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바람결에 시가 된 남해의 풍광들

雲靜, 仰天 2021. 8. 6. 08:39

바람결에 시가 된 남해의 풍광들

 

과거 한 때, 나는 일본인들이 일본의 國師로 칭송한 시바 료타로우(司馬遼太郞, 1923~1996)가 일본의 남도여행에 이어 대만 전도를 순례하고 여행기를 낸 것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시바는 博覽强記형의 당대 일본의 최고 지식인이자 소설가로서 인기와 명예를 누린 인물이다. 그는 장장 25년에 걸쳐서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포르투갈, 미국, 몽골, 중국, 한국, 대만 등지도 순례하면서 기행문을 발표했다.
 
나는 그가 47세 때인 1971년週刊朝日에 연재한 기행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해 베스트셀러가 된『街道をゆく』(가도를 가다)를, 또 내가 대만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인 1994년에 펴낸『台湾紀行내심 부러운 눈으로 곁눈질 한 바 있다. 대만 총통 李登輝도 자신의 팬이었던 시바는 명예와 폭넓은 인기를 누린 시대의 행운아였다. 나는 언제나 저 작가처럼 인문학적 시각으로 직업으로서의 여행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까? 이게 그 시절 내가 시바를 부러워한 이유였다.
 
시바가 한 직업적 여행은 아니지만 작년부터 코로나19라는 뜻밖의 범인류적 재앙 때문에 역설적으로 내게도 국내를 여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직업여행가가 아니어서 시바료타로우처럼 곳곳을 속살 저미듯이, 혹은 호미로 밭이랑을 매듯이 자근자근 할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이번에도 본격적인 프로페셔널한 여행이 아니고 처가 식구들과 함께 바람 쐬러 나온 기분전환으로 만족해야 한다.
 
남해도를 일주하고 우리는 이제 서쪽의 노량대교로 빠져나가는 코스로 들어섰다. 남해 섬을 한 바퀴 돌아보니 전반적으로 한려수도라는 말이 결코 虛辭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 말에 걸맞게 장난감 같은 섬, 소인국 같은 포구, 훼하스 과자 모양의 다리, 넉넉한 산야와 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해수욕장 등이 어울어진 아름다운 풍광들이 길과 바다에 연해 연속되는 보물섬 같다는 느낌이다. 
 
프랑스의 민족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I, 1769~1821)는 러시아 정복에 실패한 뒤 1814년 이탈리아의 자기 고향섬 옆 엘바(Elba)섬으로 유배를 당한 뒤 이 섬을 탈출해 이듬해 재차 황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가 손바닥만한 크기(면적 224)의 엘바섬이 아니라 엘바섬 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이곳 남해도(면적 357.52㎢)로 추방당했었다면 아마도 굳이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속 황제보다 신선들이 노는 보물섬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만화 같은 공상이 발동해서다. 보나파르트도 코르시카(Corsica)라는 섬 출신이지만 이곳 남해섬에 유폐됐더라면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가 아니라 "내 사전엔 탈출은 없다!"라고 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나파르트의 첫 유배지 엘바섬. 남해도 보다 크기도 작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해안을 제외하곤 섬 안쪽은 암석과 나무가 없는 황량한 곳이다. 그에 비해 남해는 섬 전체가 초록과 남빛 일색이다
2020년 1월, 초순 오스트리아 여행시 다비드(1748~1825)가 1801년에 그린 작품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앞에 선 멀대(수도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우리가 자동차로 지나온 곳은 독일마을을 떠나 대략 미조도, 상주리, 화계리, 용소리, 남면, 덕월리, 서면, 남해군 소재지, 유배문학관, 고현면, 노량대교의 경로였다. 지나오고나서 보니까 남해군청에서 소개한 남해 관광루트와 비슷한 길로 다닌 것이다. 대략 아래 지도상의 붉은 선으로 다닌 셈이다.
 

 
당일치기로 떠나온 이상, 시간관계상 한 곳에서 내려 여유를 갖고 찬찬히 음미할 형편이 못 됐다. 주마간산 보다 더 빠른 走車看景 격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그런지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전경들이 꿈결에서 본 고향이거나 혹은 생시에 동경한 노스탤저의 모습인 듯 했다. 慾界를 너머 仙界 같은 秘境에 더 머물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게 아니다. 어차피 모든 여행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도 찰나의 여유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여행은 꿈결에 밟는 逍遙遊 같은 것이다. 대붕을 타고 구만리 長天을 날아도 한갓 꿈속이요, 개미들에 이끌려 지하의 구멍 속에서 미로를 헤매도 한 나절의 몽환이 아닌가?
 

