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11년 1월 26일 정오, 제정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뻬스쩰가 5번지의 한 저택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자결이었든, 아니면 러시아 주재 일본 무관들이 꾸민 자살을 가장한 암살이었든 초대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의 삶은 그렇게 마감됐다. 1956년 한국인 친일 전범 박병두(일본명 靑山三藏)는 일본정부의 탄원에 응한 소련정부의 조치로 일본으로 이송되면서 자결하지 않았다. 또 살해되지도 않았다.
2011년 10월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북방묘지'에 안장돼 있었고, 박병두는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 군사문서보관소의 전범심문기록으로 남아있었다. 한 사람은 조국을 위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한 애국자로서 영생자의 자태였고, 다른 한 사람은 민족혼이 거세된 친일반역자의 데꾼한 몰골이었다. 상반된 역사의 평가를 받으며, 두 사람이 거한 양지와 음지는 극명하게 대비된 삶의 과보이자 역사의 필연적 회귀처다.
구한말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범진은 1901년 주러 공사로 부임해 외교전권대표로 일하면서 을사늑약 후 일제의 압력을 받은 조선조정의 소환명령에도 불응하고 공사직을 계속 수행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한 일제의 국권 찬탈에 울분을 토하며 조국의 국권상실과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유서를 고종황제 앞으로 남기고 59세라는 초로의 나이에 타계한 것이다.
1895년 평안북도 안주 출생의 박병두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군 중위로 임관한 뒤 한 때 항일운동에 가담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만주침략이라는 ‘찰나’에 미혹돼 만주군에 자원입대 한 뒤 해방직전까지 일본군 소장 계급으로 일본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지내다가 1946년 1월 평양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됐다. 그리고 소련 군사재판에 회부돼 '조선민족의 이익을 배반'한 죄목으로 25년 형을 선고 받고 일본송환 전까지 10여 년간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잿빛 하늘의 러시아 방문 기간 내내 버성긴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삶의 리비도가 다해 가면 나약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자진이든 타살이든 이범진도 생의 종결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형언불가의 인간적 고뇌와 겹겹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박병두도 항일운동가에서 친일분자로 변절할 즈음 적잖은 번뇌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결정은 서로 달랐다. 雲泥之差였다. 전자는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 조선의 선비답게 식민지‘신민’의 치욕스런 삶을 거부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반면, 후자는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다. 박병두는 친일로 부귀영달을 얻었을런진 몰라도 천형을 되풀이 하는 시지프스처럼 친일파라는 주홍글씨를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역사’를 살아야 한다.
평소 곧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체화돼 있지 않으면 위난의 상황에선 변절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국가 공직자라면 결정의 연속인 삶에서 작은 공무라도 매 순간 국가와 민족과 역사를 의식해야 한다. 臨淵堂 李亮淵은 자신을 警責하는 삶의 표상으로 이런 한시를 남겼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뒤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위 글은 2011년 12월 22일자『국방일보』에 실린 칼럼의 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