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원래부터 잔인했을까?
일본군은 원래부터 잔인했을까?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군이 중국, 동남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적군이나 현지 민간인에게 가한 악랄한 만행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잔인한 지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일본군은 원래부터 잔인했을까? 그것은 타고난 천성이었을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었을까?
일본군이 저지른 잔인한 만행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은 1937년 12월의 ‘난징(南京)대학살’이다.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자 1주일간 집중적으로 약탈, 방화, 부녀자 겁탈, 윤간 그리고 패잔병, 포로, 일반 시민에 대한 폭행, 고문, 살해, 매장을 일삼았다. 사기를 높이고 적개심을 고취시킨다는 명분하에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라고 허락한 것이었다.
그 후에도 만행은 2개월이나 더 지속됐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누가 더 많이 아녀자를 겁탈하느냐, 누가 더 많이 군도로 목을 베느냐하는 겁탈경쟁, 살인경쟁이 벌어졌다. 부녀자 겁탈은 8세 유아부터 70세 된 노인에 이르기까지, 또 학생에서 비구니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의 전 기간 동안 겁탈 당한 여성은 총 8만 명에 달했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부녀를 겁탈한 후 총이나 군도로 죽이지 않고 반드시 총이나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목베기시합, 여성 강간, 윤간, 폭행, 학살 등 잔인함의 극치를 이루는 온갖 잔학행위는 난징을 형언 불가의 참극이 벌어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영국 신문기자 팀플레이(H. J. Timperley)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보게 된 살아있는 지옥”, “그 야만의 정도는 유럽 중세 암흑시대의 야만행위를 능가”한 사건으로 묘사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의 만행에 죽은 사망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30만 명 이상이었다.
그러면 일본군 장병들은 악행을 거부할 이성력이 없었을까? 그들은 모두 타고날 때부터 생득적인 악마의 화신들이었는가? 일본군 병사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고한 시민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강간하고 살해한 원인을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첫째는 군 최고 통수부의 난징대학살이 곧 거부할 수 없는 ‘천황’의 성지를 받든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대본영은 30여만 명의 병력을 투입한 상하이(上海) 점령에 이어 1937년 12월 수도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난징공략에 전력을 다하도록 현지 군 지휘부를 독려했다. 항복요구에 거부하고 장기 항전의 의지를 보였던 중국국민당군에 본때를 보여줄 요량이었다. 일본군은 난징점령으로 중국군의 사기 및 전투의지 저하라는 심리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봤다.
화중방면군 제10군 사령관 야나기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는 휘하 장병들에게 “산천초목이 모두 적”이라고 적개심을 고취시켰고, 마쯔이 이와네(松井石根)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도 “남김없이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발포했다. 현지 군 사령관의 학살명령은 일본군 최고 수뇌부의 의향을 받든 것이었고, 그것은 곧 ‘천황’의 성지에 다름 아니었다.
1882년에 공표된 이래 줄기차게 일본군에 주입된 군인칙유, 전진훈(戰陣訓) 따위엔 “상관의 명령은 곧 짐(朕)의 명령이라고 명심하라”고 돼 있었다. 당시 히로타 코우끼(廣田弘毅) 외무대신도 난징으로부터 각종 천인공노할 일본군의 만행에 관해 즉각적으로 보고를 받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천황’의 성지를 받든 군부의 독주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황이라는 이름이 보편 일본인 개개인의 마음 속에 거역할 수 없는 ‘황명’으로 각인된 시대적 분위기에서 일개 병사나 장교들이 누가 감히 천황의 성지를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거역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적극적으로 명령을 수행하고, 이것이 결국 충성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충성 경쟁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둘째는 일본 사회 내에서 수백 년간 지속돼 내려온 촌락공동체의 생활행태에서 형성된 집단의식이 가져다 준 수동적 행동양식과 죄의식의 마비도 한 요인이었다. 일본인이라고 해서 모두 生得的인 악인은 아니다. 당시 일본군 사병들은 일부 하급 사무라이(足輕 아시가루) 출신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농촌에서 징발당한 순박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입대 전 쉬이 상황논리를 수용하고, 언제라도 악과 타협할 심성과 정신성이 인자화 되게끔 만드는 수동적 문화, 즉 이른바 ‘무라하찌부’(村八分)라는 공동체 문화 속에 살아왔다.
무라하찌부란 농촌과 어촌 등지의 지역사회에서 유력자의 의사나 비위에 거슬리거나 마을 전체의 공동 의사에 반하는 일탈행위를 하는 자에겐 장례, 화재시 소화, 성인식, 결혼식, 출산, 발병, 주택의 신개축, 수해, 해마다 치르는 불교법회(年紀法要), 여행 등 일상의 열 가지 중요한 일 가운데 장례와 불 끄는 일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8가지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집단으로 따돌리는 조직문화다.
