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어떤가? 차이나타운의 광경을 연상시키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중국풍 가요 같지 않는가? 신미래라는 신세대 여가수가 이국의 분위기가 나도록 목소리와 동작을 잘 소화한 탓도 있지만 가사 또한 원래의 노래가 발표된 당시인 1950년대 홍콩의 밤거리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요 '홍콩 아가씨'가 발표된 1954년 전후는 중국 대륙에 이미 공산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래도 홍콩은 중공이 접수를 시도하지 않아서 영국이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전역을 손에 넣고도 홍콩과 마카오만은 점령을 명령하지 않았다. 홍콩과 마카오를 점령하면 영국과 포르투갈이 미국을 앞세워 또다시 중국으로 세력을 뻗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도 영국이 미국과 함께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 중국과 대적해도 마오는 홍콩을 그냥 놔뒀다. 사실 제국주의라고 질타하고 욕을 하고 했지만 마오쩌동은 195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과 영국 세력에 대해선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알르레기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아편전쟁(the Opium war) 이래 160년 가까이 영국이 홍콩을 통치함으로써 홍콩은 서양과 동양이 묘하게 습합되어 새로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20세기 3~40년대 아시아에선 동경과 상해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국제 도시였다.
그러한 홍콩이 배경이 된 이 곡은 발표 당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멜로디와 가사가 홍콩의 밤거리를 떠오르게 만들어서 이국풍을 맛보게 한 게 히트의 한 요소일 것이다. 아래에 붙여놓은 여러 장의 사진에서 보듯이 1950년대 홍콩은 중국인과 영국인을 비롯해 이 도시를 찾아오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시기엔 중공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려는 미국도 대중국 정보기관의 본부를 홍콩에 두고 운용했다. (따라서 그들이 획득한 중공 관련 자료들은 현재 중공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다. 내가 2000년 홍콩 中文대학에 방문학자로 가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인종의 도가니탕 같은 홍콩은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꿈과 희망, 환희와 비통, 실의와 좌절, 애환과 질곡이 교차하면서 현대적 면모가 나타나는 도시로 변화되기도 했지만, 그곳의 시장통이나 후미진 뒷골목들에는 여전히 전 근대적인 중국의 어두운 모습들이 많이 남아 온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를 상상해보라. 영란꽃을 사라고 호객하는 앳띤 소녀 나이의 꾸냥(姑娘)! 위 노래 가사 속에 나오는 영란꽃은 소담스런 은방울꽃의 다른 이름이고 “5월화”라 불리기도 한다. 나는 홍콩에서 직접 꽃 파는 아가씨를 접한 바 있다. 최초로 홍콩과 마카오땅을 밟은 1988년 1월, 그 뒤 1990년대 몇 차례의 홍콩 방문, 특히 2000년 중문대학에 방문학자로 가 있었을 때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홍콩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홍콩 서민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홍콩엔 길거리 곳곳에서 아열대산 꽃을 파는 아가씨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꽃 파는 여자들 중엔 20세 전후의 아가씨도 없지 않겠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래에서 풍기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다. 모두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생계를 위해 장사에 뛰어든 생업 전사의 아가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가씨라고 해서 님이 될 남자, 그것도 상류층 남자를 만나게 되는 걸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럴 수 있는 개연성도 있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혹시 어떻게 아는가? 프랑스 파리의 어떤 구두가게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첫눈에 반한 가게 여점원 아가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신지도 못할 숙녀화를 매일 하루에 한 켤레씩 사러가선 100켤레 째 살 때 청혼을 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 같은 남자가 홍콩의 꽃 파는 아가씨에게도 나타날지를! 그런 낭만파 신사가 나타나서 영란꽃을 몇 송이 째를 사고 가까워 지거나 운명이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다.
기가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 나는 여러 차례 홍콩에 갈 때 마다 홍콩아가씨라는 이 노래를 머리에 떠올리기도 하고 때론 야시장 같은 곳에서 한 잔의 술로 객수를 달랠 때 혼자서 '스잔나'라는 노래와 함께 이 노래를 읊조리면서 쓸데 없이 홍콩의 밤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일찍 호텔에 들어가서 잤을건데, 암튼 그 덕분에 홍콩사람이 아니면 경험하지 못할 도시 이면의 여러 가지 치부들도 접하게 됐다. 그때의 여행담을 얘기할라치면 또 다른 긴 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말이 나온 김에 아래에 첨부해놓은 사진을 중심으로 홍콩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물론 전문적인 소개는 아니지만 이것도 중국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겐 홍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익하진 않을 것이다.
중국이 오랜 제국의 깊은 잠에서 서구의 “堅船砲利”의 대포 몇 방에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연 게 1840년대 초였는데, 1842년 8월 남경조약(南京條約)으로 맨 처음 빗장을 푼 게 상해(上海), 영파(寧波), 하문(廈門), 복주(福州), 광주(廣州) 등 5개 항구 도시였다. 이 때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이른바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패전의 대가로 승전국인 영국에 배상의 조건으로 홍콩을 떼어주기로 약정한 남경조약이 맺어진 1842년 당시는 구룡(九龍)반도는 내주지 않았고, 그 반도의 남쪽 해안에 있는 홍콩섬만 넘겨준 것이다. 물론 나중엔 청조가 또 한 번 영국에 패함(1856년 10월~1860년 10월의 제2차 중국-영국 아편전쟁)에 따라 그 배상으로 구룡반도까지 다 영국에 넘겨주게 된다.(1860년 10월 24일에 '불평등조약'으로 체결된 中英 北京조약)
그 이후 홍콩은 대영제국의 일각으로 들어가 대중국 무역도시 기능을 함과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거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시키는데 창구나 통로 역할을 하게 됐다. 2세기에 걸친 서세동점, 제국주의시대의 산물, 중국인들이 치욕으로 생각하는 “半식민지”(중국인들은 과거 전통 시대 중국을 반식민지였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국가의 주권은 형식적으로 있지만 실제는 외국 세력에 각종 이권이 침탈당하고 주권이 온전하게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는 역사용어임)의 상징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회귀한 1997년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