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의 유배시 獨笑
茶山의 유배시 獨笑
茶山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500년을 통털어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자 지성인이었다. 재주가 출중했던 만큼 鴻志도 작지 않았고, 가슴에 품은 한 또한 많았다.
다산이 만약 조선의 여느 사대부처럼 벼슬길이 평탄했다면 절대 최상급의 수많은 역저들을 내면서 최고 지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비를 선비답게 만들었고, 문인으로서 시적 재능이 한껏 만개될 수 있었으며, 지식이 지성으로 승화된 까닭은 환난고초의 기나긴 유배 때문이었다. 유배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조선 지성사에서 선연히 빛나는 큰 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양과는 다른, 사마천이 그랬던 것처럼 동양 고금의 지성사에서 보이는 찬술의 반전, 역설의 전형이다.
1801년부터 시작된 다산의 유배는 18년 쯤 지속돼 1818년 57세에 이르러 끝이 났다. 심신이 허약할 대로 허약한 뒤에 찾아든 오랜 해갈이었다. 다산이 그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결국 文에 대한 숭상과 지성을 향한 쉼없는 학구정신이었다.
허나, 그래 봤자였다. 유배에서 풀려나고 난 후에도 일흔 다섯으로 죽게 된 1836년까지도 유배는 아니었지만 실상은 유배와 같은 삶을 살았다. 단지 유배지에서만 풀려났을 뿐 그가 살았던 삶의 처지와 질은 유배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이 겪었던 환난고초, 萬難 풍상, 모멸과 좌절, 실의와 비탄, 절망과 회한이 어떻게 깊은 성찰과 사색과 침잠을 거쳐 우뚝 선 태산으로 승화되었는지 다시금 되새겨 본다. 그가 남긴 적지 않은 주옥같은 시작들이 새삼 위안이 되고 도반이 된다.
獨笑
有粟無人食
多男必患飢
達管必憃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郞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홀로 웃네
곡식이 있어도 먹을 사람 없고
자식이 많아도 배고파 걱정이네
높은 벼슬아치가 꼭 바보스러워야 한다면
재능 있는 자는 써먹을 곳이 없네
완전한 복을 다 갖춘 집은 적고
최고의 길은 늘 쇠미하기 마련이라네
아비가 인색하면 자식은 매양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항상 어리석지
달은 찰수록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은 필수록 바람이 망쳐놓는다네
만물이 죄다 그러해서
홀로 웃는데 아는 이가 없구나.
다산은 조선조 조사대부들 중에 가장 많은 시를 쓴 사람이다. 위 시는 그의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다. 다산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전범으로 삼은 시경 이후 중국의 시인들 중엔 두보의 시를 으뜸으로 쳤다. 두보의 시에는 이백과 달리 삶에 대한 고뇌와 현실참여, 즉 앙가주망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조 사거로 불의한 노론 세력의 정치적 제거의 핵심인물로 찍혀서 억울하게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한 자신의 처지가 처작식을 떠나 유랑을 한 두보의 심사와 오버랩됐을 것이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자주 고향의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저런 교육을 해왔는데 장남 학연에게 보낸 서한에서 시 쓰기를 권장하면서 자신의 시론이라고 볼 수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위 시 獨笑는 다산이 세상을 바라보는 근심어린 시선이 녹아 있다. 모름지기 바람직한 인간사라면 응당 그리 되어야만 하는 바람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사대부의 어리석음과 불평등, 부자지간, 부부지간 등등이다. 그런데 다산이 생각하는 대로 세상, 가정과 인간관계들이 흘러 가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조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대상과 불일치에서 오는 소외의식이 내재돼 있어 보인다.
2022. 4. 07:5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