무라하찌부는 단기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생성된 것이다. 고대로부터 일본인은 마을 공동체와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나 무리 중 우두머리에 복종하고 따르는 문화가 형성돼 왔다. 우리가 잘 아는 ‘왜(倭)’라는 말은 왜소하다는 의미 외에 우두머리를 뒤따른다는 뜻도 있다. 이 행동양식은 A.D3세기 일본을 방문한 중국 진나라 사신(陳壽)에 의해 중국 황실에 일본인의 주요 특징으로 보고된 바 있다.
오늘날 여행지에서 일본인들이 깃발을 든 인솔자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 일본의 이러한 무리 문화의 잔영인 것이다. 사무라이 계급이 형성된 이래 무사들이 그 아래 계급인 농․공․상인들을 칼로 통치함에 따라 엄격한 수직문화가 형성돼 왔다. 그 정점에 천황이 존재했다.
무라하찌부는 형태가 변했을 뿐 현대 일본사회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것이고, 그 현대적 변형이 일본사회의 소위 ‘이지메’행위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에도(江戶) 시대 3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자아의 존재감을 집단귀속에서 찾았으며, 자신의 행위를 집단화하면서 집단과 조직 속에 개인을 매몰시켜버리는 몰개인적, 몰개성적으로 살아왔다.
더구나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후방으로 배치돼 치료와 휴식, 무기 장비의 정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지휘부는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조치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오로지 정신적으로 버티고 이겨내라고만 했다. 그러니 병사들에게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얼마나 많은 고충과 시달림이 있었겠는가?
이런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들이 황군의 군인신분이 되고 특히, 해외에서 침략군의 일원이 돼 집단적으로 승전분위기에 휩싸이게 됐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했을지 상상해 보라. 더군다나 당시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 ‘조센징’(원래 조선인을 가리키는 가치중립적인 고유명사이지만 이 말에는 조선인을 무시하는 의미가 있음), ‘짱꼬로’(중국인을 무시하는 별명인 ‘짱꼴라’의 일본식 발음)와 같은 식으로 피점령 국민을 얕잡아 보고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가히 그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 떼가 아니었겠는가?
일본속담에 익명성이 보장된 “낯선 타지에선 무슨 짓을 하든 개의치 말고 부끄러워 말라”(旅の恥はかき捨て)는 속담이 있다. 이 말처럼 일본인은 타지에서 행하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짓에 대해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죄의식이 보송보송해진다. 더욱이 그들은 모두 국가, 군대라는 조직에 수직적으로 귀속돼 있는 상황이었으니 개인 일탈행위의 책임을 천황과 일본정부 및 군대라는 집단에 미루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상부 혹은 상관의 지시를 받아 집단으로 행한 것이니 죄가 될 게 없다는 인식이었다.
물론 병사들 중에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타율적 규율에서 오는 강박감, 혹은 일본사회 특유의 계급적 모순(즉 장교, 하사관 및 사병들 간에 입대 전 출신계층간의 괴리와 위화감)에서 비롯된 고충과 불만을 엽기적 범죄로 해소하려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일본군은 태어날 때부터 잔인한 것은 아니었다. 즉 잔인함이 선천적인 것은 아니었고, 후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던 상황에 따라 잔인해졌는데, 군국주의의 억눌린 전체적인 분위기와 천황절대주의가 판을 친 전쟁에 내몰려 자신의 생존을 먼저 생각해 부득이 집단적인 명령과 분위기에 따르고 편승할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의 결과였다.
지금도 일본에는 그러한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가 지속되는 상황이지만 만약 전쟁이라도 발생하면 천황의 권위와 성지는 다시 발동되고 국민 전체가 절대자를 만들어 그에게 스스로 거부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일본적인 행동양식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극악무도한 만행은 전쟁수행과 전과에 효과가 있었을까? 답은 “전혀 없었다”다. 오히려 역효과가 더 컸다. 일본군은 만행을 당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영웅적”인 잔학행위에 겁을 먹고 항복하고 두 손을 들 줄 알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일본인에 대해 피를 토하듯 중국인들의 적개심과 분노가 솟구쳤다. 중국인들은 같은 하늘 아래 일본인과는 같이 살 수 없다는 ‘불구대천’의 적이 됐다. 이는 지금도 중국인이 일본인을 믿지 않고 혐오하는 역사적 근거다. 중국인들은 민․군․관이 하나가 된 거국일치의 항전으로 종국에는 승리를 쟁취했다.
우리가 난징대학살에서 배워야 할 역사의 교훈은 전쟁에서 악랄한 비인도적 전쟁범죄가 결코 승전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즘 일본의 아베 신조 수상과 아소 타로(麻生太郞) 외무대신 등 일본 극우정치인들이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이웃 국가들에 대한 침략사실까지 부인하면서 전후 일본의 평화를 지탱해온 이른바 ‘평화헌법’을 고치려고 망발을 서슴지 않는 것은 선대 일본인의 이 같은 문화적 DNA를 물려받은 탓일까?
위 글은『국민안보FOCUS』, Vol. 30(2013년 7월)에 게재된 것인데, 일부는 가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