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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의 순애보 : 10년 이상 아내 간병해오는 노신사와의 짧은 해후

雲靜, 仰天 2021. 8. 6. 08:22

진해의 순애보 : 10년 이상 아내 간병해오는 노신사와의 짧은 해후

 

젊은 시절부터 초로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금슬 좋던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 중풍을 맞아 쓰러진 뒤로 남편이 7순이 다 돼가는 나이임에도 근 10년이나 병간호와 수발을 들고 있다. 이 노신사는 해군역사기록단장직을 끝으로 40년 가까운 군대 생활을 마친 예비역 해군 대령이다. 나와는 10여년 전인 2006년 쯤 군에서 인연이 되면서 호형호제하기로 한 사이다.

 

그런데 나는 형수님이 쓰러지고 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 속에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물론 가끔씩 전화나 카톡으로 소식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걸로 죄송스러움이 상쇄되는 건 아니다. 그럴 마음도 없다. 인연이 닿고서도 전역 후엔 멀리 서울과 진해에서 각기 떨어져 살다보니 멀고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병문안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게 마음의 빚이었다. 오랜 숙제이기도 했다. 

 

마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로 진해로 향했다. 집사람이 운전을 하고 빙부님 내외분을 차로 모셔 병문안 후 기분전환을 가기로 하고 같이 떠났다. 구순이 다 된 장인어른이 무더운 여름 한 철을 계속 집 안에만 계셔서 몸과 마음이 답답해하실 것 같아서였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장모님도 함께 갔다.

 

집밖 대문 앞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는 형님을 멀리서 보니 온 머리에 새하얀 눈이 내려 앉아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했다. 집 안에 들어가 인사를 제대로 한 뒤 휠체어에 앉아 있는 형수님을 보니 그 곱던 얼굴은 어디 가고 병색이 완연했다. 걷지 못하고 말까지 할 수 없을 정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식탁 옆 벽에는 옛날 한복을 맵시 있게 입으시고 건강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붙어 있다. 이 사진들을 보니 지나간 옛날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형님께서 해군 역사기록단(계룡대)에 근무하시던 초기 직접 나를 댁으로 초대해주셨을 때 형수님이 손수 술과 식사를 챙겨 주신 기억이 난다. 그때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말씀도 곧잘 잘 하셨지!

 

나를 알아보시겠냐고 인사를 드렸더니 알아 보시는 듯 금방 눈물을 떨구신다. 맺혔거나 하고 싶은 소회가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말을 못하시니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건강하셨던 옛날이 생각나고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겠는가? 이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면서 금새 두 눈이 촉촉해졌다.

 

형님 말씀에 의하면, 형수님은 완전히 쓰러져서 처음엔 인사불성의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는데 지금은 말도 다 알아들으신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호전되기까지에는 환자 본인은 당연하고 건사하는 형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서 이런저런 나눌 얘기도 적지 않았지만 바깥 차 안에서 장인 장모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시간을 많이 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형님을 모시고 대폿잔라도 기울이면서 회포를 풀어 드려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참으로 아쉬운 시간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형님과 형수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내가 간다니까 형님은 되려 나에게 선사하기 위해 미리 귀중한 보이차와 넥타이까지 준비해놓고 계셨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해후를 마치고 나는 이곳까지 온 김에 장인 내외분을 모시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진해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진해루에 바람을 쐬러 갔다. 진해루까지는 승용차로 반시간도 채 되지 않은 거리였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세계 최고의 전략가다운 안목으로 임진왜란 때 이곳의 지세를 잘 이용했다. 진해시 뒤로는 높은 불모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천혜의 군항이자 미항이다.

 

 

 

진해루에 올라서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진해만을 바라보니 가슴이 확 트였다. 바람에 파도가 연신 출렁이고 멀리 배들도 그림처럼 떠있다. 평화로운 광경이다. 40여 년 전 집을 나간 여동생이 이곳 진해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은 고인이 된 어머니와 같이 동생을 찾으러 온 기억도 되살아난다.

 

역사 인물들 중에는 내가 최고로 존숭하면서 삶의 이정표처럼 생각해오고 있는 충무공의 모습도 눈에 어른거린다. 멀리 진해만 우측 편에 해군사관학교가 있다고 생각하니 10여 년 전 내가 해사와 얽힌 지난 일들이 되살아난다. 언젠가 초여름 날, 해사 축제 기간에 배 모 교수의 학술세미나 초청을 받아 장인 장모님을 초청해서 해사 교장실에서 교장의 인사를 받은 뒤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논문을 발표한 일, 또 그 뒤로도 또 한 번 초청을 받고 내려와서 늠름하고 헌걸찬 해사 생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추억들도 떠오른다. 그게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뀐 시간이 흘렀다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당시의 잔영들이 진해만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진해만,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조금 전 작별을 하고 나온 형님 내외분의 잔상과 아쉬움이 남아 있다. 몸은 진해루에 올라 있고, 눈은 진해만을 바라보면서도 머리속엔 이런저런 상념들이 스쳐갔다. 부부란 무엇일까? 형수님의 건강 회복은 불가능할까? 예상치 못하게 어느 날 돌연 찾아든 우환, 그 상황을 운명처럼 끝까지 관리하고 수발해오고 계신 형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형님도 이제 늙어가는 연세라서 본인 건강도 많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인데 이중고를 겪고 계신다. 요즘 같이 인륜이 땅에 떨어진 세상에 뭇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다. 아래에 적어 놨다.

 

身已老白髮
護疾妻如己
衆啊仿純愛
冥來生因緣

 

나이 들어 백발이 성성한 몸이 돼도
병든 아내 내 몸같이 수발드네
사람들아 닮아보게 진해의 순애보를
내생까지 같이 갈 인연이로고!

 

인생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부부의 인연이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인위적으로,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힘과 끈이 작용한다고 해서 일본인들은 인연을 合縁奇縁(あいえんきえん)이라고 하지 않는가? 평생을 해로하다 부부가 각기 죽어서 가는 곳이 다르면 얼마나 슬플까?

 

이런 저런 상념도 잠시! 또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 할 시간이어서 상념은 여기서 끝난다. 형님 죄송합니다! 다시 뵐 때까지 늘 健安하시길 빕니다. 형수님도 병세가 호전되시길 멀리서나마 기도하겠습니다.

 

 

 

2021. 8. 6. 08:24

마산 처가에서

雲靜 초고