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활쏘기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활쏘기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인류가 활과 화살을 사용한 것은 대략 기원전 2만 년경 구석기시대부터였을 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활은 길이가 1m 전후 정도 며, 활촉 무게는 대략 11.25g, 화살은 3.75g에 불과하다. 하지만 서유럽, 북아프리카, 동아시아의 각종 벽화와 ‘활쏘는 헤라클레스’상 등의 미술품이 말
해 주듯이 고대 동서양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기였다. 활은 총과 대포가 출현한 근대 이전까 지 근접전에서 원거리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원시 무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 조상은 유달리 활을 잘 쏘았던 모양이다. 중국사서 삼국지 위서(魏書) 제30 동이(東夷)전에 그런 기록이 있고,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도 나와 있듯이 고구려인은 말 등에서 두 손으로 활을 쏠 수 있을 만큼 능수능란했다. 올림픽 양궁경기에서 한국선수단이 7회 연속 메달을 석권하다시피 한 게 우연이 아니다. 활 다루는 재능이 DNA로 전승돼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주몽ㆍ양만춘 등 역사적으로 숱한 명궁이 배출된 토양이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도 활을 잘 쏜 명궁이었다. 충무공이 서서 활을 쏘는 보사(步射)와 말을 타
고 쏘는 기사(騎射) 등 활쏘기의 각종 자세에 모두 숙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무과의 전시(殿試)에 급제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공의 활쏘기 명중률은 대략 84%정도였다.
현존 기록에 의하면 10순(1개 순은 화살 5개의 한 묶음)을 쏘면 5발 명중이 5개 순, 4발 명중
이 2개 순, 3발 명중이 3개 순이었다. 공이 활에 능했던 이유는 타고난 생득적 감각에다 후천적 획득형질이 가미된 것이리라. 즉 좋은 화살통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했을 정도로 평소 활을 가까이 하면서 활쏘기에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였다. 공은 하루 일과처럼 상시로 활을 쐈다. 당연히 수하의 부하들에게 도 활쏘기를 강조했다. 이는 조선 중기 수군이 천시되면서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짐에 따라 대를 이어 수군직을 승계하도록 한 세전화(世傳化)로 인해 수군, 특히 함선공격을 담당했던 사관(射官)의 활쏘기 능력이 부실해진 상황에서 유비무환의 의미를 지녔다.
공에게 활쏘기는 군사훈련이 자 체력단련의 수단이었다. 활터도 공문서를 작성하는 업무 공간이자 중요한 요담을 나누는 장소로 활용했다. 공의 높은 명중률은 고도의 정신통일 및 집중력이 발휘된 결과로 보인다. ‘열녀전(烈女傳)’에 화가 가라앉지 않으면 화살을 날려선 안 된다고 했는데, 그만큼 마음이 안정돼 있었다는 증거다.
공의 활쏘기는 평소 실전처럼 연습한 게 고스란히 전투에까지 이어져 빛을 발했다. 임진전쟁에서도 공은 여러 해 전에 나가 몸소 함선갑판 위에서 병사들과 같이 활을 쏘았다. 사천해전에선 사부(射夫)들과 함께 활을 쏘다가 일본군의 조총에 왼쪽 어깨를 맞기도 했다. 먼 섬에서 포를 쏘는 왜군을 활로 쏘아 목을 맞힐 정도로 적중률이 높았으므로 왜군들은 공의 활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충무공에게 활쏘기는 단순히 무기를 다루거나 체력단련에 그 치지 않고 정신집중과 마음수양
이라는 정신영역에까지 확장돼 있었다. 이 점은 물신화가 극에 달한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귀감이 아닌가!
위 글은 2012년 12월 11일자 『국방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