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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오늘의 역사 : 니체와 징기스칸의 사망

雲靜, 仰天 2024. 8. 25. 11:46

8월 25일 오늘의 역사 : 니체와 징기스칸의 사망


8월 25일 오늘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깊고 길게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이 사망한 날이다. 몽골인들이 위대한 영웅으로 숭앙하는 징기스칸과 독일 철학자 니체가 그들이다. 징기스칸은 아시아를 넘어 멀리 러시아와 헝가리까지 침공해서 좋든 나쁘든 인류의 동서회통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징기스칸의 실물 초상화. 원본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몽골 울란바타르에 있는 징기스칸 초상화는 복사본이다.
유럽사상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역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 지성계에 엄청난 사상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훗날 유럽을 넘어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인들에게까지 사상적 회통에 일조했다. 나도 과거 20대의 젊은 시절 니체의 영향을 받은 바 있지만 오늘 여기선 그가 남긴 사상적 편린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징기스칸의 죽음에 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그는 어떻게 죽었고 그의 무덤은 왜 지금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을까? 그의 모든 얘길 하기엔 버겁고 그의 죽음과 몽골민족의 매장 문화가 오늘 얘기의 핵심이 되겠다.

“그대들이 의욕하는 바를 언제든 행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라.”-1900년 8월 25일 오늘 56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실존철학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무엇 보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은 19세기 유럽지성계를 강타했다. 당시 유럽의 사상가들이 놀라기는 징기스칸의 침공을 받은 슬라브민족과 마쟈르민족이 놀란 것만큼이나 강렬했다.

니체는 경제사정이 넉넉치 못해서 겨울에도 냉방에서 지냈고, 하루 걸러 찾아오는 위경련으로 와인 한 잔, 담배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다. 시력은 맹인에 가까웠다.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다 마침내 바이마르 시의 한 다락방에서 고열과 정신착란으로 세상을 떠났다.

니체의 때 고독감과 그리고 그로 인해 창조된 자신의 저작들은 그가 첫눈에 반한 러시아 퇴역 장군의 딸로서 고혹적인 미모와 지성을 갖춘 루 살로메에게 실연당한 것과 깊은 인과성이 있어 보인다. 사실 실연당했다기 보다 루 살로메가 니체의 친구인 정신과 의사 레를 선택한 것이었다고 하는 게 실상일 것이다. 처음 만난 세 사람은 함께 스위스로 여행을 떠나기로 해서 니체는 루 살로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잔뜩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런데 살로메와 레가 니체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여행을 떠났다. 니체는 이 사실을 안 뒤로 극심한 배신감과 고독에 휩싸인 삶을 살았다.

“병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나는 삶을 새롭게 발견했다.” “고통은 늘 원인에 대해 묻는다. 반면 쾌락은 제자리에 머물러 뒤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점점 더 섬세해진다.” “나는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삶을 잃을 수 있는 순간을 너무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권력에의 의지』,『비극의 탄생』그리고 현대 독일어로 된 가장 위대한 문학서이자 철학서로 꼽히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의 자비로 출판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의 독일어 음사인 짜라트스트라 어쩌고 하는 이 위대한 명저는 겨우 일곱 부가 팔리는데 그쳤다.

“운명이라는 망치가 그를 가혹하게 때리면 때릴수록 강건한 그의 의지는 맑은 음향을 내면서 울려 퍼졌다. ... 그는 더 큰 것, 더 강렬한 고난, 더 깊은 고독, 더 완벽한 고통, 그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원했다.”-슈테판 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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