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음악 가요

명국환의 엘레지(élégie) '방랑 시인 김삿갓'과 '백마야 울지마라'

雲靜, 仰天 2024. 11. 5. 22:33

명국환의 엘레지(élégie) '방랑 시인 김삿갓'과 '백마야 울지마라'


2023년 8월 19일, 원로 가수 명국환 선생이 작고했다. 향년 96세였다. 최근 몇 년간 티비도 보지 않고 제때 뉴스를 접하지 않고 살다 보니 뒤늦게 우연히 알게 되었다. 고인은 돌아가시기 전에 홀로 외롭게 양로원에서 투병생활을 했다고 한다. 퍼뜩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가요계에서 노후에 혼자 남아 어렵게 지내는 원로 가수들을 도울 수 있는 복지책이 마련되면 좋겠는데 고인의 타계가 그 계기가 되면 좋지 않을까 싶다.

1927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난 명국환 선생은 한국전쟁 발발 후 남한으로 피난 와서 한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해서 전공을 세우고 전역 후 가수로 데뷔한 실향민 출신이었다. 1954년, 선생이 자신의 아픔이기도 한 실향민들의 공유된 정서가 담긴 가요 '백마야 울지마라'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가수 데뷔곡이었다. 이 노래의 히트에 이어 1955년에 부른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도 히트를 쳤다. 또 그 뒤 '아리조나 카우보이'도 호평을 받아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힌 바 있다.

상기 노래들에서는 명국환 선생만의 독특한 창법이 돋보인다. 마치 일제시대 말기의 가수 고복수, 남인수 류의 창법이 연상되는 특이한 음색이다. 성악가나 직업 가수는 음악의 기본적 능력 외에 자신이 부르는 곡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생명이다. 해석에 따라 가수로서의 급이 정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의 음색과 창법이 이 두 곡에 대한 해석이고, 그것이 명국환을 명국환 다운 가수로 만든다. 흉내내기가 쉽지 않다. 이 노래는 곡이 흥겨워서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고 싶어진다.

곡도 좋지만 무엇보다 나는 가사에 끌린다. 가사가 한 편의 시 같기도 하고 부서지는 황혼 속을 초연히 걸어가는 자의 영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예술은 시대의 반영이다. 이 두 곡도 요즘 나오는 대중가요와는 멜로디와 가사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 당시 1950년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와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가사에는 고향을 여읜 실향민의 애수가 있는가 하면, “인생을 새 희망에 바라며 살자”고 했듯이 희망도 감지된다.

다른 한편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자신을 보는 거 같아서 이 두 곡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우수에 젖게 된다. “가을 벌판에 날은 저문데 주막은 멀고 백마야 울지마라!” 천지가 어둠으로 사위어 가는데 말에 올라 홀로 황야를 가는 객의 심정은 어떨까? 이 대목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 자신이 백마 타고 가는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인간은 저마다 심연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빠져 의미가 선연치 않는 자맥질을 쉼없이 반복하는 존재인 한 모두가 가을 벌판에 홀로 가는 백마이기도 하다.

“벼슬도 버리고 죽장에 삿갓쓰고 이 거리 저 마을로 방랑하는 자, 흰구름 뜬 저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김상갓 김병연, 내가 조선의 3대 풍자 시인 중 첫 손에 꼽는 최고 가인이다. 그의 가슴 저린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노래가 늘 절절하게 다가온다. 가사에 김삿갓의 삶을 영상으로 보는 듯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다만, 가사 제3절의 첫 구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중 “사랑에 지치었나”로 표현한 것은 김삿갓의 인생역정과 고뇌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온 오류 같다. 모른 체해도 될 옥의 티다.

혹시 김삿갓 노래를 듣다가 김삿갓이라는 인물과 그의 삶에 관심이 있으면 아래 졸고를 보라. 그가 과거에 급제해 입신 출세가 보장됐으면서도 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유랑의 삶을 택하게 됐는지 기구한 운명과 비통한 곡절을 이해할 수 있다.

https://suhbeing.tistory.com/m/966

깊어 가는 이 가을날, 늦게나마 백마를 타고 홀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또 다른 김삿갓의 죽음을 기린다. 생전에 노래하던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있어 천상에서도 혼자가 아닐 것이며,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4. 11. 5. 10:28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아래에 '백마야 울지마라'와 '방랑 시인 김삿갓' 두 곡의 가사를 붙여놨다. 가사를 보면서 이 노래들을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백마야 울지마라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데
거칠은 타관 길에 주막은 멀다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또 다시 고향 생각 엉키는구나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고향을 등에 두고 흘러가기는
내 신세 네 신세가 다를 게 없다
끝없는 지평선이 고향이거니
인생을 새 희망에 바라며 살자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https://youtu.be/PdJ6VpEHemI?si=98U9nSrpNz9mKmDp

방랑 시인 김삿갓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봇짐 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 해던가
석양 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https://youtu.be/zcIQIypWCU8?si=gGQNJXemGUg5Gork

'방랑 시인 김삿갓'은 주현미가 부르는 노래도 들어볼만 해서 곁들인다.

https://youtu.be/2o3OsyHHMKY?si=wrY7I3GJ9hT9vu3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