등을 반출하려다 발각되어 국외 추방 처분을 받은 것으로 일본사의 한 켠에도 기록돼 있다. 일본사에선 이를 “시볼트 사건”이라 부른다. 시볼트에게 지도를 선물한 막부의 書物奉行 겸 天文方筆頭  다까하시 케이호(高橋景保)를 비롯한 다수의 관계자, 난학자가 막부에 의해 처벌됨에 따라 이 사건은 만사의 옥에 앞서는 난학자(네덜란드학을 연구하는 학자) 탄압 사건이 된 바 있다. 에도 막부에서 이 시기 난학자를 탄압한 곡절이 단순한 게 아니어서 이 글에선 설명을 생략한다.

시볼트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의 이정표
과거 시볼트가 살았던 집터의 넓은 공간 입구에 세워져 있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푸른 이끼가 오랜 세월을 감지케 한다.
옛날 집터 바로 아래쪽에 있는 시볼트의 흉상
시볼트 흉상. 얼핏 보면 누구와 닮았지 않는가? 파우스트의 괴테?
시볼트의 초상화. 한창 일본 연구에 열정을 불태웠던 30대 초반 경이었다고 한다. 카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가 그린 이 작품 원작의 복제품은 나가사끼 현청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시볼트가 거주하면서 진료소로도 사용한 나루따끼(鳴滝) 숙사(정면의 기와집). 1860년 시볼트가 다시 일본에 왔을 때 직접 찍은 사진이다.
시볼트가 유럽에 출판한 그의 저서, 그가 관찰한 일본의 다양한 것들이 소개된 박물지 같은 이 책은 근대 일본 연구에 귀중한 사료 가치가 있다.
의사였던 그는 동식물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시볼트가 관심을 갖고 관찰, 연구한 분야들인데 인체의 해부학에서부터 악기, 무기, 풍속, 문화, 종교, 정치 심지어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관심 영역이 가히 박물학적, 문화인류학적 범위다.
시볼트가 사용하던 미국제 청진기. 막부 말기 경 일본에 수입되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청진기는 시볼트의 문하생 타께야 겐류우(武谷元立)의 자손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개인 소장자가 이곳 기념관에 기탁한 것이라고 한다.

1829년 9월 15일 시볼트에게 막부의 추방령(國禁)이 전해졌다. 그는 폭포와 이네의 미래를 고려하여(滝といねの将来を案じて) 재산을 남겨놓고 코우료우 사이(高良齋)와 니노미야 케이사꾸(二宮敬作) 등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문도들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그해 12월 30일 이른 아침 그를 태운 네덜란드 여객선은 엄중한 경계 속을 벗어나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로 향했다. 슬프게도 쓰라린 이별의 날이었다. 그 후 옥사한 타카하시 케이야스(高橋景保)를 비롯해 그간 시볼트에게 협력한 많은 조력자들까지도 막부에 잡혀 처형됐다. 일본의 근대화 도정에 빛의 산실이 되면서 많은 영재를 길러낸 나루따끼(鳴滝) 숙사가 이렇게 해서 해체되었던 것이다.

그뒤 시볼트는 자신이 그리워한 일본에 다시 발을 디뎠다. 1859년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를 거쳐 나가사끼에 도착한 그는 혼렌지(本蓮寺)의 이찌죠우잉(一乘院)에서 기거했다. 이때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듬해 그는 나루따끼(鳴滝)로 이사를 갔다. 막부로부터 일본체재를 허락 받았다. 1861년 그는 막부의 초청을 받고 에도에 가서 막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고문직에서 해고되고나서 요꼬하마(橫浜)로 갔다. 66세가 되던 1862년 시볼트는 나가사끼로 돌아왔다가 바타비아를 경유해서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859년 63세 때의 시볼트(좌) 시볼트 부자(1861년). 그가 재차 일본에 왔을 때다. 장남 알렉산드로와 함께(우)

내가 시볼트 기념관에서 시볼트 관련 사실들 그리고 에도시대 일본의 사정 외에 거둔 망외의 수확도 있다. 카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가 그린 연날리기(Kite flying) 작품을 발견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겨울이면 일제 때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일본어로는 연날리기를 하타아게(凧揚げ)라고 한다. 이곳의 설명에 의하면, 나가사끼에선 봄에 행하는 전통적인 행사였다고 하는데 통상 아이들이 야산에서 연을 날리면서 연줄에 유리가루를 입혀서 다른 아이의 연줄을 끊는 놀이를 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런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나도 어릴 적 겨울에 바람이 부는 날에 연을 날리면서 연줄 끊어먹기 놀이를 하고 자랐다.

아뭏든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의 일본 체류 및 그와 일본과의 관계를 깊이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개괄적으로 스케치해봤다.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식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그에 관한 것들은 여기서 내려놓고 지금부터는 다음 행선지에 집중할 것이다. 가고시마여 기다려라!

2024. 12. 29. 11:27
우또발 가고시마행 신깐센 열차 안에서
雲靜 초고

카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의 연날리기 그림 작품. (복제품). 이 작품 소개문에는 작품 크기, 재료에 관해서는 전혀 소개가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안료로 그린 일본화 같아 보인다. 수채화 같기도 하지만 유화는 아닌 것 같았다. (원자료는 라이덴 국립민족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