조물주가 있다면 그 외에는 그 어떤 예술가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 남해도민들의 태생적 복이자 대한민국의 축복이다.
남해 일대는 멸치 어획량이 상당하다. 남해가 멸치회로 이름난 이유다. 독일마을에서 독일식으로 이미 점심을 먹었지만 장인어른이 멸치회를 좋아 하시는 데다 나도 이곳의 명물인 멸치회의 본고장 맛을 보지 못하고 가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서 이동 도중에 잠시 미포항에 내려서 점 한 점 찍었다.
사금처럼 점점이 반짝이는 은비늘들, 몸체는 바닷속에서 유영을 하고 있을테지!

 

남해에는 아름다운 섬들만 있는 게 아니다. 가파른 산도 많이 보인다. 눈대중으로 대략 평균 해발 500~600m는 돼 보이는 산들이 지상에서 솟아올라 있어 실제 보다 더 높게 보인다. 산세가 눈길을 끄길래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엔 5개의 산이 이름 나 있다고 한다. 해수관음 기도도량 보리암이 있다는 금산(681m), 응봉산(471.5m), 설흘산(482m),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호구산(627m), 망운산(786m)이다. 산세가 가파른 만큼 지질도 기름지면 좋겠다. 설령 땅이 기름지지 않아도 이 넓은 남해 땅이라면 4만 명 남짓한 정도의 남해군민들 쯤은 너끈히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남해는 한려수도의 일부일 뿐이다. 인근의 올망졸망한 반도와 섬들로 구획된 광활한 해역을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응봉산 아래 도로를 지나면서 힐끔 보니 이 산 정상에서 서쪽을 보면 맞은편의 오동도가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남해에서 여수시의 돌출된 곳은 그다지 멀지 않다. 지도를 보니 10km도 채 되지 않을 듯하다. 또 반대로 멀리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국의 나폴리 통영과 거제도 일대의 한려수도와도 바다로 연접해 있다.

남해읍 시가지의 일부
남해에서 서쪽 뭍으로 통하는 노량대교
하동 쪽 방향의 뭍에서 남해도로 들어가는 남해대교(좌)와 노량대교(우). 몇 년 전만 해도 남해대교가 남해의 트레이드마크였을 만큼 명물이었지만 그 뒤 노량대교가 생겨났다.

 

짧은 시간에 천하를 주유한 듯해도 지나고 나서 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저 선으로 이어지는 작은 면들에 불과하다. 남해가 작은 섬, 아니 육지로 연결된 협소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에 들어가면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아라비안나이트의 양탄자처럼 펼쳐진다. 사람, 섬과 바다, 산과 들, 시내와 계곡이 있는가하면 몽돌해변, 설리해수욕장 등등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절경지도 많아서 그 자체로 완결미를 느끼게 해준다. 물론 곁에 다가가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미세하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추하게 보이는 게 물리적 세계다. 때론 그 세계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역설도 있지만! 그래서 동시에 미세의 정도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지기도 하는 게 만물의 두 모습, 이율배반적 양태다. 모든 사물은 美와 醜의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쳐 지나갔기에 바람결에 시가 된 남해! 어른들과 함께한 찰나 같은 꿈결에 별이 된 남해! 나의 비주얼 주머니에 다도해의 진주들처럼 점점이, 8월 염천에 속살을 드러낸 농염한 석류알처럼 알알이 꽉 차게 들어선 남해가 서서히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남해여 안녕! 꿈결이여 안녕!

 

당일치기 짧은 여행을 끝내면서 감사해야 할 게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다닌 지역은 요 며칠 사이에 코로나 확진자가 가장 많이 생긴 곳이었음에도 다행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별히 조심하고 유의하면서 다녔지만, 코로나가 나를 피했었는지 아니면 내가 코로나균들 사이로 헤집고 다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로지 감사할 따름이다!

 
2021. 8. 5. 21:55
마산 처가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