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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오늘의 역사 : 화가 이중섭 작고

雲靜, 仰天 2024. 9. 6. 07:42

9월 16일 오늘의 역사 : 화가 이중섭 작고


화가 이중섭은 사망 전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서대문구 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간염에서 악화된 간암이 사인이었다. 애석하게도 마흔 살이 넘지 않은 나이였다. 어떤 분야든 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열정을 뿜을 수 있는 연령대에서 멈춰 섰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1916년 9월 16일에 태어나서 1956년 9월 6일에 사망했으니 딱 열흘 빠진 40년을 살다 간 셈이다.


이중섭은 내가 비록 그림으로 밥벌이를 하는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화가로서 근현대 한국의 서양화가들 중에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 작가다. 이 반열에 드는 작가로는 북한엔 변월룡, 남한엔 이중섭 외에 박수근 등이 있다. 한때 북한이 천재 화가로 내세운 변월룡에 관해선 계기가 되면 다른 글에서 소개할 것이다.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박수근과 함께 이중섭은 한국의 강한 토속적 정서를 표현한 대표적 화가였다. 화가로서 그에게 따라다니는 이미지는 그가 많이 그린 소 작가라는 것 그리고 가난에 찌든 삶을 살다간 불우한 화가라는 것이다. 전자는 어쩌면 소가 자기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나의 이 상상이 적실한 평술로 실증되려면 이중섭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더 보고 천착하면서 규명해야 할 사안이리라.

암튼, 그는 어릴 적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소를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소를 통해 한국적인 미를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 이중섭이 소의 화가라는 이미지다. 소와 교감하고 소의 순하고 어진 면 그리고 평소엔 순종적인 동물이지만 일단 화가 나면 “성난 소”처럼 저돌적이 되는 소의 양면적이고 이가적인 면을 마음속에 내면화 해서 그것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움직이는 흰소, 싸우는 소(모두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소와 어린이, 황소(이상 개인 소장) 등에서 이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두번째 의문, 즉 왜 이중섭은 불우하게 살다 예술의 꽃을 만개시키지 못하고 요절하다시피 일찍 죽었을까? 미리 결론을 당겨 얘기하면 중섭은 태어나기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일제 때 아무나 갈 수 없었던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 시 월남하면서 가산을 가져올 수 없던 결과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오게 된 병환 때문이었다.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지금의 숙천군 송덕리)에서 2남 1녀 중 차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중섭의 부친 이희주는 부농이자 지주로서 상당한 부호였고, 중섭의 출생지인 송천리는 외가 안악 안씨의 집성촌이면서 외가 역시 상당한 부잣집이었다. 외조부 이진태가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평양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했을 정도로 유지 집안이기도 했다. 1920년에 중섭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상당한 부자여서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었다.

중섭이 그림 그리기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23년 그가 평양의 외가로 이주한 뒤 평양 공립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한 뒤부터였다. 이 시기 그림 재주가 탁월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재능을 알아주고 화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주거나 아니면 본인이 외부의 자극을 받는 계기 같은 게 있어야 했었다. 중섭은 후자의 경우에 가까웠다.

첫 계기가 된 것은 1925년이었는데, 소학교 동기인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의 작업실을 출입하면서 그곳에서 화구들과 당시 북한에선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미술잡지 '더 스튜디오(The Studio)'를 접하고 일차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6년 뒤, 그러니까 중섭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고 1년이 지난 1931년 그의 나이 15세가 된 그해에
오산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 임파 임용련(1901~?)에게 미술지도를 받으면서 “조선인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지론에 깊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임용련은 당시로는 정말 극히 드물었던 미국 예일대학 미술 전공 유학파였는데, 예술의 유일무이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강조한 셈이다.

이중섭은 벌써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서명까지도 항상 자기 이름을 풀어서 서명했는데 이런 것이 임용련의 영향이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의 작품들 한켠에 보통 'ㅈㅜㅇㅅㅓㅂ'이라고 풀어 쓴 서명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걸 말한다.

중섭의 그림 실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소학생 시절이 아닌,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중학생 시절부터였다. 1932년 제3회, 1933년의 제4회 전조선 남녀 학생 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연거푸 입선한 데에 이어 1935년의 제6회 작품전람회에서도 입선했다. 미술교사 임용련의 지도를 받은 결과이기도 했다.

제6회 전조선 남녀학생 작품전람회 입선작은 졸업앨범에 넣을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불덩이가 한반도로 날아드는 그림을 그린 것인데, 이것이 교사들 사이에서 논란이 돼 결국 졸업앨범에 반영하기로 한 것이 전격 취소됐다.

여담이지만, 필자도 중고등학교 시절 지역 규모의 미술사생대회에 나가서 최고상을 독점하다시피 한 바 있지만 몇 번 참가한 전국대회에는 특선이 고작이었는데 그 만큼 전국대회 입상은 쉽지 않다는 소리다.

이중섭이 미술에 실력을 드러내던 이 시기 가정적으로 변화가 있었다. 1932년 형 중석이 가족을 이끌고 원산으로 이사 간 것인데 중섭도 부모 역할을 한 형을 따라 갔다. 중석은 원산 최초의 백화점 겸 문방구인 '백두상점'을 열어 부를 일구었다. 중섭은 이 시기 구상(具常)과 친구가 됐다. 구상도 카톨릭 신부였던 형님을 따라 원산에 와서 살고 있었다. 이중섭과 구상 두 사람이 해방 후 남한에서의 객지 생활을 하면서 절친이 된 배경이었다. 후술하겠지만, 나중에 구상 시인은 이중섭 유고 후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친구에 대한 절절한 소회와 평가를 하게 된다.

1936년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굴지의 미술학교인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인 1937년 제국미술학교에 싫증을 느끼고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했다. 그가 화가로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대학에 재학하던 중 일본 미술계의 독립전(獨立展)과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여 입상함으로써 주목을 받은 이 시기였다. 그는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과 1943년 연이어 출품한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서도 각기 협회상과 태양상(太陽賞)을 받았다. 그 중간 1941년엔 미술창작 작가협회전에서도 입선했다.

일제 패망 후 1945년 귀국한 이중섭은 원산에서
일본인 야마모토 요시꼬(山本方子)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그 이듬해엔 원산 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교편도 잡았다. 이때가 이중섭에게 생활면에선 가장 안정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1948년 북한 건국 후 이중섭은 한 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권에 대한 기대와 젊은 열정으로 조선미술건설본부 등에 활동하면서 노동당동맹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된지 오래지 않아 바로 깨졌다. 무엇보다 피부로 와닿았을 정도로 작품 창작 면에서 많은 제한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 치하의 문학, 예술은 레닌과 소련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모두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도구나 선전수단이 돼야 했다. 소위 프로문학과 예술이 전부였던 그 시기 자유로운 창작은 반동의 불경죄 그 자체였다. 이중섭이 친구 구상 시인과 함께 구상의 시집『응향(凝香)』의 표지그림을 그렸다가 두 사람 다 노동당 당국으로부터 치도곤을 당하면서 호되게 비판을 받은 사실이 당시의 사정과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예술 창작은 무엇보다 외적 조건으로 제비처럼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야 제대로 발현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중섭이 본 당시 북한 상황과 그에 대한 대처는 같은 시기 같은 북한에서 공산체제에 순응하면서 소련 유학까지 가서 국가 화가로 대우 받는 등 큰 혜택을 입은 변월룡과 대비된다. 같은 서양화를 하면서도 서양 관련 사물을 화제로 삼지 않고 한국의 고유미를 화폭에 재현해야 한다고 본 점은 맥이 했다. 이 지점에서 변월룡을 논할 때 다시 이중섭을 소환할 것이다.

그런데 1950년 6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군사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남한에 대해 도발한 6·25전쟁은 이중섭의 운명을 급전직하로 떨어지게 만든 사건이었다. 기회는 이때였다. 삶과 예술의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한 그는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안착했다. 북에서 피난을 올 때는 모든 가산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험한 세파를 헤쳐나가려고 애썼지만 그의 삶이 고달파지게 된 계기였다. 사고무친의 남녘 땅, 그것도 전시의 외딴 섬 제주도에선 호구지책이 있을 리 없었다. 끼니 떼우기 조차 어려울 정도의 생활고가 지속되자 이중섭은 제주도를 떠나 다시 부산으로 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 도꾜로 되돌아 갔다.

홀로 남게 된 이중섭은 부산과 충무(현 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모든 이들이 어려운 시절에 그라고 나아질 건 없었다. 생활 면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사후에 인정 받게 되는 예술이 활짝 꽃을 피게 됐다. 지금 후대인들이야 역설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배를 굶는 걸 밥 먹듯이 한 이중섭에게 예술은 호구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밥벌이라곤 전쟁통인 1952년에 잠시 국방부 정훈국의 종군화가단 단원으로 일한 게 거의 전부였다.

삶의 호구책이었든 아니면 예술 자체를 희구한 창작의 목마름에서 발현된 것이든 부산 피난 시절에도 이중섭은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동기를 유발시킨 것이 박고석, 한묵, 이봉상 등의 화단 작가들과의 만남이었다. 이중섭은 이들과 같이 기조전(其潮展)을 창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신사실파에도 참여하게 됐다. 이 시기 그가 충무, 서울, 대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눈물 겹고 인간적인 일화와 이중섭 특유의 개성이 강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그가 선호한 화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등이었는데 이걸 그린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아마도 외로움, 가족을 그리워한 그리움이 소나 어린이 같은 천진무구한 자신의 심성에 각인된 탓으로 보인다. 이밖에 적지 않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
불상, 풍경 작품도 그렸다.

1953년 이중섭은 가난과 고독에 찌든 상황에서 일본에 가서 잠시 가족들을 만났지만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해버렸다. 그 뒤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쪼들리는 속에서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그리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중 결국 1956년 9월 적십자병원에서 영양실조와 간암으로 외롭고 곤고한 생을 마감했다.

천재 화가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마흔도 넘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지만 그의 예술은 이 땅에 반영구적으로 남아 있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던 작품들이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지인들에 의해 회고전이 열리고 점차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먹고 살만한 때가 된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그의 유작들이 발굴됨과 동시에 집중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작품의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 개최한 유작전과 화집 발간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많은 작가론과 함께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과 연극도 상연됐다.

이중섭은 살아 있을 땐 그림이 팔리지 않다가 사후에 작품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 점에서 흔히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실 이 점 외에는 비교할 게 별로 없다. 가난과 비극성의 정도에서도 달랐고, 작품 경향이나 화풍의 특성도 많이 다르다.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빈궁하고 고독하게 살다가 결국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의 귀까지 자르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일제강점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돈 많이 드는 일본 유학을 가서 결혼해서 가정까지 이룬 이중섭과 많이 다르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이 좁은 공간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논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다만 앞서 얘기한 바 있듯이 오늘은 이중섭 작품에 나타난 소재상의 특징을 반복하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흰 소’나 ‘천도화와 어린이들’에서 볼 수 있듯이
원초적, 동화적임과 동시 한국인의 정서상 공유하고 있는 향토성이 굵게 느껴지는 자전적(自傳的) 요소, 즉 자신을 구상화, 회화화 한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1978년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된 후 1990년대 이후에는 박수근과 함께 대한민국의 확고한 '국민화가'로서 평가되고 자리매김돼 있다.

끝으로 이중섭의 친구 구상 시인이 남긴 이중섭에 대한 평어와 필자가 몇 년 전에 쓴 졸시를 소개하는 걸로 이 졸고를 마친다.

“1.4후퇴로 남한 땅에 떨어져 죽기까지 불과 6년이라는 짧은 세월 속에서 실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 유화, 수채화, 스케치, 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은지화 등 대략 500점... 판잣집 골방,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노동을 하다 쉬는 사이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어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 충무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구상, 중앙일보(1986. 7. 12일자 보도)

https://suhbeing.tistory.com/m/1480

2024. 9. 6. 07:2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